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본주의 내재적 동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블랙박스
   
▲ 류석춘 사회학과 교수

기존 고교 역사교과서 사관 ‘내재적 발전론’의 문제와 대안적 접근

우리 역사에 대한 '내재적 발전론’은 일본의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일본은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한국은 내부적으로 '근대’ 즉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이 없는 사회라고 접근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 의한 타율적 견인만이 한국을 전통적인 사회에서 근대적인 사회로 바꿀 수 있다고 설명한다. 즉 조선은 정체된 사회이기 때문에 외부의 개입이 있어야 발전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이러한 '식민사관’에 대항해 우리 국사학계는 조선도 자체적인 역사발전의 동력을 가지고 있던 사회였음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즉 조선 후기 사회가 내부적인 다시 말해 자생적인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강조된 개념이 내재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한국 자본주의의 '맹아’다. 자본주의 맹아의 실체는 사관에 따라 대상이 달랐다. 유물론적 사관은 '경영형 부농’의 등장을, 그리고 유심론적 사관은 '실학’의 등장을 강조했다.

그러나 '식민사관’에 대항한 내재적 '민족사관’은 그것이 유물론이건 혹은 유심론이건 동일한 논리를 전개했다. 즉 조선은 자체적으로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이 완성되기 전에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여 자생적인 역사발전의 씨앗을 빼앗아 갔다는 논리다. 이 새로운 해석은 '식민사관’에 시달리던 우리 국사학계에 엄청난 호응을 일으키며 단숨에 '민족사관’을 학계의 지배적인 사관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민족사관의 등장과 그 해석을 뒷받침한 역사적 실증 작업에 크나 큰 역할을 한 학자가 바로 연세대 명예교수 김용섭이다. 그는 유물론적 좌파 민족사관에 입각한 '경영형 부농’ 즉 한국 자본주의 맹아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지금의 국사학계 중진급 이상의 학자들은 모두 이러한 김용섭의 입장을 직간접으로 물려받았다. 우리 국사 학계 전체가 좌편향된 까닭이다. 김용섭의 주장에 6.25전쟁의 기원은 민족내부의 좌우 대립과 계급갈등에서 찾아야 한다는 좌파 학자 Bruce Cumings 의 주장이 맞물리면서, '내재적 발전론’은 전성기를 맞았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국사학계는 이렇게 하여 좌편향이 지배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좌파 민족주의’ 사관은 '80년대 학생운동권의 시각과도 잘 맞물렸다. 일본이 짓밟았기 때문에 우리의 자생적 자본주의 맹아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매판적이고 종속적인 자본주의가 기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해석이 '사회구성체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국사학계는 물론 사회과학 전체를 휩쓸었다. 매판적 부르주아가 외세의 앞잡이인 국가권력과 결탁해 민중을 수탈하기 때문에 '혁명’이 필요하다는 운동권의 논리는 좌파 민족주의 논리와 샴쌍둥이 관계에 있었다. 이른바 '386’ 세대는 이러한 논리가 만들어낸 실험용 쥐 '모르모트’들이었다.

   
▲ 신채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일찍이 설파했다. 이 말을 '아’만을 강조하는 배타성을 전제하고 '비아’의 역할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해석한다면, 민족주의는 바로 배타적인 국수주의와 연결된다./사진=미디어펜

만약 한국 자본주의가 좌파 민족주의 혹은 운동권의 주장대로 '독점을 강화’하고 '종속을 심화’시켜 '민중을 수탈’한 것이 반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 시각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는 '민중을 수탈’한 것이 아니라 '중산층을 양산’했다. 노동자 농민을 도시빈민으로 내몰기는커녕, 마이카 마이홈을 누리는 도시의 중산층으로 성장시켰다. 70년대 80년대 양성된 수백만의 산업전사 노동자들이 지금은 억대 연봉을 넘나드는 대우를 받는 노동귀족으로 변신했다. 그 결과 오늘날 국제공항은 연휴만 되면 예외 없이 해외여행을 떠나는 인파로 몸살을 앓고 있다.

World Bank 가 인정하듯이 한국 자본주의의 기적은 자본의 지속적인 축적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공평한 분배도 이루었다는 사실에 있다. 적어도 1997년 경제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우리 자본주의는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쾌거를 이루었다. 바로 이 대목이 우리가 자랑스러워 할 수 있고 또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핵심 포인트이다. 다시 말해 “민중의 수탈이 아닌 중산층의 성장” 바로 이 현상이 좌파 민족주의 사관 혹은 운동권의 시각에서 설명할 수 없는 한국 자본주의 발전과정의 '블랙박스’다.

이 블랙박스 문제를 해결하려면 좌파 민족주의 사관 혹은 운동권 사관이 재단한 역사와 실제 진행되었던 역사를 교차시키며 어디에서 실증적 혹은 논리적 비약이 있었는지를 천착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에 대한 응답을 요구한다.

우선, 조선 후기에 등장한 자생적 맹아가 식민지를 거치며 짓밟혔다면 그 자생적 맹아는 언제 우리 내부에서 다시 등장하여 한국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는가? 해방과 건국 그리고 전쟁의 와중인 50년대에 자생적 맹아가 등장할 수 없었다면, 경공업이 발전하던 60년대 혹은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되던 70년대에 자생적 맹아가 등장하였다고 이해하여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해방과 건국 그리고 전쟁으로 시련을 겪던 50년대에 자생적 맹아가 등장하였다고 이해하여야 하나? 이승만 시대 그리고 박정희 시대를 미국과 일본에 대한 한국의 새로운 종속이 시작된 시점으로 보는 좌파 민족주의 사관으로는 답이 나올 수 없는 질문이다.

다음, 식민지가 끝나고 대한민국에 어떻게든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한 자생적 맹아가 등장하였다고 치자. 그렇다면 과연 그 맹아는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가 누리는 세계 10위 권의 경제라는 크나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 씨앗의 상태로부터 성숙한 나무로 자라는 과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도 좌파 민족주의 사관이나 운동권의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좌파민족주의는 1997년 찾아온 경제위기를 자신들의 이론적 입장을 완성시켜주는 구세주로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자본주의가 몰락해야만 스스로의 이론적 완결성이 갖추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는 1997년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고 또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 한국은 일인당 3만 불에 가까운 소득을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다시 역사로 돌아가 보자. 식민지 시기를 자생적 맹아가 짓밟힌 시대로만 보지 않는다면 논리적 답이 가능하다. 즉 조선 후기에 자라고 있던 내부적 동력이 식민지를 거치면서 외부의 자극을 받아 자본주의 맹아가 지속적으로 성장한 시기로 접근하면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의 기원과 발전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즉 한국 자본주의는 조선후기의 맹아로부터 식민지를 거치면서 초보적인 발전을 이루고, 건국와 전쟁의 혼란을 뚫고 느리지만 탄탄한 발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60년대부터 두 자리 수의 성장 즉 도약 단계로 접어들었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의 심화와 함께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하였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리적 해석은 실증적으로도 뒷받침 되고 있다. 굴곡은 있지만 식민지 시기에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였다는 실증적 연구가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건국과 함께 시행된 토지개혁을 통해 분배의 측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의 틀을 만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이어진 전쟁은 봉건적 신분질서를 해체하며 온 국민의 경제수준을 하향 평준화시켰다. 이 평준화의 발판위에서 1960년대 이후의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한국경제는 축적의 심화는 물론 상대적인 분배의 평등까지도 유지하며 발전할 수 있었다.

   
▲ World Bank 가 인정하듯이 한국 자본주의의 기적은 자본의 지속적인 축적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공평한 분배도 이루었다는 사실에 있다. 적어도 1997년 경제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우리 자본주의는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쾌거를 이루었다. “민중의 수탈이 아닌 중산층의 성장” 바로 이 현상이 좌파 민족주의 사관 혹은 운동권의 시각에서 설명할 수 없는 한국 자본주의 발전과정의 '블랙박스’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학계는 역사의 발전을 내재적인 동력으로만 설명하기 위해 온갖 무리수를 두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커밍스의 6.25 전쟁에 관한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모습이다. 6.25가 너무도 명백하게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은 국제전인 사실을 깔아뭉개고, 민족 내부의 계급갈등에서 비롯된 전쟁이라는 해석에 환호하여 왔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 역사학계는 목숨을 바치며 한국을 도운 미국의 역할을 폄하했다. 만약 커밍스 같이 미국이 동아시아에 대한 경제적 이해를 관철하는 수단으로 전쟁을 수행하였다고 해석한다면, 한국이 수출주도산업화의 기치를 들고 진출한 첫 시장이 미국인 사실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나?

신채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일찍이 설파했다. 이 말을 '아’만을 강조하는 배타성을 전제하고 '비아’의 역할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해석한다면, 민족주의는 바로 배타적인 국수주의와 연결된다. 그러나 대신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내부와 외부의 갈등이 있을 때 이 갈등이 반드시 내부를 향해서 혹은 외부를 향해서 일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와 외부의 상호작용이 발생하여 새로운 상승작용이 진행될 수 있다는 열린 해석이다. 물론 그러한 상호작용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우리 스스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우리의 현대사는 이 상호작용을 우리가 적절하게 활용했음을 너무도 생생히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발전은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외재적이다. 내재적 발전론은 외재적 발전론인 식민사관 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북한이 살아 있는 증거다.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이 글은 자유경제원 '현안해부' 게시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