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89)-용기는 진정한 지혜에서 나온다
플라톤(기원전 427~347)의 『프로타고라스』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플라톤의 대화편 읽기는 ‘철학하기’의 시작이다.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문답은 당대 화자들 사이의 문답인 동시에, 모든 시대의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과 답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시공을 초월한 대화를 통해 그의 사유체계를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인식과 논리를 다듬어가는 과정이 된다. 그 과정 자체가 지혜를 구하는 일이니 이것이 곧 철학(philosophy)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또한 ‘철학하기’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더 없이 좋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플라톤의 43편의 대화편중 초기 작품일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플라톤의 초기 철학을 집대성하고 있는 작품으로 고대 그리스 사회에 30대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출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이 책에는 당대 최고의 소피스트로 널리 알려진 프로타고라스와 젊은 철학자 소크라테스 사이에 다양한 철학적 주제에 대한 논박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소크라테스를 설득시키는 그 유명한 프로타고라스의 ‘위대한 연설’도 바로 여기에 담겨있다.

덕은 가르쳐 질 수 있는가?

『프로타고라스』에서는 덕(Arete)은 가르쳐 질 수 있는가 또는 개별 덕들이 사실은 동일한 하나의 것이라거나(덕의 단일성), 누구도 자신이 아는 것과 달리 행동할 수 없다거나(자제력 없음의 불가능성) 하는, 이른 바 ‘소크라테스의 역설’이라 불리는 중요한 철학적 입장들이 논증되고 있다. 특히 이런 난해한 화두가 진지한 대화와 가벼운 농담 속에 무질서하게 섞여 전개되고 있어, 논의의 맥락을 따라잡고 행간을 읽어내기가 무척 어려운 작품이다.

이 대화편은 덕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프로타고라스와 진정한 지혜를 추구하는 소크라테스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덕은 정의, 분별, 경건, 용기, 지혜 등을 합친 개념이다. 덕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일까? 민주정을 통해 국가의 일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지혜와 덕을 갖추는 일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니 이를 배우고 가르치려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도, 또 배울 만한 훌륭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 존경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기원전 5세기 중반에 활약한 페리클레스와 같은 뛰어난 정치가가 대중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 자신은 뛰어난 덕을 갖추었지만, 그 탁월함을 자식들에게는 제대로 전수하지 못했다. 소크라테스가 덕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 중의 한 예다.

가르칠 수 없다면 배울 수도 없다는 얘기인데 정말 그러한가? 이에 대해 프로타고라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각색한 신화를 인용하며 반론을 제기한다. 그 신화에 의하면, 인간 사회를 위해 프로메테우스가 기술적 지혜를 주었고, 제우스는 모든 인간에게 시민적 덕을 선물로 주었다. 아테네 민회에서 누구나 참여하여 발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은 모두가 덕에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혹자는 이 대목을 아테네 민주정의 정당성을 옹호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프로타고라스는 국가가 이성적 형벌제도를 운영하는 것 자체도 인간에게 덕이 가르쳐 질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며 반박한다. 형벌제도의 취지가 부정의(不正義)한 행동으로 징계 받는 것을 본 다른 사람이 그러지 않도록 징계를 하는 것인데, 이는 곧 덕이 교육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냐는 의미다.

프로타고라스는 덕이 천성적인 것이 아니며, 가르쳐 줄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덕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모든 사람들에게 덕을 가르치더라도 두각을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 이외에 자연적 재능이 더 요구된다고 말한다. 덕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라는 관점은 교육비를 받으며 대중을 가르치는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에겐 자연스런 견해다.

   
▲ 아테네 아카데미아 앞에 있는 플라톤 좌상. ⓒ박경귀

소크라테스 역시 뛰어난 사람으로 육성하기 위한 인간적 돌봄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한다. 하지만 프로타고라스의 논증에 완전히 설득된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이 부분에 대해 덕이 가르쳐 질 수 없다고 한 소크라테스의 애초의 인식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그가 프로타고라스의 입장을 시험하려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무지하다고 공언할 만큼 진정한 배움은 끊임없이 스스로 캐어묻고 스스로 깨우쳐 나가는 것이라는, 즉 진정한 앎에서 덕이 나올 수 있다는 기본관점을 갖고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앎은 스스로 깨달아 얻어지는 것이지 가르쳐서 얻어질 수 있는 없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이 대목에서 문제는 제기되었지만 완전한 해답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포리아(aporia)로 남겨진다. 그 막다른 길의 출구를 찾는 모색이 바로 용기와 지혜의 동일성 논쟁이다.

용기는 가르쳐 질 수 있는가?

정의, 분별, 경건, 용기, 지혜와 같은 덕이 서로 다른 것인가 아니면 동일한 것인가에 대한 논증도 흥미롭다. 소크라테스는 지혜와 어리석음이 반대이고, 분별과 어리석음 또한 반대라는 점에서 지혜와 분별이 동일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용기와 지혜의 동일성 논증은 소크라테스의 논증과 프로타고라스의 반론이 팽팽하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가장 대담한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반면 프로타고라스는 용기 있는 사람이 대담한 사람이라는 주장과 대담한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주장을 구별하고, 앎이 대담함을 증진시킨다는 것으로부터 앎이 용기를 증진시킨다는 결론이 당연히 도출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소크라테스는 “용기 있는 사람들은 두려워 할 때는 추한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추한 대담함에 대담하게 굴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부끄럽고 추한 일을 꺼려 멀리하고, 그런 일에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달려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아름다운 용기가 필요한 일에 대담함을 보이는 사람이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리라.

소크라테스는 무서워해야 할 것과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는 지혜에서 이러한 진정한 용기가 나온다고 생각한 것 같다. 플라톤은 이 대화편을 통해 “진정한 앎이 없이 대담한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정신 나간 사람”이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가장 대담한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주변에서 용기가 필요할 때 비겁해지고, 자제력이 필요할 때 용기 있는 척 만용과 객기를 부리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모두 용기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이다.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진정한 용기는 진정한 앎, 그리고 분별력과 지혜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억울한 죄명으로 기소되어 사형선고를 받고도 탈옥의 유혹을 뿌리치고 죽음의 독배를 담담하게 받아든 소크라테스야말로 진정한 용기가 지혜와 분별력에서 나온다는 논증을 몸으로 증명해준 것이 아닌가.

덕이 앎, 지식 그 이상이라면, 또 덕이 진정한 지혜와 용기를 품어야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덕은 가르쳐 질 수 있을까. 덕을 가르칠 탁월한 교사가 있기나 한가? 덕이 가르쳐 질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의 이성과 감성은 역사적 경험과 교육의 축적을 통해 나날이 진화되어 왔어야 하지 않는가.

지식을 가르칠 수 있지만 지혜를 가르치긴 어렵다. 사물의 원리와 시비를 분별하는 식견을 가르칠 수 있지만,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가르칠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가 가르쳐 질 수 없다고 말한 그 덕의 심연은 넓고도 깊다. 내가 닦아야 할 덕도 그만큼 까마득하다.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프로타고라스』, 플라톤 지음, 강성훈 옮김, 이제이북스(2011), 2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