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차 이야기(상)-빈부격차 분배보다 중요한 건 소득수준 향상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 자유주의연구회에서는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의 ‘격차(隔差)’를 주제로 한 토론회를 가졌다. 신중섭 교수는 '토끼와 거북'의 우화 등 11가지 이야기로 '격차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신 교수는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기 위해 동일한 출반선에서 모든 사람이 출발하도록 해야 한다는 비유 자체가 잘못된 것으로, 인생의 목적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며, “기회는 원천적으로 균등할 수 없으며 기회의 균등에 ‘법 앞의 평등’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실제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미디어펜은 신중섭교수의 발표문을 상중하로 나눠 3회에 걸처 연재한다.

격차 이야기<상>

   
▲ 신중섭 강원대 교수
이야기 1 : 수의 선동력

우리는 어떤 차이를 수로 표시한다. 어떤 것을 수를 표시했을 때 그것의 거리가 멀 때 격차라 한다. 하루 가운데 가장 낮은 기온과 가장 높은 기온의 차이를 일교차라 하듯이, 수로 표시할 수 모든 사물에 격차는 존재한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표시하는 IQ, 정서적 능력을 표시하는 EQ도 개인 간에 차이가 난다. 개인 사이에 IQ와 EQ의 격차가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정신의 속성을 ‘사유’라 하고, 물질의 속성을 ‘연장성’이라 했을 때 ‘연장성’은 사물의 속성 가운데 수로 표현할 수 있는 속성을 말한다. 수와 사물의 속성을 연결하여 계량화하기 시작한 것이 근대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자연과학은 자연의 특성을 수로 표현한 것이다. 자연 법칙은 문자와 숫자로 표시되며, 궁극적으로 수로 환원된다.

수는 객관적이다. 수는 비교할 수 있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눈다. 세상의 중요한 많은 것은 모두 수로 표시된다. 인생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에서도 결혼 상대자의 특성은 대체로 수로 표시된다. 키가 얼마냐, 몸무게가 얼마냐,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느냐, 직장이 무엇이냐 등은 모두 수로 표시된다.

사람들은 낮은 수보다 높은 수를 선호한다. 교육의 정도나 직장도 사실은 교육 연한과 연봉을 통해 수로 표시된다. 우리는 매일 수 속에 살고 있다. 수로 지하철 요금을 내고, 수로 표시된 지하철을 탄다. 심지어 모든 사람이 수로 표시된 자신의 고유한 번호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건강도 수로 표시된다.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혈압, 당뇨, 콜레스테롤도 모두 수로 표시된다.

문명의 발전은 결국 수로 표시할 수 있는 영역의 확장과 수를 늘려가는 것이다. 한 나라의 힘은 GDP로, 1인당 소득은 1인당 GDP로, 자유도 부패도, 건강도 모두 수로 표시한다. 국가의 모든 것을 수로 표시함으로써 국가 사이의 비교가 가능해졌다. OECD, 세계은행과 여러 재단들은 각국의 여러 특성을 수로 표시한다. 빅 데이터의 출현으로 수로 표시할 수 있는 영역은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수로 표시된 사물의 특성의 차이가 많이 벌어지면 그것이 격차이다. 우리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모든 요소들이 이제 수로 표시된다. 차이가 수로 표시될 때 사람들은 흥분한다. 더욱이 자신의 한 모습이 수로 표시되고, 그 차이가 자신의 특성을 표시한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여러 명분을 걸고 반대한다. 대학교수들이 성과급을 반대하는 이유도 바로 자신의 능력이 수로 표시되어 만천하에 공개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정치ㆍ경제적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는 사회적 격차도 바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처지가 수로 표현되고, 정책을 통해 그 수를 더하거나 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수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것이 이제 모두 수로 표시되어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소득과 부이고, 소득과 부의 격차이다.

격차(隔差)’는 ‘빈부ㆍ임금ㆍ기술 수준 따위의 동떨어진 차이’를 의미하며, ‘동떨어지다’는 ‘거리나 관계가 멀리 떨어지다’는 의미이다. ‘소득 격차’, ‘생활수준의 격차’, ‘격차가 벌어지다’, ‘격차를 줄이다’, ‘빈부격차가 심화되다’ 등의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말에는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다.

격차에는 바로 ‘해소’라는 말이 따라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는 ‘격차’는 해소되어야 한다는 가치 판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격차’라고 해서 반드시 해소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가치 판단에 대해 여러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격차는 양면적 특성을 지닌다. 격차는 시간과 공간 영역에서 달리 나타난다. 격차는 시간적ㆍ공간적으로 다른 양상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격차를 살필 때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크게 고려하지 않고, 동시대 동일 공간의 격차만을 비교한다.

때때로 다른 공간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이런 비교의 목적은 자신이 속한 공간의 격차를 드러내어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가 격차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면 격차를 살필 때 시간과 공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야기 2 : 토끼와 거북

토끼와 거북의 우화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주려는 교훈은 분명해 보인다. 경주에서 토끼처럼 교만하지 말고 거북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우화는 그냥 우화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우화에 대한 해석은 여럿이다. 격차와 관련하여 이 이야기를 재해석하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우화와 달리 토끼가 잠을 자지 않는다면 토끼와 거북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벌어진다.

   
▲ 토끼와 거북이
이 간격을 줄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거북을 빨리 달리게 하거나 토끼를 느리게 달리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토끼와 거북의 달리기 경쟁에 여러 가지 규제를 가하거나 토끼에게 불리한 조건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토끼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거북에게는 강장제를 먹이는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규제는 토끼의 달리기 능력을 거북에 맞추도록 하는 것이다. 토끼가 빨리 달리지 못하게 하려면 토끼 몸에 무거운 돌을 달아주는 것이다. 무거운 돌을 달아서 그것을 끌고 가게 하면 토끼의 달리기 속도는 시간이 갈수록 느려질 것이다.

여러 가지 계산을 통해 잘 조절하면 토끼와 거북이 거의 동시에 결승점에 도달하게 할 수 있다. 커트 보네거트는 단편 소설 『해리슨 버거론』에서 사이언스 픽션의 기법을 통해 평등사회의 실현이 초래할 수 있는 악몽을 그렸다.

서기 2081년, 만인은 마침내 평등해졌다. 하나님이나 법 앞에서만 평등해진 것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면에서 완벽한 평등을 누리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한 사람도 없어졌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생긴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다른 이들보다 더 힘이 세거나 더 민첩하지 않았다.

이처럼 인류 역사상 유래 없는 평등 세상은 미합중국 수정헌법 제 211조, 제 212조 및 제 213조에 의거하여 실현된 것으로서, 오로지 ‘미합중국 평등 유지 관리국’ 요원들의 끊임없는 감시 활동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중략)

조지의 경우 지능은 평균보다 상당히 높았지만, 귀에 평등 관리국에서 달아 놓은 정신 장애용 수신기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쓸 데 없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법에 의해서 그는 그것을 항상 끼고 있어야 했다. 그 수신기는 정부에서 일괄적으로 발신하는 장애 전파의 주파수에 맞추어져 있어서, 조지처럼 필요 없이 두뇌가 좋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부당한 이득을 보지 않도록 매 20초 간격마다 갖가지 날카로운 잡음을 송신했다.

해리슨은 잘생긴 얼굴을 가리기 위해 “빨간 고무공을 코에 걸고, 눈썹은 밀고, 하얀 이는 검은 덮개를 씌우고 군데군데 뻐드렁니도 박았다.” 그리고 육체적 힘을 줄이기 위해 150 Kg이 넘는 고철을 짊어지고 다녀야 했다.

물론 롤즈와 같은 평등주의자가 이런 식으로 평등을 실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재능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면서 재능과 소질의 불공정한 분배를 바로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가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과의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은 한발 뒤로 물러나 출발의 평등을 주장하지만 이것도 가능하지 않다. 『해리슨 버거론』처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모든 사람이 동일한 출발선에 설 수 있겠는가.

이런 난점에 봉착하여 평등주의자들은 격차를 줄이는 또 다른 방법으로 달리기 결과에 대한 보상을 조절할 수도 있다. 느린 거북의 성실성을 보상하려면 얼마나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였는가를 기준으로 등수를 매겨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경기에 임했는가로 결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기준이 미리 공지된다면 토끼도 이 기준에 맞출 것이기 때문에 거북과 토끼가 동일한 보상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1등과 2등의 보상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상금을 주는 경우 1등에게는 100만원을 2등에게는 99만원을 준다면 토끼와 거북이의 소득 격차는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격차가 적을수록 토끼와 거북이가 서로 열심히 달려야 할 유인이 줄어들게 된다. 이런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미 공산주의 사회에서 밝혀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생을 경주에 비유하면서, 기회 균등을 보장하기 위해 동일한 출발선에서 모든 사람이 출발하도록 해야 한다는 비유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생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목적을 향해 달리는 경주가 아니다.

인생의 목적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으며, 출발점도 제 각각이다. ‘기회 균등’이라는 말 자체가 오류이다. 기회는 원천적으로 균등할 수 없다. 기회 균등에 ‘법 앞의 평등’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

이야기 3 : 상대적인 것만 보여주는 격차

격차에 대한 논의는 주로 상대적 비율만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실질적인 생활의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 격차를 측정하는 지표 예를 들면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표로 사용되는 지니계수나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을 보여주기 위한 상위 1%, 또는 10%가 전체 소득과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율, 하위 10%가 차지하는 비율은 상대적인 비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지수와 비율은 시계열(時系列) 속에서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얼마나 향상되었는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지니계수는 소득분배의 불평등 정도를 숫자로 표시한다. 지표는 0과 1사이의 수치로 표현된다. 0일 때가 완전평등이고 1일 때는 완전 불평등을 표시한다.

예를 들면 1980년도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의 경우 임금분배와 소득분배의 분배 불평등도는 높다. 반면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임금분배의 불평등도는 대단히 낮고, 동독의 소득분배 불평등도도 낮다. 헝가리의 경우 분배 불평등도는 대단히 낮고, 소득분배 불평등도도 낮다.

대체로 사회주의 국가의 경우 자본주의 국가와 비교하여 임금분배 불평등도와 소득분배 불평등도가 매우 낮다. 이를 근거로 사회주의 국가 국민들의 삶의 질이 더 높다고 할 수는 없다. 불평등의 정도가 낮다고 좋은 것만도 아니고 높다고 나쁜 것만도 아니다.

이와 반대되는 예도 있다. 일본의 전전ㆍ전후의 소득분배 불평등의 변화를 보여주는 지니계수는 1890년에 0.311, 1900년에는 0.417, 1910년에는 0.420, 1940년에는 0.641이었고, 1956년에는 0.313, 1962년에는 0.376, 1974년에는 0.344, 1980년에는 0.334였다.

이 수치들은 단지 비율만을 보여주는 것이지 생활수준의 향상 정도는 보여주지 않는다. 다음 표에 나타난 중산층과 빈곤층이라는 개념도 동일하다. ‘중위 소득’이 얼마인지는 보지 않고 상대적 비율만 나타내는 표는 항상 상대적 비교에 기초하고 있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피케티는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들어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우려를 표시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이 표를 근거로 우리는 비율이 낮아진 1950년부터 1980년 사이에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운 삶을 살고, 그 이후나 이전에 더 나쁜 삶을 살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 표는 단지 가난한 사람과 부자 사이에 소득이 분배되는 비율만 보여줄 뿐 가난한 사람의 소득이 얼마나 향상되었는가는 보여주지 않는다. 다음 표는 그렇지 않다.

   
 

이 표는 그동안 사람들의 실제 임금이 얼마나 상승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피케티 도표와는 구분된다. 그러나 향상된 정도가 %로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것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과거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소득이 어느 정도 향상되었는가는 보여주지만 실제 소득이 얼마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빈부의 격차’에 대한 수치보다는 실제로 사람들이 누리는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 향상되었고, 향상된 소득이 얼마인가이다. 따라서 위의 표들은 사람들의 실제 소득이 얼마인가에 대한 정보는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중요한 것은 실제 소득이 얼마이고, 과거와 비교하여 얼마나 증가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야기 4 : 한국의 어제와 오늘

240여 년 전에 아담 스미스는 “오늘날의 근면하고 절약하는 농부들이 옛날 유럽의 왕족보다 더 많은 편의를 누린다. 농부들이 누리는 편의는 벌거벗은 야만인 수만 명의 목숨과 자유를 좌지우지하는 아프리카의 절대적인 왕보다 낫다.”고 했다. 다음 표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오늘날 한국인들의 경제적 풍요로움은 50년 전과 비교하여 엄청나게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한국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과정이 짧은 기간에 압축적으로 일어났을 뿐이다. 자본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은 대체로 이러한 과정을 밟는다. 다니엘스와 슈미트는 독일 자본주의의 역사를 6단계로 나누어 각 시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위에서 열거한 변화는 자본주의가 순조롭게 정착한 사회가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본주의는 대체적으로 국민의 복리와 생활 수준을 향상시켜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격차를 표시하는 지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빈곤율과 같은 표현도 상대적 빈곤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격차가 아니라 삶의 복리의 개선이다. <계속>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서양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