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장경제체제, 세계15위 경제대국 도약, 사회주의 북한 패망의 길로

1948년 8월15일 건국일(建國日)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대한민국이 출범했다는 데 진정한 의미가 있다. 조선봉건왕조 경제체제는 자연경제에 바탕을 둔 국가재분배경제에 불과했다. 시장경제는 부차적 지위에 머물렀을 뿐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와 함께 시장경제체제가 성립했다. 일제의 시장경제체제는 식민지 조선을 통치 지배하기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한국인이 스스로의 의지로 시장경제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1948년 8월15일 건국일이다. 한민족역사에서 시장경제체제라는 대전환이 이루어진 날이다.  

   
▲ 자유경제원이 14일 8.15건국일을 앞두고 <8.15건국의 의미:시장경제체제의 도입>이란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왼쪽부터 강규형 명지대교수, 이영훈 서울대교수, 현진권 자유경제원장,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 김용삼 경기콘텐츠진흥원 감사.

대한민국은 시장경제체제 도입으로 번영의 길로 들어섰다. 건국 초기엔 중요 산업시설과 자연의 국유화, 분점화 등 국가자본주의, 민족사회주의형태를 보였다. 미군정 실시와 미국의 경제원조를 계기로 자유민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정착됐다. 한국은 이제 경제규모 세계 15위, 무역규모 7위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했다.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보장을 바탕으로 시장경제체제의  꽃이 만개하면서 선진부국으로 들어서고 있다.

최근 경제민주화 포퓰리즘은 우리 건국당시 헌법의 근간인 시장경제체제를 위협하고 있다. 재산권 제약과 규제가 급증하고 있다. 시장경제의 근간을 훼손하고 있다. 사적 영역의 사법체계가 재산권 제약과 정부개입위주의 공법으로 전환되고 있다. 

경제민주화는 결과적 평등과 분배를 중시하면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입각한 대한민국을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변질시키고 있다.  정치권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사회민주주의적 입법에 혈안이 돼 있다. 실로 국가정체성이 위기를 맞고 있다.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8.15 건국일을 맞아 14일 <8·15건국의 의미 :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번 토론회는 광복절로만 기념해왔던 8월 15일을 66년 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대한민국 역사를 만든 ‘건국일’로 기념하고, 정치적 관점으로 제한됐던 건국의 의미를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이라는 관점으로 확대·재조명하기 위해 마련했다.

건국일은 정치적인 광복 만이 아니라, 개인과 시민이 경제적으로도 광복된 날이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재산권도 보호받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것이 경제적 번영을 가능케한 일등공신이다.
 
주제발표를 한  이영훈 서울대학교 교수(경제학부)는 “8·15건국의 참된 의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도입이라는 국가의 토대가 바로 세워진 데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건국일로 기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건국 당시의 경제체제는 민족사회주의 또는 국가자본주의를 지향했지만, 1954년 2차 헌법 개정을 통해 자유경제체제가 바로섰다”고 말했다. 지금같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는 건국 이후 6년의 우여곡절 끝에 확립된 소중한 역사적 성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 14일 자유경제원 회의실에서 열린 <8.15건국의 의미:시장경제체의 도입>정책토론회에는 많은 인사들이 참석해 1948년 8월 15일 건국의 의미를 재조명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발표자들은 건국헌법에 담긴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 보호, 시장경제체제가 대한민국을 세계15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했다.
 
토론자로 나선 강규형 명지대 교수(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는 건국의 탄탄한 기초에 ‘농지개혁’이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규형 교수는  “농지개혁에 따른 지주계급의 소멸은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사적으로 큰 의의를 갖는다"고 했다.

당시 필리핀보다도 못살던 우리나라가 오늘날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토지개혁, 농지개혁에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규형 교수는 “북한은 한 번도 소유권 분배를 실시 한 적 없기 때문에 패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시장경제체제 소유권·재산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이다.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도 토론에서  "우리사회의 정체성 혼란 및 갈등이 벌어지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체제 건국이념이 상실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광동 원장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건국이념 바로세우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원장은 “건국이념 정립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북한 전체주의와 대결하고 있으며, 이승만 건국 정부가 세운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의 확산과 정착이라는 과제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김용삼 경기콘텐츠진흥원 감사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산업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김용삼 감사는 “이승만은 일찍이 자유경제와 기업 육성이 국가 번영의 기초라는 깨달음으로 건국이념을 세운 대통령”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이영훈 교수의 주제발표문 전문이다.[편집자주]

   
▲ 이영훈 서울대교수(가운데)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대전환으로서 건국헌법

1948년 7월 17일에 공포된 건국헌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였다(5조). 또한 건국헌법은 재산권을 보장하였다(15조). 나아가 한계를 두었지만 ‘각인의 경제상 자유’를 인정하였다(84조).

이들 조항에 근거하여 헌법학자들은 대한민국의 경제체제가 자유시장경제로 성립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공산주의의 계급독재와 계획경제에 반대한 여러 정치세력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은 보호돼야 한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한 여러 정치세력은 각기 지향하는 바가 달랐지만, 이 점에 관한 한 하나였다.
 

이 점에서 건국헌법이 지닌 제1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9세기말까지 조선왕조의 경제체제는 자연경제에 바탕을 둔 국가적 재분배경제였다. 시장경제는 부차적 지위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후 일제의 지배와 더불어 시장경제체제가 성립하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목적과 수단에 불과하였다. 한국인 스스로의 정치적 선택에 의해 시장경제체제가 성립하는 것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에 의해서이다.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는 인류사에서 처음 영국에서 시장경제체제가 성립한 사건을 두고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이라 하였다.

그런 대전환이 한국사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대전환은 이후의 한국을 번영의 길로 이끌었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 제15위의 경제규모와 제7위의 무역규모를 보유하고 있다. 이 같은 한국의 경제적 성공은 1948년 건국헌법의 제정에서 시작되었다. 

민족사회주의

그렇지만 대전환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큰 방향은 올바로 잡았지만, 올바른 길은 찾는 데에는 넘어야 할 장애가 많았다. 건국헌법이 명시한 경제체제는 오늘날과 같은 사기업이 주체가 된 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자본주의, 수정자본주의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혼합경제체제였다.

헌법은 재산권을 보장하였지만,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하며,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15조). 헌법 제84조는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라고 규정하였다(제84조).

   
▲ 현진권 자유경제원장(가운데)이 14일 사회를 보면서 "8.15건국은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 도입을 통해 경제번영으로 가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왼쪽은 이영훈 서울대 교수.

그와 더불어 지하자원, 수산자원, 기타 유용한 자연력을 국유로 하며(제85조), 운수·통신·금융·보험·전기·수리·수도·가스 등의 기업을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며, 대외무역을 국가의 통제 하에 둔다고 하였다(제86조). 또한 국민생활상 긴절한 필요에 따라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그 경영을 통제, 관리할 수 있다고 하였다(제87조). 
 

이 같은 통제경제체제는 제헌의회에서 큰 저항 없이, 오히려 기꺼운 동의로, 채택되었다. 국가의 지나친 통제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의 총사령관을 지낸 이청천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어떠한 반론도 허용치 않았다.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평등을 위하여 잘 살고 고르게 살자는 기본 이념이기 때문에 (중략) 전체주의라는 공산주의 체제와 무제한 자본주의를 취하지 않고 국가권력으로서는 철두철미 민족주의로 나가야 되겠습니다. 경제적으로는 社會主義로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민족사회주의입니다.” 이처럼 건국헌법이 지향한 경제체제는 당시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민족사회주의’였다. 오늘날의 이론적 수준에서 정확히 표현하면 ‘국가자본주의’이다.
 

건국헌법의 사회주의적 지향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 제18조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 조문은 원래 헌법 초안에 없었는데, 국회의 심의과정에서 조영환 의원이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긴급 발의하여 채택된 것이다. 근로자의 이익균점권은 1962년의 제5차 헌법 개정에서 폐지되었지만, 그 정신은 현행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으로 이어지고 있다.

역사의 굴레

대공황(1929) 이후의 세계경제에서는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혼합경제가 지배적 사조를 이루었다. 그와 별도로 독일의 맑스주의자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기본질서를 인정한 위에서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하였다. 건국헌법의 제정에 참여한 법률학자나 정치세력은 이 같은 세계적 사조에 깊이 규정되었다. 그들은 정치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경제는 독일식 사회민주주의를 도입하여 절충하였다.
 

그렇지만 이념적 절충은 표피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한국에서 자본주의 역사는 매우 일천하여 수정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를 운위할 형편이 못되었다. 건국헌법이 혼합경제를 지향한 것은 이념적이라기보다 역사적 조건에 제약된 현실적 선택이었다.

첫째,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개인, 자유, 시장, 경쟁 등의 원리나 개념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낯선 손님이었다. 가장 친숙한 것은 재산권 개념이었다. 위와 같은 원리나 개념은 재산을 가진 자들의 기득권 타령으로 받아들여짐이 보다 솔직한 현실이었다.

둘째, 국가가 중요 산업과 시설을 국유로 경영함은 한국인의 상식적 감각에서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다(Cornelly 보고서). 예컨대 대한제국은 중요 공업시설과 사회간접자본을 황실의 소유로 지배하였다. 뒤를 이은 조선총독부도 마찬가지였다. 총독부는 사실상 거대한 철도회사였다.

셋째, 일제 말기에 구축된 통제경제체제는 미군정기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해방 후 남한의 경제는 마비되었다. 주요 생필품, 원자재, 기계 등의 수입과 배급, 그에 기초한 경제의 재건은 미군정의 통제정책 하에 이루어졌다. 넷째, 귀속재산의 존재이다. 미군정은 총독부, 일본회사, 일본인이 남기고 간 방대한 규모의 사회간접자본, 회사, 공장, 은행, 주택 등을 미군정의 소유로 귀속시킨 다음, 대한민국정부에 이양하였다. 초창기 대한민국의 경제체제는 이미 자연스럽게 국가자본주의 그것이었다. 

이 같은 현실에 제약되어 건국에 참여한 여러 정치세력은 중요 자원과 공업을 국유와 국영으로 함에 의견의 완전한 일치를 보고 있었다. 보수적인 한민당조차 마찬가지였으며, 자유시장경제에 가장 이해가 깊었던 이승만 박사도 마찬가지였다. 1946년 2월에 발표한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에서 이승만은 “중요한 공업과 광업과 삼림과 은행과 철도와 통신과 운수와 모든 공익기관 등 사업을 국유로 만들어 발전시킬 것”이라고 하였다.

   
▲ 강규형 명지대교수(왼쪽)는 패널토론을 통해 8.15건국과정에서 농지개혁을 한 것이 경제번영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기획처와 부흥계획

초창기의 국가자본주의 지향은 기획처의 설치와 부흥계획의 수립으로 나타났다. 기획처는 경제에 관한 종합적 계획을 수립하고 정부 예산을 편성하는 기구로서 국무총리 산하에 설치되었다. 기획처가 예산 편성의 권한을 갖느냐 여부는 정부조직법의 제정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였는데, 결국 경제통제와 종합계획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반영하여 기획처의 권한으로 낙착되었다. 기획처는 예산국, 경제계획국, 물동계획국, 물가계획국의 5개 국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새로 창설되었다기보다 미군정의 중앙경제위원회, 중앙가격행정처, 중앙식량행정처 등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1948년 10월 양곡매입법을 제정하여 총독부와 미군정에 이어 양곡의 강제수매 정책을 이어갔다. 정부는 조선생활품영단에 위탁하여 농가의 식량과 종자를 제외한 여분의 양곡을 지정가격으로 강제 매입하였다. 강제로 수매한 양곡을 기초로 정부는 도시에서 가구의 인구수를 기준으로 한 균등배급제를 시행하였다. 1949년 균등배급제는 세궁민과 공무원·군인에 한정해서 배급하는 중점배급제로 개선되었다.
 

기획처는 경제 부흥과 개발을 위해 주요 물자의 생산, 유통, 분배를 통제하고자 했다. 1949년 4월 기획처가 수립한 산업부흥5개년계획과 5개년물동계획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였다. 산업부흥5개년계획은 발전, 철강, 석탄, 조선, 시멘트 등 14개 주요 광공업 및 에너지 부분을 대상으로 향후 5년간의 연차별 증산 목표치를 제시하였다.

5개년물동계획은 농산물·수산물을 포함하여 주요 광공업 생산물의 생산과 수출입에 관한 계획으로서 5년 뒤 당해 물자의 국내 수급을 안정시켜 경제의 전반적 자급자족의 달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한미경제원조협정

1948년 4월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하자 경제협력법(ECA)을 제정하여 서유럽에 대규모 원조를 제공하기 시작하였다(마샬플랜). 미국은 한국에도 ECA원조 1억 1,650만 달러를 제공하였다. 이의 실행을 위한 협정의 체결을 위해 동년 10월부터 양국의 협상이 개시되었다. 동년 12월에 체결된 한미경제원조협정의 주요 내용은 미국정부의 의지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1948년 정부재정의 세입 573억 원에서 조세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10%가 채 되지 않았다. 나머지 대부분은 미국의 원조나 중앙은행 차입으로 충당되어야 했다. 그러한 처지의 한국정부가 미국정부를 상대로 그의 독립의지를 관철할 수는 없었다.
 

그 협상에서 미국은 그가 제공하는 원조달러만이 아니라 한국정부가 소유하는 달러의 사용도 미국 원조기관의 감독 하에 두는데 성공하였다. 한국정부의 경제계획과 무역을 종합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협상에 임한 한국정부와 여론의 자세를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미경제원조협정의 체결로 미국은 한국정부의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강력한 권한을 확보하였다. 동 협정으로 설치된 주한경제협조처의 대표는 외교특권을 부여받았다. 동 대표는 한국정부의 외환정책, 금융정책, 무역정책, 산업정책 등 모든 것에 대해 협의하고 동의할 권리를 가졌다. 원조물자의 판매대금은 한국은행이 개설한 특별계정이 입금되어 동 대표의 동의하에 사용되었다.
 

한미경제원조협정은 한국정부의 국가자본주의적 지향을 크게 제약하였다. 기획처의 경제계획국은 폐지되었다. 기획처의 처장은 초대 처장이 사임한 후 더 이상 임명되지 않았으며, 재무부장관이 겸임하였다. 기획처가 마련한 부흥계획과 물동계획은 슬그머니 중단되었다. 1950년 1월 양국 정부는 한미경제안정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동 위원회는 기획처를 대신하여 국무회의에 경제정책을 건의할 권한을 가졌다.

1950년 3월 한미경제안정위원회는 경제의 안정과 자유화를 추구하는 15개 원칙을 발표하였다. 그에 따라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한 정부기구의 축소, 세율의 인상, 공공요금의 인상, 공기업에 대한 보조금 삭감이 추진되었다. 무엇보다 국가자본주의체제의 물질적 근거라 할 수 있는 귀속재산의 불하가 강하게 추진되었다.

   
▲ 패널로 참석한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왼쪽)과 김용삼 경기콘텐츠진흥원 감사가 발표를 하고 있다.

귀속재산의 불하

1949년 12월 귀속재산처리법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이 법은 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인수한 귀속재산으로서 국영 또는 공영으로 정한 것 이외의 사업체, 부동산, 동산, 주식 등을 민간에 매각하도록 규정하였다. 정부는 막대한 규모의 귀속재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재정적자를 매울 필요에서도 그것의 민간 불하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술한대로 미국의 원조당국도 귀속재산의 조속한 불하를 촉구하였다.
 

귀속재산처리법은 귀속재산을 선량하고 능력이 있는 연고자와 종업원, 그리고 농지개혁에 의해 농지를 매수당한 지주에게 우선 매각하도록 규정하였다. 매각 대금은 최장 15년간 분할 납입할 수 있었다.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전시재정의 확보, 인플레이션의 억제, 군수품 생산의 증대와 같은 긴급한 요구에 밀려 귀속재산의 매각은 속도를 더하였다.

귀속재산의 매각은 1963년 5월에 종결되었다. 그 때까지의 매각 실적은 총 315,642건으로서 계약고는 약 60억 원에 달하였다. 공장 등 사업체의 불하는 총 2,600여 건이었다. 그 결과 대한석탄공사, 대한조선공사 등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귀속사업체가 민영화하였다.
 

귀속재산의 취득은 상당한 특혜를 의미하였다. 귀속사업체의 불하가격은 시가와 큰 차이가 있었다. 귀속사업체의 불하가격은 사정된 시가에 비해 평균 62%의 수준이었다. 불하대금은 지가증권으로도 납입될 수 있었다. 농지개혁으로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중소지주들은 지가증권을 액면가의 30~70%로 투매하였다. 귀속재산의 매수자들은 증권시장에서 액면가 이하로 지가증권을 구입하여 대금을 납입하였는데, 그에 따른 수익이 적지 않았다. 최장 15년까지 허용된 대금의 분할 납입도 커다란 특혜였다. 그 사이 물가가 수십 배나 올랐기 때문이다.
 

귀속재산의 불하는 구 지주에서 신흥 상공인으로 자산계층의 대대적인 교체를 이루었다. 한국의 자유시장경제체제는 국가자본주의의 물질적 기초였던 귀속재산의 불하와 그에 따른 상공인 계층의 성립으로 실질적인 출발을 보게 되었다. 그러한 전환에는 신생 한국이 정치, 군사, 경제의 모든 방면에서 미국체제(Pax Americana)의 일환으로 성립하고 발전하였다는 국제적 환경이 매우 중요한 힘으로 작용하였다.

제2차 헌법개정

1954년 11월 제2차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흔히들 사사오입개헌이라 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허용한 악명 높은 개헌으로 알려져 있지만, 경제에 관한 한 혁명적인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그로 인해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지닌 기업을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공공필요에 의하여 사영을 특허하거나 또는 그 특허를 취소함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 하에 둔다.”는 건국헌법의 제87조는 “대외무역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통제 하에 둔다.”로 개정되었다.

다시 말해 중요 산업의 국영 또는 공영의 원칙이 과감하게 철폐된 것이다.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긴절한 필요에 의하여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또는 그 경영을 통제 관리함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는 건국헌법 제88조는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긴절한 필요로 인하여 법률로써 특히 규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그 경영을 통제 또는 관리할 수 없다”로 바뀌었다. 이로써 사기업주의가 확립되었다. 이로써 건국헌법이 지향한 국가자본주의체제는 해체되었다.
 

헌법 개정이 이루어진 배경은 복합적이었다. 미국의 법률전문가들은 건국헌법이 제정된 당초부터 거기에 깃든 사회주의적 지향에 우려를 표명하였다. ECA원조의 제공을 통해 한국경제를 본격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한 미국정부는 건국헌법의 사회주의적 지향은 이념적이라기보다 한국의 전통적 경제와 문화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매우 합당한 판단을 내렸다.

그렇지만 더 이상 방치될 것도 아니었다. 미국의 원조당국은 한국의 공기업 우선주의가 원조의 효율적 도입과 집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미국의 기업가들은 헌법 85~87조가 개정되지 않는 한 어떤 미국인도 한국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자주 표명하였다. 그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며 공기업과 전략적 산업의 개인 소유를 촉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헌법 개정을 약속하였다.
 

재정 사정과 미국의 종용으로 착수된 귀속재산의 불하는 중요 산업을 국영으로 규정한 헌법에 의해 그 범위가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1953년 말 정부는 은행의 민영화 방침을 결정하였으며, 1954년 10월까지 그것을 완료하였다.

헌법을 초월하여 강행된 귀속재산의 불하는 경제성장에 강력한 의지를 가진 한국의 경제 관료와 미원조당국의 합작품으로 보인다. 그것을 추인하기 위해서라도 헌법을 조속히 개정되어야 했다. 6·25전쟁의 결과 한국의 정치경제적 이념이 자유민주주의로 순화한 것도 제2차 헌법 개정을 촉구한 유리한 환경이었다.

맺음말

1948년 8월 15일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에 기초한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이 탄생하였다. 건국헌법의 제정은 한국 문명사에 있어서 대전환이었다. 그렇지만 당시의 세계정세와 한국 현실의 구체적 제약 하에서 건국 당초의 경제체제는 민족사회주의 내지 국가자본주의의 지향으로 출발하였다.

중요 산업을 국유로 하고, 필요에 따라 사기업을 국·공유 기업을 전환하거나 그 경영을 통제 관리할 수 있다는 헌법상의 조항이 그것을 대표하였다. 건국 초기 기획처의 설치와 부흥계획의 수립은 이 같은 지향을 반영하였다.

그렇지만 1949년부터 개시된 미국의 원조경제체제는 한국경제의 자유화를 촉구하였다. 재정적 필요에서 불가피하게 추진된 귀속재산의 불하는 신흥 상공인 계층을 성립시켰다. 1954년의 제2차 헌법 개정은 중요 산업을 국·공유로 한다는 건국헌법의 국가자본주의 지향을 부정하였다. 요컨대 사기업을 주체로 하는 오늘날의 자유시장경제체제는 건국 이후 6년의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야 확립될 수 있었다.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