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익이 모이면 공익"…사익추구와 이타주의는 공존하는 것
   
▲ 조우현 자유경제원 연구원

사익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 7가지

1. 사익추구는 도덕적이지 않다는 오해

순풍산부인과, 하이킥 시리즈를 연속 히트시킨 시트콤계의 히어로 김병욱 감독에게 물었다. “김병욱에게 시트콤이란?” 김병욱은 웃으며 답했다. “밥벌이죠” 산소, 운명, 꿈 등의 추상적인 대답이 아닌 밥벌이라니, 솔직한 답변이다.

밥벌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행위를 전문용어로 '사익추구’라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배꼽 빠지게 재미있는 시트콤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시트콤을 만드는 사람들의 자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다”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뜻이다.

자신의 이익, 밥벌이를 위해 노력한 김병욱에게 도덕적이지 않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사익추구가 도덕적이지 않다는 오해는 어디에서 왔을까? 이는 '사익’과 '탐욕’을 혼동한 결과다. 사익 추구는 인간의 본능이지만 탐욕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 정당하게 갖기 어려운 대상을 탐내는 것이다. 따라서 사익, 자기 이익의 추구와 탐욕은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 옳다.

2. 사익보단 무소유가 좋다는 오해

공수래공수거, 다 내려놓고 마음의 평화를 찾자는 '무소유’ 열풍이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너도 나도 무소유가 진리이던 시절, 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이가 있었으니, 2002 미스코리아 진 금나나다. 의대 출신 미스코리아로 주목받았던 그녀는 재학 중이던 경북대 의대를 그만 두고 하버드에 입학해 세간을 놀라게 한 미스코리아계의 '레전드’다.

당시에는 금나나의 SAT 점수보다 그녀가 하버드 입학서류로 제출한 에세이가 더욱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때 아닌 무소유 열풍이 불었던 시절, 금나나는 다음과 같은 소신을 에세이에 담아냈다.

“나는 사람들이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아무런 욕구 없이 산다면, 무언가를 이루려는 의지와 욕망도 사라진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결국 허영, 욕심, 욕망이라는 건 한편으로는 고통과 스트레스를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기도 한 것이다(금나나, '나나 너나 할 수 있다’ 중에서).”

그렇다. 모두 다 비우려고만 한다면 목표달성은 누가 할까. 건전한 사익추구는 세상을 발전시키는 힘이 된다. 금나나 역시, 자신과의 싸움에 도전하며 '자기만족’을 느꼈을 것이고, 이를 보는 후배들은 그녀를 통해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워나갈 것이다.

   
▲ 순풍산부인과, 하이킥 시리즈를 연속 히트시킨 시트콤계의 히어로 김병욱 감독에게 물었다. “김병욱에게 시트콤이란?” 김병욱은 웃으며 답했다. “밥벌이죠.” /사진=SBS순풍산부인과 드라마타이틀 캡처


3. 사익에는 악(惡)행이 따른다는 오해

자기만족, 자기 이익 추구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하는 힘을 갖게 한다. 교황 레오 13세는 “일한 결과를 자신이 가져갈 수 있을 때 사람들은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자발적으로 일한다. …사람들이 일을 하는 이유가 재산을 모으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 말에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편, 일하지 않고 무언가를 거저 얻으려는 심보는 '사익’이 아닌 '탐욕’이다. 탐욕은 앞서 말했듯 정당하게 갖기 어려운 무언가를 너무 많이 가지려는 것을 의미한다. 도둑질, 강도, 사기, 협박 등을 통해 자신이 얻을 수도 없는 것을 얻으려고 하거나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탐내는 것을 사익추구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4. 사익추구는 건전하지 않다는 오해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결론은 하나다. 사고 싶은 물건을 살 자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고 싶은 것이다. 돈이 주는 것은 결국 마음의 자유다.

<차라리 죽지 그래>의 저자 남정욱 교수 역시, 돈이 있다고 해서 행복이 찾아오지는 않지만 돈이 나가면 행복도 대부분 따라 나간다고 했다. 또 돈이란 건 단순히 화폐나 금속이 아닌, 우리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의 지표라고 했다.

돈을 번다는 건, 다시 말해 사익을 추구한다는 건 사리사욕을 채운다고 폄하할 것이 아닌 이 세상을 건전하게 살아가는 행위다. 마음의 자유를 얻기 위해 모두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다. '사익’이라 하면 욕심쟁이, 사사로운 이익이나 욕심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면 반성해야 한다. 이는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땀 흘리는 행위를 허무하게 만드는 오해일 뿐이다.

5. 사익추구와 이타주의가 공존할 수 없다는 오해

소설가 공지영은 딸에게 쓴 에세이를 통해 '진정한 우정은 그의 성공에 함께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있는가 아닌가에 있다… 대게는 스스로가 스스로임을 좋아하고, 스스로의 삶에 긍정의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다른 이의 성공에 박수를 보낼 수 있다(<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중에서)’며 행복한 사람을 친구로 사귀라고 말했다.

은은하게 포장했지만 “잘난 사람을 친구로 둬야 네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시기질투 안 하니 그런 사람을 친구로 사귀라”는 뜻이다. 자신의 사익이 충족되어야 타인의 사익을 인정하는 이타적인 마음이 생긴다는 말이기도 하다. 굳이 공지영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학창시절, 내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후에야 친구의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었고, 내 연인이 괜찮은 사람이라야 친구의 연애를 기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또 내가 원하는 곳, 만족할만한 곳에 취직을 한 뒤에야 비로소 친구의 앞날을 응원하고 축하해줄 수 있었다.

물론 다 가졌음에도 남이 잘 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이건 건전한 사익추구가 아닌 탐욕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니 논외로 하자. 또 가진 게 없지만 친구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천사도 있다. 훌륭한 인성이다. 하지만 웬만해선 사익추구와 이타주의는 함께 간다. 사익추구와 이타주의는 공존하는 것이지 다른 개념이 아니다.

6. 사익보다 공익이 좋다는 오해

초등학교 6학년 때 언제든 준비물을 빌려 쓸 수 있는 '공용물품실’이 있었다. 그 안에는 색종이, 크레파스 등 온갖 준비물이 다 들어 있어 마치 마법의 공간 같았다. 하지만 마법은 잠시 뿐, 그 곳의 물건들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말았다. 내 것이 아니니 막 사용하고,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으니 제대로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익을 위해 생긴 물품실은 어느새 학교 예산만 갉아먹는 곳이 되어 갔다.

굳이 공용물품실이 아니더라도, '공유재’의 비극은 그 사례가 무궁무진하다. 공용 화장실에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라고 써 붙여도, 실시간으로 청소해주지 않으면 금세 지저분해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우리 집이라고 생각하면 쉽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 진짜 우리 집, 내 것이 아니니 내 것처럼 관리가 안 된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 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껴 쓰고 귀하게 여긴다. 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공익’이란 이름으로 무언가를 나누어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사익, 자유를 지켜주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 국가가 할 일은 국민의 자유를 지켜주는 것이지, 무언가를 나누어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결론은 하나다. 사고 싶은 물건을 살 자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고 싶은 것이다. 돈이 주는 것은 결국 마음의 자유다./사진=미디어펜


7. 사익과 공익이 관계가 없다는 오해

김병욱이 재미있는 시트콤을 만들고, 금나나가 세계 최고의 대학에 들어간 건 사익에 의한 일이었지만, 그들의 사익추구로 인해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김병욱 덕에 재미있는 시트콤을 볼 수 있게 됐고, 금나나의 노력 덕에 '매사에 최선을 다하면 꿈의 언저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게 바로 공익이다.

뿐만 아니다. 저마다의 자유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우리들로 인해 세상은 더 나아진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양조장 주인·빵집 주인의 자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거창한 목표를 지향하는 것만이 공익이 아니다. 사익이 모여 공익이 된다. 정부가 공익이라고 표방하는 것은 사실 정부를 구성하는 집단의 사익에 불과하다. 사익이야말로 세상을 나아지게 한다. 공익을 내세우려면 사익을 먼저 존중해야 한다. 사익에 앞서는 공익은 이 세상에 없다. /조우현 자유경제원 연구원

(이 글은 자유경제원 '자유주의 오해풀기' 게시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