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로 살펴 본 사익…사명감보다 생계수단서 한류의 뿌리로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12일 마포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예술인이 본 사익-사익이 예술을 발전시킨다'를 주제로 제2차 토론회를 개최했다.

‘공익’은 좋은 것이고 ‘사익’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하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장경제 체제에 전혀 맞지 않는 낭설이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사익추구이며, 사익을 바로 보고 개인의 사익 추구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공익적인 일이다. 예술인들은 사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한국 가요를 통해 사익을 이야기 한 이근미 작가는 “문화전파의 진원지였던 미군부대는 재능 있는 한국의 가수와 연주자들이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며 “당시 뮤지션들은 그 무대에 서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한국 가요사를 바꾸고 새로운 문화를 도입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아닌, 단순히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그들을 자극했다”고 밝혔다. 미군부대를 통해 대중음악의 전면에 등장한 가수는 패티김, 윤복희, 현미, 신중현 등이 있다. 아래 글은 이근미 소설가의 '한국 가요로 살펴 본 사익'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 이근미 소설가
혜성같이 등장한 김추자

"늦기 전에 늦기 전에 빨리 돌아와 주오 내 마음 모두 그대 생각 넘칠 때 내 마음 모두 그대에게 드리리 그대가 늦어지면 내 마음도 다시는 찾을 수 없어요"

1969년 김추자가 ‘늦기 전에’를 열창하며 등장했을 때 젊은이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감성을 충족시켜줄 노래가 나왔다며 열렬히 환영했다. 긴 머리에 섹시한 몸매, 착 달라붙는 청바지 차림에다 풍부한 성량과 허공을 찌르며 마구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한마디로 센세이션이었다. 이후 <커피 한 잔>, <거짓말이야>,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등 부르는 노래마다 인기를 끌었다. 김추자의 하늘을 찌르는 듯한 인기에 ‘담배는 청자, 춤은 추자’라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였다.

다소곳한 동작과 단아한 모습으로 노래하던 시절, 공중파 방송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춘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오늘날 아이돌 가수들이 제아무리 짧은 치마를 입고 섹시한 몸짓을 해도 당시 김추자가 준 충격과는 비교할 수 없다.

가요음반사상 최초로 수출한 음반이 다름 아닌 김추자의 음반이다. 1971년 김추자의 음반을 영국의 세계적인 회사에서 리매스터링하고 재킷 디자인까지 제작해 외국 원판과 동일한 규격의 녹음 수준을 뽐냈다. 육감적이고, 열정적이고, 도발적인 그녀는 열심히 노래 부르는 것으로 새로운 문화에 목말라하는 대중들을 즐겁게 하고 자신을 영원한 디바로 각인시켰다.

생존을 위해 기타를 붙잡은 신중현

이미자, 남진, 나훈아로 이어지는 트로트 왕국 속에서 김추자라는 색다르고 걸출한 인물을 만들어낸 사람은 작곡가 신중현이다.

신중현은 ‘조실부모’하고 ‘주경야독’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의 삶을 보면 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1938년생인 그는 세 살때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 다. 이발소를 운영해 돈을 많이 번 아버지 덕에 어려서 유성기로 음악을 듣고 영사기로 영화를 보는 문화적인 환경을 누렸다. 하지만 가산을 정리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던 중 아버지는 거의 모든 재산을 잃고 말았다.

서울에서 다시 이발소를 차린 아버지는 생활이 안정되자 유성기를 구입했고 신중현은 글자를 배우기 전부터 재즈를 들었다. 한국 전쟁을 피해 진천으로 피난을 갔지만 두 번에 걸쳐 모든 것을 잃은 아버지는 끝내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6개월 만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신중현은 동생들과 함께 친척집에 얹혀살게 된다. 더 이상 눈칫밥을 먹기가 괴로워진 신중현은 서울로 올라와 친척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제약회사에 들어갔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동양중학교 야간에 입학했다.

도무지 낙이라고 없던 신중현은 배달을 하면서 눈여겨본 악기점에서 미제 어쿠스틱 기타와 미국 기타교본을 구입했다. 당시 AFKN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고 기타로 연주해 보는 최대의 기쁨이었다. 신중현은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아껴 기타를 연습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배달 일로는 동생을 데려오지 못할 거라는 낙담에다 평생 배달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친척집을 나왔다. 일주일간 하루 한 끼 밖에 못 먹어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으니 학교를 다니는건 사치였다.

신중현은 종로의 기타학원을 기웃거리며 강사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신중현이 독학으로 익힌 기타 솜씨에 놀란 여러 학원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신중현의 솜씨를 눈여겨본 건물 주인이 동업을 제의했고, 함께 기타학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수입은 한 푼도 없었다. 주인이 이것저것 제하니 남는 게 없다고 해 숙식 해결과 마음껏 연습을 할 수 있다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6개월쯤 지났을 때 미8군에서 일하는 남자무용수가 기타를 배우러 왔고 신중현의 기타솜씨를 높이 산 그의 소개로 미8군 무대에 서게 되었다. 1955년의 일이다. 미성년자였던 그는 동두천 미7사단 내 클럽 책임자의 특별 배려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전기기타와 앰프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그에게 제약회사에서 사귄 친구가 선뜻 돈을 대주었다. 덩치가 작은 신중현이 큰 기타를 들고 신들린 듯 연주하자 미군들이 재키, 히키, 소코시라고 부르며 환호했다.

미8군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신중현은 동생을 데려올 수 있었다. 고달픈 생활에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열심히 기타를 쳤을 뿐인데 새로운 직장도 생기고 동생까지 책임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중현은 단지 기타 연주에 머물지 않고 작곡을 배워 노래를 만들었고, 이후 작곡가로서 펄시스터즈, 이정화, 김추자, 박인수, 바니걸즈, 장현, 김정미, 임아영에 이르는 이른바 ‘신중현 사단’을 거느리며 가요계의 거목이 되었다.

   
▲ 문화전파의 진원지였던 미군부대는 재능 있는 한국의 가수와 연주자들이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당시 뮤지션들은 사명감이 아닌, 단순히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그들을 자극했다. 미군부대를 통해 대중음악의 전면에 등장한 가수는 패티김, 윤복희, 현미, 신중현(사진) 등이 있다./사진=연합뉴스
미8군 무대의 엄격한 시스템

1960년대, <동백아가씨>, <흑산도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같은 이미자 노래와 남진 나훈아의 노래가 히트를 칠때 일본풍의 트로트는 촌스럽고 질 낮은 노래라는 통념을 갖고 있던 젊은층은 심드렁했다. 가요는 어른들만 즐기는 문화일 뿐 우리만의 문화가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1961년 ‘노란사쓰의 사나이’가 크게 히트하면서 미8군 무대 가수들이 대거 일반무대로 진입하자 젊은이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미8군 가수들의 활약은 기존 무대에 자극제가 된 동시에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이 가요의 주류로 부상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른바 단순히 노래 잘하는 목소리 좋은 가수들의 시대에서 개성시대로의 전환점이 마련된 것이다.

문화전파의 진원지는 미군부대였다. 미군의 휴식과 유흥을 위한 무대에 재능 있는 한국의 가수와 연주자들이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미8군 무대는 당시 뮤지션들이 생 계를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뮤지션들은 그 무대에 서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한국 가요사를 바꾸고 새로운 문화를 도입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아닌, 단순히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그들을 자극했다.

미8군쇼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미군부대에서 파견한 쇼관계자들의 직접 심사를 거쳐야 했다. 전체 쇼의 호응과 구성, 편곡에다 영어실력까지 심사의 대상이었다. 결과에 따라 AA, A, B, C 클래스로 등급이 매겨졌고 D는 탈락이었다. 매 분기마다 한 번씩 엄격하게 실시된 오디션 결과에 따라 지급액은 물론 무대도 달라졌다. 최고의 실력자들은 미8군 내에서도 가장 고급스러운 클럽에서 노래할 수 있었다.

오디션을 거치면서 점차 다양해지는 레퍼토리만큼이나 미8군 연예인들의 실력도 향상되었다. 최신곡들을 소화할수록 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에 늘 AFKN의 ‘아메리카 탑40’을 열심히 들었고, 미군부대 주크박스 등을 통해 악보를 채보하고 멜로디를 익혔다.
공개오디션 현장에서 펼쳐지는 쇼의 구성이나 음악성, 테크닉 하나하나는 비교대상이자 곧 연구대상이었다. 또한 거기서 눈에 띄면 힘있는 단장이나 마스터에게 캐스팅 되는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엄격한 오디션 시스템, 무한 경쟁 무대가 가수들을 성장시켰다.

미8군쇼 출신과 통기타 가수들

수많은 미8군쇼의 스타들이 대중음악의 전면에 등장하여 한국가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포클로버스, 패티김, 윤복희, 현미, 한명숙, 최희준, 유주용, 김상희, 이금희, 신중현 등이 미8군 무대에서 익힌 실력으로 한국 가요계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

미8군 출신 뮤지션들은 1960년대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자 스타로 발돋움했다. 1967년 개국해 1980년 KBS에 통폐합된 동양방송(TBC)이 개최한 제3회 방송가요대상 명단을 보면 미8군 출신 가수가 절반을 차지했다. 나머지는 기존의 트로트 가수였다. 한국 대중문화 형성기에 미8군 출신 가수들이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거기에 가세한 이들이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통기타 가수들이다.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이장희, 양희은, 김민기, 한대수, 서유석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비틀즈, 클리프 리차드, 밥 딜런, 존 바에즈, 주디 콜린즈, 펩분, 엘비스 프레슬리, 지미 로저스, 행크 윌리암스, 리키 넬슨, 쟈니 마티스, 딘 마틴의 노래를 듣고 좋은 곡을 번안해서 불렀다.

통기타 문화는 다운타운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종로와 명동의 음악감상실 쎄시봉, 오비스 캐빈, YMCA의 청개구리가 새로운 문화의 진원지였다. 이어서 MBC「별이 빛나는 밤에」TBC「밤을 잊은 그대에게」DBS「0시의 다이알」CBS「꿈과 음악 사이」등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팝송이 퍼져나갔다.
1965년에 개국한 TBC TV의「쇼쇼쇼」가 인기를 끌었는데 미 8군에서 활약하던 가수 들이 팝스타일의 노래를 선보여 큰 갈채를 받았다. 1969년에 MBC TV가 개국하자 음악감상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통기타 학사가수들이 등장했다.

새로운 문화를 갈구하던 시대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데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잘 살아보세’라는 기치아래 경제성장이 시작된 것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보릿고개가 좀 남아있긴 했지만 1960년대 말은 이미 중산층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때이다. 한마디로 ‘힘들었지만 나라 전체가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치던 시기’였다.

사회전반에 새롭게 일고 있던 문화현상과도 연관이 있다. 1967년에 바캉스, 1968년에 레저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등장했으며 1967년에 미니스커트, 1968년에 깔깔이 드레스가 유행했다. 같은 해에 대중잡지 <선데이서울>이 등장한다.

1958년 종암동 고려대학교 옆에 17평형 아파트가 등장한 이래 1972년에 반포에 아파트단지가 숲을 이루었는데 이미 1960년대 말에 아파트 프레미엄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수세식 화장실과 입식 주방설비로 대표되는 아파트 문화는 개인 프라이버시 보장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했다.

한국화한 노래를 만든 싱어송 라이터

미8군 출신 가수들과 통기타 가수들은 왜색풍 일색이던 가요계를 다양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미8군 출신 중에서 특히 신중현은 작곡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신중현이 작곡한 노래들은 지금까지 꾸준히 리메이크 되고 있으며 ‘님은 먼 곳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소울 뮤직과 록뮤직을 도입한 선구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니는 신중현은 서구음악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국적인 음악, 내 것으로 육화된 음악’을 하기 위해 애썼음을 강조했다.

통기타 가수들도 미국 음악을 그대로 번안해서 부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롭게 작곡을 해 싱어송 라이터의 효시가 되었다. 1960년대 일본, 한국, 대만, 그리고 필리핀 등 아시아 국가에 미군이 주둔했는데 동남아 국가가 팝송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식민지화된 것과 달리 한국 가수들은 새로운 곡을 작곡해 차별화했다.
미8군 출신 가수들과 통기타 가수들에게 한국 가요계를 바꾸겠다는 거대한 사명감 같은 건 결코 없었다. 미8군 가수들은 오디션을 통과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열심히 달렸고, 통기타 가수들은 팝송을 열심히 따라 부르며 즐겼을 뿐이다. 신중현씨는 기타를 치지 않았으면 그 시절을 견디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고, 통기타 가수들은 열심히 즐기고 나니 청년문화라는 이름이 생겼을 뿐이라고 했다.

한국 가요사가 면면히 흘러오고 있지만 다른 시대와 달리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미8군 출신 가수들과 통기타 가수들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나의 띠를 형성하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 한류 가요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그 저력에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변혁이 바탕이 되었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