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한국 영화시장을 들썩였던 '국제시장', 개봉한 직후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의 향수를 느꼈다. 성공과 철학 그리고 도전정신과 꿈 등 정 명예회장이 남긴 일화는 '신화'로 재생산됐기 때문이다.지난 2008년 당시 현대중공업 광고에서 500원 지폐 속 거북선에 착안해 기지를 발휘, 불가능할 것 같았던 차관을 도입해 조선소 건립에 성공 이후 백사장 사진을 선박수주에 성공했다는 일화는 '존경'의 키워드로 SNS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의 신화같은 일화는 인상 깊은 스토리텔링으로 많은 영향력을 끼쳤고 아산의 기지와 해학, 적극적인 도전정신은 긍정적인 평가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 대한민국의 청년들의 현실을 개탄하는 신조어인 '헬조선'이 등장했다. 10만명에 육박하는 청년 실업 속에 도전정신은 희석되고 열정페이에 청년들의 현재가 위축되고 있다. 고용 개혁 속 세대간의 갈등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이때, 정 명예회장의 일화는 다시금 젊은이들의 도전정신과 철학을 재조명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불굴의 개척자 정 명예회장의 어론으로 본 아산 탄생 100주년을 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70원으로 뭘하겠어? 정주영 회장이 노할라
②8포 세대들아 들어라 "이봐, 해봤어?"
③"길을 몰라, 그러면 찾아야지"
④"잘 먹고 잘사려고? 좋은 일을 해야지"
⑤불굴의 희망가 "실패는 없다"
어려운 상황 반복, 포기 않고 끝까지 "실패는 교훈이 된다"

[미디어펜=김태우기자]취업난과 어려운 경기상황으로 도전을 엄두도 못내고 있는 현재, 70원의 쌈짓돈으로 지금의 현대그룹을 이룩한 故(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는 시대적 정신이 필요할 때다.

어려운 경제상황에 새로운 도전을 꿈꾸지 못하고 포기하는 청년층들에게 아산(峨山) 정주영 명예회장’의 도전정신과 철학은 이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필수 덕목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1915년 11월25일 강원 통천에서 태어난 아산은 무수한 시련과 도전을 강인한 기업가 정신으로 극복하면서 한국 경제를 일으켜 세운 장본인 이다.

   
▲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故(고)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현대자동차
1973년 1차 오일쇼크 때 아산은 말라가는 달러를 구하기 위해 중동 건설시장에 뛰어들었고 43년 전 울산의 작은 어촌을 통해 지금의 조선 수주량 세계 1위국의 신화를 이룩하는 현대조선소를 설립해 조선산업의 초석을 놓았다. 모두가 고개를 저으며 반대를 하는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정 명예회장이 중공업에 뛰어들 당시 한국은 중공업이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나라, 변변한 기술자도 없는 나라였다. 이런 불모지의 한국에서 정 명예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발위해 조선산업에 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모두가 입을 모아 실패를 예고 했지만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백사장에 세계 최대 조선소를 짓는 것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 것이 아산 정주영이었다.

그의 무모한 도전은 세계를 놀라게 한 신화를 써냈고 조선을 넘어 자동차와 해외 건설로 확산시켜갔다. 이런 아산의 도전이 현재 한국 산업의 태동이자 성장의 역사였다.

국내 산업의 신화의 아이콘이자 재계의 거목으로 꼽히는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이지만 과거는 평범했다. 오히려 현재의 청년들보다 못한 처지였다.

탄탄한 배경도 재력도 없었다. 소학교를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었던 그는 당시 가난한 집안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했다. 학교를 졸업한뒤 줄곧 아버지 밑에서 농사일을 도와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에게 변화는 오지 않았다.

이에 아산은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소를 팔고 받은 돈 70원을 들고 새로운 삶을 위한 도전의 길에 올랐다. 농부에게 있어 소의 존재와 70원의 무거움은 알고 있었지만 새로운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결과가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였기에 과감한 도전을 시도했다.

70원과 자신감만 들고 고향을 떠나 올라온 서울은 그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무작정 상경해 공사판 막노동, 쌀가게 점은 등을 전전해야했다. 처음시작한 타지 생활은 춥고 배고팠다. 지금의 3포 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의 20대보다 못한 처지였다.

보통의 경우 삶에 지쳐 첫 상경의 포부와 희망을 저버리고 귀향을 하겠지만 정 명예회장은 현실에 굴하지 않고 노력해 결국 자기 사업을 시작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밝은 미래만 예상했던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수많은 크고 작은 실패로 고배의 쓴잔을 삼켜야했다. 보통 내 가게, 내 사업을 시작하면 금방 큰 수익을 내거나 명성을 얻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모든 일에 순서가 있듯 처음부터 잘 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요즘 많은 가게들이 생겨나고 없어지고를 반복하는 것도 이 부분의 이해와 인내가 부족해서 일 것이다.

1938년 정주영 명예회장은 남에게 물려받은 쌀가게를 운영하며 자신의 가게를 갖고 사업을 시작하지만 2년 만에 중일전쟁으로 시행된 일제의 배급제 시행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지인들과 합작해 세운 자동차정비사업인 아도서비스는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불에 타버렸고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공장도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 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야했다.

이후 6.25전쟁으로 황패해진 국토의 재건을 위해 현대건설을 세워 부흥의 괘도에 오르는 듯 했으나 대구 낙동강 고령교 공사의 차질로 빚더미에 앉아야 했다.

1968년 해외의 기술을 도입해 반전의 기회로 삶기 위해 내놓은 현대자동차 코니타 역시 2년만에 국내 도로교통상황에 맞지 않은 설계와 도로사정 등의 이유로 막대한 부실을 남기고 실패했다.

보통의 경우 한 분야의 실패를 맛본 뒤 소심해지고 위축되어 도전을 망설이거나 표기하겠지만 정 명예회장은 달랐다. 위기를 기회삼아 끊임없는 도전을 이어갔다.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1965년 태국빠따니-나리타왓 고속도로 공사에 수주를 받아 막대한 손실을 본 끝에 공사를 마쳤지만 이를 교훈삼아 미국 알래스카, 중동 항만공사 등 해외공사를 잇따라 수주했다.

이런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의 두고 사람들은 “불확실성에 치열하게 도전하는 기업가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다”고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