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최상진 기자] 평상시엔 너그럽고, 연습에선 날카로우며, 무대에 서면 자유롭다. 배우 이항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최근 그녀가 출연하는 작품은 주로 ‘삶의 희망’에 대한 메시지를 던졌다. 연극 ‘가을 반딧불이’와 ‘래빗홀’, 나아가 영화 ‘변호인’에서까지 이항나는 주변에 둘러보면 꼭 있을 것 같은 인물을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대학로 내에서 리얼리즘 연극에 그녀만큼 알맞은 배우를 찾기 힘들었다.

   
▲ 연극 '나생문' 공연장면 / 사진=극단 수

이항나가 영화 ‘라쇼몽’을 각색한 연극 ‘나생문’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약간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반가웠다. 다분히 연극스러운 작품이 신선하게 변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아니나다를까, 4년 만에 무대에 오르는 ‘나생문’은 기존의 콘셉트와 달리 인물 성격에 변화를 줘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생문’은 일본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사의 죽음을 두고 산적, 무사의 부인, 무사의 혼, 목격자인 나무꾼이 각각 다른 시각으로 증언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다. 산적과 무사의 부인은 “내가 죽였다”고 주장하고, 무사의 혼은 자살이라고 주장한다. 목격자 나무꾼은 황당한 소동이라며 종지부를 찍는 듯 하지만, 이조차 믿을 수 없다.

작품은 ‘사람은 자신의 입맛에 따라 기억을 왜곡시킨다’는 메시지를 기반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한 가지 사건은 4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각각 캐릭터의 성격을 바꿔 이야기를 보다 가볍게 전달한다. 특히 무사의 부인, 산적의 캐릭터 변화가 두드러진다.

Q. 초연도, 리얼리즘 연극도 아닌데 출연을 결정했다. 최근 행보와 상반된다.

구태환 연출과 처음 만났을 때 ‘최근의 우리 사회를 돌아보니 다시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에 공감했어요. 세상에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는건 아니지만, 이제 연극으로 보여줘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세대가 됐다고 판단했죠. 연극하는 사람으로서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작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연극 '나생문' 공연장면 / 사진=극단 수

Q. 극장이 모교(동국대 이해랑극장)라는 점도 애틋하겠다.

제가 학교 다닐때는 이런 좋은 극장은 없었는데.(웃음) 후문쪽에 소극장이 있었죠. 러시아에 유학을 다녀오니 극장이 지금 자리로 옮겨졌어요. 이해랑극장에서 공연하는건 처음이죠. 그러지 않아도 커피한잔 하러 예대 쪽으로 가면 후배들이 인사하기도 해요. ‘날 아나?’ 싶을때가 있죠.

Q. ‘라쇼몽’의 순종적인 여성 캐릭터를 뒤집었다. 각 장(場)마다 성격이 다르다.

캐릭터를 설정할 때 일단 내 자신이 흥미로워야 해요. 이 작품은 부인의 감정이 진취적이지 못한 만큼 이전 성격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재미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구태환 연출에게 ‘운신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다양한 성향을 가진 인물로 변형해보고 싶다’고 제안했고, 잘 받아준 덕분에 지금의 라인을 완성하게 된거죠.

이번 공연은 각 장마다 무사 부인의 느낌이 달라요. 1장(산적)은 기품있고 정의로운, 2장(무사 부인)은 사랑에 목맨, 3장(무사의 혼)은 사악한 팜므파탈, 4장(나무꾼)은 코미디라고 생각했죠. 조금 위험한 부분은 ‘한 가지 이야기에 대한 4가지 기억’인데 캐릭터에 진폭이 생기면 관객들이 볼 때 이야기보다 캐릭터에 동화될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상황에 기인하는 작품인 만큼 이야기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극적이고 흥미로워야 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Q. 장(場)마다 변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메시지를 보다 간결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맞아요. 캐릭터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현실화되자 ‘산적’ 역의 김태훈 배우도 “틀에서 벗어나겠다”고 말했었죠. 대나무숲, 타악, 나무들, 무당신 등 연출이 확고하게 밀고 있는 이미지, 관객들에 검증받은 작품성을 유지하면서 가장 신선하게 보일 수 있는 부분을 찾았죠.

만약 나중에 연출을 맡게 된다면 메시지가 희석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장르를 틀어버려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장은 사극, 2장은 멜로드라마, 3장은 셰익스피어, 4장은 코미디로요.

   
▲ 연극 '나생문' 공연장면 / 사진=극단 수

Q. 무사 부인은 왜 굳이 ‘내가 남편을 죽였다’고 주장할까.

평생을 사랑한 남자에 대한 배신감? 여자에게는 그게 제일 크죠. 내가 죽이지 않았어도 죽인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 여자는 심리적으로 이미 파탄에 이른거에요. ‘내가 남편을 구했어야 했는데’라며 자책하는 사랑 이야기로 2장을 풀어냈어요.

Q. ‘나생문(羅生門)’에 대한 초기 설정은?

실제로는 아주 옛날에는 도시로 들어오는 큰 진입로였는데 헤이안시대에 전쟁과 기근으로 사람들이 오가지 않다보니 결국 시체만 쌓이게 됐다고 하더군요. 후대에서 보면 상징적인 의미를 둘 수 있죠. 이를 두고 현재 우리 사회와 비교하면 너무 비관적일까요. 나생문은 우리 사회의 제일 어두운 곳, 외면하고 싶은 어딘가, 모른척하고 싶은 사회의 아프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Q. ‘라쇼몽’이 현재까지도 회자되면서 꾸준히 관심받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작품의 원조잖아요. 할리우드 영화 ‘저수지의 개들’도, 뮤지컬 ‘씨왓 아이워너씨’도 그렇고, ‘라쇼몽’을 기반으로 제작된 작품이 많아요. 특히 ‘라쇼몽’은 메시지가 간단하면서도 정확하죠. 그게 가장 큰 장점이에요. 이제는 비슷한 작품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단순함 안에도 세상을 꿰뚫어보는 시각이 정확하니까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회자되겠죠.

   
▲ 연극 '나생문' 공연장면 / 사진=극단 수

Q. 극성이 짙은 작품은 정말 오랜만이다. 만들어가는 과정도 남달랐을 텐데.

이 작품은 기승전결이 분명한 리얼리즘 라인으로 파고들수록 허점이 많아요. 장면별로 갖고있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덕분에 오랜만에 극성이 강한 공연예술이 갖고 있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어요.

학부에서도, 유학을 가서도 리얼리즘 위주로 공부했기에 어릴 때는 이런 작품에 매력을 못느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결과물이 달라지는 것에 대한 매력이 커지더군요. 영화 ‘변호인’만 해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러울까’ 고민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관객에게 극적인 에너지를 전달해야 해요.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기술, 발성, 감정, 액션 등을 끌어내며 즐기고 있어요.

지금까지 이항나 하면 ‘섬세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어요. 이번에는 마당에서 한번 벗어났다고 할까, 파워풀하내 내지르는 것에 대한 갈증을 많이 풀고 있어요. 공연 초반 해갈에 초첨을 맞췄다면, 이제는 강하면서도 내면의 섬세함을 어떻게 유지할까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나생문’은 제게 아주 재미있는 작품이에요.  

   
▲ 연극 '나생문' 공연장면 / 사진=극단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