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없이 경제발전 없다" 시장경제의 핵심...제3의 신개념 학설

   
▲ 조우석 문화평론가
세계의 이목이 보수·진보 경제학자 두 거물의 논쟁에 쏠렸다. 불평등과 빈부 격차 문제를 놓고 이뤄진 맞짱 토론에서 보수 쪽 경제학자는 부(富)의 집중이란 경제 기여의 대가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선 당연하다고 옹호했다. 반대 편 논객은 최상위층 부자들은 돈으로 권력 사들어 정치·사회적 불균형까지 불러왔다고 반격했다.

그게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와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 교수 사이의 논쟁인데, 묘한 건 남 얘기하는 듯한 국내 언론의 보도 태도다. 세계에서 가장 섬뜩한 반(反)부자 정서, 끝을 달리는 반기업 정서로 부글대는 나라에서 이게 정상일까? 경제민주화라는 피케티 류의 이념에 정신이 팔려 경제성장과 담을 쌓고 있는 한국사회가 이러면 안 된다.

학계? 거긴 더한다. 대학-출판계 등 지식사회는 바다 건너 수입 학문에 각주(脚註)나 다는 훈고학(訓詁學)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던가? 그래서 자유주의 경제학자 몇 명이 맨큐의 편을 들고, 대세를 따르는 기회주의 학자 대다수가 피케티를 옹호하는 걸로 끝난다. 맨큐-피케티 논쟁을 넘어선 제3의 목소리, 제3의 경제학은 없는가?

   
▲ 좌승희 박사는 "현재대로 한다면 앞으로 10년 내에 성장잠재력은 0%대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평등주의와 경제민주화에 매달릴 경우 대한민국 경제는 수년 내 성장을 멈추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직격탄을 날린다.
멘큐-피케티 논쟁 넘어선 제3의 목소리에 왜 주목하지 않나

경제학 문외한인 필자가 알기에 우리시대 최대 화두인 불평등 문제에 관해 가장 명쾌한 목소리를 낸 분이 따로 있다. 모두가 껄끄러워하는 불평등 문제와 정면승부를 선택해 경제학의 일반이론으로까지 끌어올린 학자인데, 왜 그 분 얘기를 하지 않는가? 남의 학문에 코 박고 사는 학문 사대주의를 벗기 위해서라도 입을 열 의무를 필자는 새삼 느낀다.

경제학자 좌승희 박사(68·미디어펜 회장) 얘기다. 필자는 예전부터 그의 저술 거의 전체를 읽었다. <발전경제학의 새 패러다임>, <신 국부론>, <실증 정치경제학 입문 경제발전의 철학적 원리>, <이야기 한국경제>를 접한데 이어 그와 대화할 기회도 가졌는데, 좌승희 경제학은 피케티-맨큐가 벌였던 불평등 문제에 대한 정면돌파에서 우선 빛난다.

익히 알 듯 맨큐는 빈부격차 확대는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정이 이러한데, 부의 불균형이 왜 문제되어야 하느냐는 식의 항변이다. 초라하다. 좌승희 경제학은 여기에서 몇 걸음 더 나간다. 그의 명제에 따르면, 불평등 없이 경제발전은 없다. 가히 파천황(破天荒)의 선언이고, 모두가 쉬쉬하는 금기를 뛰어넘는 학문적 발언이다.

경제적 차등 인정하지 않고서 경제의 역동성 나올 수 없다

불평등이야말로 인간과 사회에 동기부여를 하는 필요조건임을 그는 직시한 것이다. 경제적 차등, 차별화를 인정하지 않고서 경제발전 자체가 불가능하며, 경제의 역동성이란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소망하는 기업가 정신도 나올 수 없다. 세상이 차이를 인정해주지 않는데 누가 나서서 애써 부의 창출을 위해 노력하려 할까?

시장이란 것도 아주 심플하게 이해된다. 시장이란 경제적 차등을 만들어냄으로써 동기를 부여하는 효율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장(場)에 다름 아니다. 맨큐가 불평등을 애써 옹호하려한 것에 비해 좌승희 경제학은 불평등-차별화-차이를 경제발전과 경제행위의 핵심 매커니즘이자, 경제학의 일반이론의 차원으로 끌어 올린다. 이런 접근은 자유주의 경제학과도 좀 다르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가 효율적일지 몰라도 정의롭지 못하다"는 당신의 고정관념이 잘못이라며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을 동원해 어렵게 항변한다. 세상은 불평등으로 부글거리는 판에 자유주의자들은 자유가 좋은 것이라는 말만 반복한다. 그래서 간혹 공허하다. 시장과 정부를 함께 보는 균형감각이 있는 좌승희 경제학은 그보다 본질적이면서 쉽고 명쾌하다.

결정적으로 마르크스 경제학과의 정면승부가 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마르크스의 심정적 제자다. 자본주의는 경제 불평등을 초래하는 모순된 체제이며, 그걸 부수기 위해 평등주의 깃발을 올리자는 주장에 암묵적으로 동조한다. 피케티도 그 아류의 한 명이다. 이런 평등주의 아성을 좌승희 경제학은 부수고 들어간다.

동기부여를 하지 않는 사회 즉 경제적 차등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하향평준화의 늪에 빠진다는 걸 여지없이 증명해준다. 그게 정치적 도그마로 추구할 경우 암흑의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어낸다. 공산주의 실험의 비극적 대실패를 뻔히 아는 지금도 평등과 공정함이란 대중을 유혹하는 말로 남아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경제민주화의 망령(亡靈)으로 떠도는 중이다.

   
▲ 자본주의는 경제 불평등을 초래하는 모순된 체제이며, 그걸 부수기 위해 평등주의 깃발을 올려야 한다는 피케티의 주장은 경제민주화라는 정서와 맞물려 한국경제를 저성장의 늪으로 빠뜨리고 있다. /뉴시스 
한국경제가 지금 3% 저성장에 목매는 이유는?

명쾌한 좌승희 경제학은 공허한 담론이 아니다. 당장 우리에게 주는 함의(含意)가 크다.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라. <발전경제학의 새 패러다임>에 나오는 대목인데, 한국경제의 오늘에 주는 암시가 풍부하다. "이래도 경제민주화 타령을 할 것인가"를 국내외 정치인들에게 냉정하게 묻는다.

"오늘날 세계경제와 한국경제가 부딪치고 있는 경제문제의 핵심은 국민들에게 일할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장은 '열심히 하지 않고는 경제적 부를 쌓을 길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는데도, 정치계와 정부는 '시장이 잘못됐습니다. 우리가 시장이 만들어낸 불평등을 고쳐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라고 거짓 약속을 한다. 그렇게 할 경우 동기부여가 안 돼 열심히 일하지 않게 된다. 경제성장이 가능할 수는 없고 재정이 건전해질 수 없다. 그런데도 복지지출은 늘리니 금융불안을 피할 수 없다. 이게 바로 지난 반세기 세계경제가 걸어온 '모두가 번영하는 행복의 길'이 끝나가는 종착역이다."

좌승희 경제학은 주류경제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작업이고, 대중적 인기가 없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지평도 넓히는 작업이다. 무엇보다 바닥을 기는 한국경제 회생을 위한 처방이다. 그는 1960~80년대 개발연대에 8% 고성장을 거듭하던 한국경제가 지금 3% 저성장에 목매는 것도 불평등을 허용하지 않는 구조, 모두가 평등주의와 경제민주화로 돌아섰기 때문이라고 본다.

다음에 기회가 나는대로 좌승희 경제학의 진면목을 더 들려드릴 생각이다. "현재대로 한다면 앞으로 10년 내에 성장잠재력은 0%대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평등주의와 경제민주화에 매달릴 경우 대한민국 경제는 수년 내 성장을 멈추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직격탄을 날리는 그의 목소리를 추가로 들려드리고 싶다. /조우석 미디어펜 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