문화에 목 마른 국민들 마음 채우기 위해 수행할 과업
   
▲ 심상민 성신여대교수

영화 ‘명량’엔 격정이 요동을 친다. 두 시간 내내 눈물이 앞을 가린다. 눈물은 뜨겁기도 했지만 그 빛은 찬 바다처럼 서늘하다. 여기 영화 하나가 우리 역사 물꼬를 부들부들 떨며 가리키고 있나 보다.

‘명량’이 하루 100만 관객 시대를 열고 닷새 만에 400만 명을 넘어섰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세월호 이후 극도로 침체된 경기가 바닥 치고 현찰 잉크 내음이 진동하기 시작했나?

움츠려 땅으로 꺼진 듯 숨죽였던 사람들 불러 낸 동춘 서커스단 딴따라 나팔인가?

극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찬 건 ‘명량’을 찾은 이들의 처진 어깨와 떨군 고개였다. 몹시도 허전했으리라. 들뜬 기분도 없어 영화관 나들이 행렬은 대체로 웅성대지 않았다.

데이트 무비가 아니었다 해도 엄마와 틴에이저, 중년 부부, 온 가족 부대가 유달리 반짝거렸다.

조상 문안 올리듯 이순신장군을 조아렸다. 영화가 끝나고 엉킨 군중 속에서 절감할 수 있었다. 문화에 목마르구나. 지금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메마르고 아주 많이 문화를 필요로 하는구나.

노상 비워야 했고 눈물도 용돈도 여윳돈도 증발해버렸으니 이제부턴 부지런히 채우고 담고 해야 하는구나.

이렇게 마른 우물과 같았던 국민들 마음을 다시 찰랑거리게 채우기 위해선 몇 가지 수행할 과업이 있다. 우선 영화발전기금 3%다. 어느새 많은 관계자들이 티켓에 박힌 영화발전기금 3%를 미워하게 되었다. 시한부 준조세였음을 들춘다.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를 공식 발표한 다음날 내놓은 한국영화 발전 대책이 바로 영화발전기금 조성이었다. 2007년 징수가 시작된 영화발전기금은 올해 말 만료를 앞두고 있다.

2021년까지 기금 징수 연장을 내용으로 하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지난해 4월 국회에 제출됐지만 아직 계류 중이다. 지난달에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한국영화제작가협회가 함께 포럼을 열어 “영화발전기금 연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발 의견도 만만찮다.

한국영화가 자생력을 갖추었으니 영화발전기금 운영은 의미 없다는 견해다. 문화부도 모호하면서 소극적인 태도다. 가뜩이나 이견 많고 잡음도 따르는 모태펀드 지원, 글로벌 펀드 운영에 대한 부담을 생각하면 아예 기금 폐지가 낫다는 논리도 등등하다.

정책 다이어트인가? 골치 아프고 귀찮기로 치면 최강 수준인 영화 정책메뉴에서 한 가지라도 없애는 게 더 이득이라는 주장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 명품 ‘명량’은 그런 지·못·미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라고 지엄하게 타일러준다. 지·못·미. 또 한 번 “한국영화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다.

   
▲ 영화 '명량' 포스터

먼저 기금이나 펀드에 관해 점검해 보자. 프랑스나 독일, 영국, 미국도 모두 영화에 관한한 기금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우리처럼 영화표 값에서 240원씩으로 떼진 않지만 실은 더 강력하고 묵직한 경로로 돈을 모은다.

프랑스는 1985년부터 소피카(SOFICA)를 통해 개인 투자자 감세 조치를 하고 있고 공영방송사들이 자국 영화에 투자토록 강제하는 쿼터제를 가동한다. 간접이지만 훨씬 더 쫀쫀한 시스템이다.

영국도 국립기금이 있고 독일에는 잘 발달한 지방정부 차원 영화기금들이 있다. 독일은 아예 ‘밖을 향함’이라는 기조를 내세워 독일인의 세금으로 조성한 기금을 외국영화에 직접 투자하는 기행에 가까운 파격을 계속하고 있다.

헐리우드 영화 ‘작전명 발키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영국 영화 ‘킹스 스피치’ 등이 바로 독일 기금으로부터 직접 수혜 받은 외국 작품들이다.

독일이 자존심을 꺾고 남의 영화에 현금을 줘가면서 지원하는 까닭은 단연 문화융성에 있다.

영화가 문화산업 전체를 이끌 에이스이므로 자국 영화 발전을 통해 세계 챔피언 독일의 정체성을 찾고 지속가능한 국가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장은 굴욕스럽지만 미국, 영국 영화로부터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 받아 쓰러진 독일 영화에 자극과 활력을 줘야 한다는 충격 요법이기도 하다.

한국도 사회 전체가 영화발전기금 3% 의미를 잘 새겨봐야 한다. 작년처럼 2억 명 관객이면 한 해 500억 원 정도 기금이 조성된다.

유사한 문예진흥기금이나 관광기금, 방송발전기금에 비해 적지 않지만 조 단위를 넘긴 정보통신진흥기금에 비할 바는 아니다.

티켓 값에 연동하는 문예진흥기금 말고 다른 기금들은 대기업 등 사업자들이 직접 분담하는 구조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중요한 것은 영화발전기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겠노라는 정책 의지와 전문 능력이다.

이 부분 철저히 혁신하여 아직도 백의종군하다시피 내몰려 급료도 제대로 못 받고 쓸 만한 공공 촬영시설 하나 없이 떠도는 ‘명량’ 김한민 감독 이하 한국영화 자원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 다음 과제는 바로 영화발전기금 3% 존폐 논란쯤은 삽시간에 잠재울 국가전략이라는 실체다. 이번에 정부가 처음 단행한 월례 경제정책 브리핑에 해답이 있다.

안종범 청와대경제수석이 1일 나선 첫 브리핑에 부각된 서비스산업발전을 뜯어보자. 홍시에 비유한대로 투자활성화 법안 가운데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지난 2012년 7월 정부가 국회에 제출된 이후 여태 쉬어 터지고 있다.

정부는 특히 외국인환자유치와 같은 보건의료 차원 홍시 수확에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홍시 농사는 약간 엉뚱한데서 숭늉을 찾는 듯 보인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바로 지금 활활 불타고 있는 서비스산업 중핵을 모르는 경제팀이 아닌가 여겨져 안타까울 따름이다. 안수석이 말한 대로 경제 활성화 불씨가 활활 타올라 경제의 재도약을 해야 한다는데 전적으로 동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불씨가 타올라야할 곳을 말하지 말고 타오르고 있는 현장을 다룰 줄 아는 경제팀을 원한다. 지금 이 현장 ‘명량’에서, ‘군도’에서 경제 활성화가 되었든 무슨 살풀이 몸부림이 되었든 뭔가가 활활 타오르고 있음을 똑바로 봐야 옳다.

이런 동력 이런 에너지를 확인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영화가 역대 최고 기록을 갱신하며 활활 타오르는 것은 우리 경제 무게 중심이 새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일러준다.

영화는 곧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다. 그러면서 8월 1일 월례 경제정책 브리핑 주력에 이미 담겨 있는 서비스산업의 대표 주자이기도 하다.

어째서 보건 의료산업만 바라보고 전통의 글로벌 대박 서비스산업인 미디어는 소 닭 보듯 하고 마는가? 사실 문화콘텐츠산업은 경제부처가 근래 10여 년 응시해온 말로만 국가전략 품목이었다.

금융, 유통을 대신할 주력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서비스산업에서 금융과 유통이 양대 축이라지만 한국 금융산업은 외환위기를 해독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해있다.

유통산업은 한껏 대형화되었지만 대기업 과잉으로 변질되어 역시 국제적 경쟁력 면에서 마땅찮다. 그래서 정부는 대타로 보건의료산업쯤을 찾아 낸 듯하다. 물론 의료한류도 있고 의료관광도 되니 매우 중요한 견인차라고 본다.

그렇지만 차세대 성장산업과 현세대 주력산업은 분명히 구분해서 봐야 한다. 보건의료산업은 그야말로 경제수석이 표현한대로 활활 불태워 키워나가야 할 산업, 즉 차세대 성장산업이다.

이에 비해 영화와 방송, 게임, OTT(over the top: 인터넷 동영상서비스)와 같은 미디어, 문화, 창조산업은 바로 지금 여기 현장에서 활활 불붙은 현세대 국가주력산업이다.

5000만 인구에서 400만 가까운 국민이 닷새 동안 무더위 뚫고 장맛비 무릅쓰고 영화 한 편을 찾아 본 동인을 분석해야 한다. 문화로 새 경제를 해야 한다는 큰 메시지를 받아야 한다.

한국은 다름 아닌 문화라는 서비스산업으로 새 경제 활력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이 확실한 현장에 정성을 들여 서비스산업 전체로 파급시킬 새 동력을 찾아나가는 게 이 정부 막차로 남은 홍시, 창조경제 초심이기도 하다.

한 가지만 예시해본다. 영화발전기금 3%, 1년 500억 원 쌈짓돈을 모아 정부는 무얼 해야 하는가?

보라. ‘명량’에는 서비스 산업으로서 커다란 취약점이 있다. 내수용이라는 치명적 한계다.

가령 이순신학을 선양하는 콘텐츠 R&D에 20억 원을 투자하면 ‘명량’에 이은 ‘노량’을 글로벌 시장에 맞춰 기획할 수 있다. 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을 수도 있다.

명나라 등자룡(鄧子龍)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했다고 강조한 시진핑 주석 서울대 강연을 모티프로 중국 관객 수천만 명을 매혹시킬 글로벌 ‘노량’을 수출할 수 있다. 이런 투자와 관심이 바로 새 경제가 역점을 두어야 할 생생한 창조경제 현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영화 ‘명량’은 영어 타이틀로 [ROARING CURRENTS]를 정했다. 명량 회오리 바다가 세계무대이고 충무공이 탄 본선이 청와대나 삼성전자라고 한다면 정말 이것 없이는 곧 침몰할 지도 모른다는 데자뷰를 전해주었다.

‘이것’은 영화에 나온 대로 본선을 살려내는 백성의 조각배들이다. 백성 조각배가 살길을 찾아 서비스산업, 그 중에서도 가장 확실하고 언제나 뭉클한 미디어·문화·창조산업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최경환 부총리 2기 경제팀과 경제 리더들은 엉뚱한 서비스산업이나 멀리 있는 소프트웨어 타령하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 백성의 움직임을 받들어야 한다.

영화 ‘명량’은 돈도 인프라도 없어 글로벌 기획 못한 촌스런 내수 상품일지 몰라도 지금 온 나라를 활활 태워 분위기를 살리고 있다.

이런 미디어, 문화, 창조산업에다가 새 경제 새 서비스산업의 명운을 걸어야 산다. 영화발전기금 3%, 500억원 종자에 더해 국부펀드 5000억 원, 1조원이라도 몰아치는 예산폭탄을 단행한다면 세계 챔피언 도전, 그것 한 번 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