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최상진 기자] 18일 세종대로 사거리는 세월호 침몰사건을 추모하는 사람들과 경찰로 가득 메워졌다. 시청 방향에서는 유가족의 눈물을 보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광화문 방향에서는 폭력시위를 보고 정권퇴진 구호를 들었다. 각기 다른 방향의 절규가 요동치던 이날 밤 광화문은 나생문(羅生門, 일본어로 라쇼몽)과 다르지 않았다.

같은 사건을 두고 관점의 차이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론을 ‘라쇼몽 효과’라고 한다. 1950년 개봉한 일본영화 ‘라쇼몽’의 메시지를 이론화했다. 헤이안 시대 한 무사의 죽음을 산적, 무사의 부인, 무사의 혼, 목격자 나무꾼이 각각 다른 시각으로 증언하는 내용의 ‘라쇼몽’은 오늘날까지도 간결하고 뚜렷한 메시지를 각인시키고 있다.

   
▲ 연극 '나생문' 공연장면 / 사진=극단 수

‘라쇼몽’을 각색한 연극 ‘나생문’은 폐허가 된 문(나생문) 처마에서 나무꾼과 스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부터 출발한다. 비를 피하기 위해 들린 한 남자가 사건에 대해 묻자 이들은 기묘한 사건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인적이 드문 숲속에서 무사와 그의 아내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한 눈에 반한 산적 타조마루는 속임수를 써 무사를 포박한 뒤 그녀를 겁탈한다. 이후 나무꾼이 무사의 시신을 발견하고 관청에 신고한다. 타조마루는 체포되고, 숨어있던 무사의 아내도 불려와 심문을 받는다.

어차피 죽음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판단한 타조마루는 무사의 죽음이 정당한 결투 끝에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 증언한다. 그러나 마사코는 겁탈당한 후 남편의 싸늘한 태도에 정신이 나가 혼란속에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 말한다. 무당의 힘을 빌어 혼으로 나타난 무사는 자신의 죽음은 자결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재판에서 누구의 증언이 받아들여졌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목격한 나무꾼은 무사의 아내가 두 남자를 부추겨 오합지졸 같은 싸움이 붙었고, 무사의 죽음도 황당하게 벌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조차도 믿기 어렵다. 무사의 몸에 꽂힌 보검을 훔쳐낸 것이 바로 나무꾼이기 때문이다.

   
▲ 연극 '나생문' 공연장면 / 사진=극단 수

이야기는 사건의 결말을 내지 못한다. 스님과 나무꾼, 남자가 흩어지려는 무렵 한 갓난아이가 나생문 뒤편에서 발견된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며 남자는 아이를 감싼 옷가지를 빼앗아 달아난다. 스님은 자신의 옷을 한꺼풀 벗어 아이를 감싸고, 나무꾼은 “아이가 여섯인데 일곱이라고 달라지겠냐”며 아이를 안고 사라진다.

무려 60년이 흘렀음에도 작품의 메시지는 생생하다, 특히 ‘나생문’의 이번 공연은 각자의 진술이 반복될 때마다 캐릭터를 변형시켜 작품의 메시지를 한결 쉽게 전달한다. 영화상에서는 소극적으로 다뤄진 무사 부인의 캐릭터를 다변화시켜 극을 주도하는 실험도 인상적이다.

한 가지 사건이 네 번이나 되풀이되는 동안 관객들은 ‘개인의 시각에 따른 진실의 왜곡’을 눈앞에서 목격한다. 경악스러울 수도, 안타까울 수도 있다. 공연이 끝날 무렵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인다. 살면서 마주치는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나생문’과 다를 바 없다.

22일 오전 정부가 세월호를 인양하겠다고 발표했다. 인터넷은 찬반논란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의견은 한명의 희생자라도 더 차디찬 바다에서 꺼내려는 정부의 의지로, 1500억원의 혈세 낭비로 극명하게 엇갈렸다. 무엇이 맞는걸까, 우리는 여전히 ‘나생문’ 앞에서 종종걸음 치고 있다.

극장을 나서는 길, 한때 학생들의 등굣길에 그림 같은 배경을 만들었던 벚꽃 잎들이 관객들의 머리 위로 사뿐사뿐 내렸다. 밝은 표정으로 사진찍는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가 “어휴, 이걸 언제 다 치우냐”고 읊조리며 지나갔다.

   
▲ 연극 '나생문' 공연장면 / 사진=극단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