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이 넘치는 사회일수록 불만이 넘치기 마련 도래하지 않는 정의

관용이 넘치는 사회일수록 불만이 넘친다

사회의 수많은 어려움들


사회를 둘러보면 불쌍한 이들이 도처에 넘친다. 버스만 타 봐도 노인, 장애인, 임산부, 어린이 등 자리를 양보해야 할 사람 천지다. 오히려 몸 건강한 내가 죄송할 따름이다. 또 북녘에는 동포들이 공포정치에 죽어가고, 중동에서는 끊임없는 내전에, 아프리카는 기아로 인한 죽음 등 온 세계가 고통에 신음한다.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 '좋아요’도 눌러보고, 구호성금도 보내보고 하지만 계속 제자리다. 내 힘은 미약하니, 같이 하면 잘 될 것 같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다 같이 연대해서 우리들의 문제를 풀어나가자.

우리 사회 지도층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나. 정치인들은 이 세상의 수 많은 고통들이 보이지 않나. 돈 많은 재벌들은 돈 안내고 뭐하나. 이럴 때 좋은 일이나 좀 하지 않고. 온 세상이 고통 받는데 고급차 끌고 다니는 꼴을 보니 화가 난다. 정부는 재벌들 혼내지 않고 뭘 하고 있나.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착한 우리들은 '여러분 저들이 저렇게 고통 받는데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라며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재벌들이 혼이 나고, 사람들은 구호성금을 더 내기 시작한다. 정부도 세금을 더 걷어 사회약자들을 위한 준비를 한다. 세상의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 것 같다. 나 하나가 바뀌니까 온 세상이 바뀌고 정의로운 세상이 곧 도래할 것 같다.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회 현상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불쌍한 노점상을 돕자며 포장마차를 이용하다보니, 정상적인 점포들이 문을 닫고 주변에 포장마차가 늘어서기 시작한다. 세금 잘 내면서 장사하는 분들이 점포를 닫더니, 뜬금없이 포장마차를 여신다. 또 사람들이 갑자기 어딘가 아프고, 사연 있는 사람들로 변해간다. 참아 볼만한 일들이 참을 수 없는 일들로 변해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하는 일들이 그러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된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 보다 잠깐 연기하는 것이 돈 벌기 더 쉽기 때문이다. 아뿔싸.. 멀쩡한 사람들이 병신 노릇하는 꼴을 보게 된다. 약하다거나 사회적 소수라는 것이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이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존하기 위해 성실한 노동에서 연기하는 노동으로 바뀐 그들을 욕할 수는 없다. 그들도 생존을 위해서 그런 연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지옥으로 가는 길은 온갖 선의로 포장 돼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죽이게 된다. 관용이 넘치는 사회일수록 온갖 사람들이 능력이 아닌 사연으로 경쟁하게 된다. 정치인들은 이를 포퓰리즘이라는 선의의 약속으로 포장한다./사진=연합뉴스

시간이나 돈이 언제나 적자상태인 것처럼 언제나 누구든지 사회의 소수자다. 누가 더 약한지, 누가 더 배려 받아야 하는지를 가지고 경쟁을 하면 도저히 결론을 낼 수가 없다. 약하다는 기준, 사회의 소수라는 기준을 명확히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1%는 사회 소수인가, 그렇다면 재벌은 보호받아야 하나? 사회 49%는 사회 다수인가, 그렇다면 여성을 따로 보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수자나 약한 자들을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사회적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죽음의 무한경쟁 레이스를 부르기 때문이다. 세상에 사연 없는 인생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슈퍼스타K’와 같은 경쟁체제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느껴왔다. 노래 부르는 경쟁에서 필요한 것은 '가창력’이지, '내 과거는 힘들었다’가 아니다.

파키스탄 아이들을 진정 지옥으로 내몬 것은

전에 나이키가 파키스탄에서 어린이들을 통해 축구공 만드는 사업을 한 일이 있다. 전 세계의 마음 착한 분들은 나이키가 파키스탄 어린이를 착취하며 학교도 못 가게 만든다고 시위를 벌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나이키는 마침내 파키스탄에서 철수했고 그때 그 어린이들은 '모두’ 자유의 몸이 됐다. 그러나 의도와는 다르게 어린이들은 일터가 사라지면서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사람을 쓸 기업은 이제 없다. 그 어린이들은 성매매로, 마약 거래상 등의 음지로 내몰렸다. 잘못된 일이라는 것은 다 알지만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아이들이 노예처럼 강제 노역을 당해왔는지, 살기위해서 교환을 통해 자발적으로 노동을 제공했는지는,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 악착같이 살고 있는 그들을 더 거친 세상으로 내몬 것은 누구였나. 아직도 그들을 지옥으로 내 몬 것은 진정 나이키였나.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참 뜻

이천 년 전에 벌써 예수께서 이에 대해 말씀하셨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씀을 그렇게들 모른다. 내가 착한 마음으로 관용을 베풀 때, 그것을 지켜보는 이에게는 '불쌍함’이 한 푼 더 얻을 수 있는 관용의 '조건’이 된다.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스스로 거짓되게 만든다. 예수는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삼일 굶으면 담장 안 넘는 놈이 없다고 하는데, 생존 앞에서 누가 진실과 거짓을 가릴 수 있을까. 생존 앞에서 악을 선택하는 이들보다, 거짓말해야하는 상황을 만든 놈이 훨씬 더 악마에 가깝다. 구제나 관용은 그래서 모르게 해야 한다. 선한 의도가 악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온갖 선의로 포장 돼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죽이게 된다. 관용이 넘치는 사회일수록 온갖 사람들이 능력이 아닌 사연으로 경쟁하게 된다. 능력의 우열은 자연이 선택한다. 생존한 자가 강한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용을 위한 사연은 선택할 수 없다. 지난 사연으로 경쟁하는 것을, 누가 무엇으로 선택할 수 있을까. 사연이라는 수단으로 관용을 얻자는 이들로 인해 관용을 차지하려는 사람들끼리 무한 투쟁이 시작된다. 각자에게는 내 감기가 남의 중병보다 더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귀지옥이다. 어설픈 관용, 전시용 자선은 오히려 '악의’보다 훨씬 더 해롭다. 지옥은 언제나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우리의 '선한 의도’가 만든다. 관용을 베풀려거든 양심의 무게에 맞게, 그리고 왼손이 모르게 하자. 그래야 우리의 진짜 선한 의도가 전달이 될 테니까. /손경모 자유인문학회 회장

(이 글은 자유경제원 '청년함성' 게시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정치인들은 이 세상의 수 많은 고통들이 보이지 않나. 돈 많은 재벌들은 돈 안내고 뭐하나. 이럴 때 좋은 일이나 좀 하지 않고. 온 세상이 고통 받는데 고급차 끌고 다니는 꼴을 보니 화가 난다. 정부는 재벌들 혼내지 않고 뭘 하고 있나. 거리로 나가 외치고 압력을 행세하자. 2015년 대한민국의 단상이다./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