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90)-시공을 초월한 감성의 울림
아르킬로코스 외, 『고대 그리스 서정시선』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사랑을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아름다운 자연을 볼 때 누구나 시심(詩心)이 돋는다. 시는 감성의 언어적 표출에 다름 아니다. 시를 읊조리고 시를 쓰는 순간에 인간은 자신의 의식에 가장 충실하고 가장 자유로워지는 게 아닐까.

시는 꾸밈이 없는 자의식의 표현이다. 하여 누군가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의 자의식을 엿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시는 한 인간의 삶의 순간이 만들어낸 고뇌와 환희, 슬픔과 기쁨, 설렘과 분노, 감탄 등 갖가지 정서의 투영이자, 치열한 삶의 흔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2500년 이전에 쓰인 고대 그리스 서정시를 읽으며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과 정서, 의식을 엿보는 흥분은 짜릿하다. 시에 나타난 그들의 정서는 지금의 우리네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듯 인간의 감성은 한 발짝도 진보하지 않았다. 아니 인간의 감성은 켜켜이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감성은 사람마다 오롯이 자신의 삶의 다양한 상황에 부대끼며 늘 새로이 겪고 만들어 나가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감성의 출발선은 똑같은 셈이다. 고대 그리스 서정 시인들이 느낀 감성과 자의식이 2500년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의 감성과 의식으로 그대로 치환된 듯 공감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인 <일리아드>나 <오뒷세이아>에서 신화와 영웅담이 웅대하게 전개되는 것과는 달리, 서정 시인들의 시는 인간 본연의 다양한 감성과 개개인의 의식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서정 시인들은 전설과 신화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로운 인생을 노래했다.

이 책에는 멀리는 기원적 8세기에 호메로스와 비견할만한 명성을 누린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에서부터, 알크만, 사포, 핀다로스, 시모니데스를 비롯하여, 기원전 4세기까지 그리스인의 사랑을 받은 시인 20명의 주옥같은 시 300여 편이 실렸다. 우리나라에서 고대 그리스 서정시를 일별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그리스 시인들은 자연과 신과 인간을 찬미하고, 인생의 고뇌와 갈등을 노래했다. 시의 주제도 다양하다. 공동체의 덕목을 노래한 애국시, 사랑과 갈등을 노래한 애정시, 올림픽 우승의 기쁨을 찬미한 송가, 개인적 삶의 다양한 정서를 노래한 서정시 등 다채롭다. 짧은 어구의 시에서부터 장문의 단락으로 구성된 시도 있다.

인상적인 시 몇 개를 감상해 보자. 대부분의 일생을 전사로 보낸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는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자신을 모습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방패’라는 제목의 시다. 죽기를 다해 싸워야 할 전사의 영웅적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숲속에 버리고 온 그 좋은 방패가
한 야만족에게는 자랑거리가 되겠지.
그건 나에게 대수롭지 않지.
대신 목숨을 구했는걸 뭐.
잘 가져가라 해.
다시 더 좋은 것을 구하면 되지 뭐.

이런 상황이 오히려 때로 승리하고 때로 패주하는 일이 다반사인 전쟁터에서 빚어질 수 있는 사실적인 모습이지 않을까. 방패를 빼앗기거나 잃어버리는 일은 고대 그리스 병사들에게 죽음보다 더 큰 치욕이다. 그럼에도 아르킬로코스는 전쟁터에서의 영웅적 모습을 숭상하는 그리스 세계의 통속적 가치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풍자시의 대가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와 반대로 조국을 위해 헌신해야 할 병사들의 애국심을 북돋우는 전쟁 시도 있다. 티르타이오스(Tyrtaios)의 ‘전투와 명예’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그는 그리스 최강의 군사 국가이던 스파르타의 궁정 시인답게 그의 시는 젊은 전사들의 용기를 격동시킨다.

젊은이여, 굳세게 나란히 서서 싸우고 결코 겁을 먹고 물러서지 마라.
네 가슴속 마음을 용기와 당당함으로 무장하고
적과 전투가 벌어지면 네 생명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다리가 날렵하지 못한 늙은 병사를 두고 달아나지 말게.
늙은이가 젊은이보다 앞서
최전선에 나가 싸우다 쓰러지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네.

티르타이오스(Tyrtaios)의 짧은 시, ‘최전선’은 전쟁터에서 전사가 직면해야 할 냉혹한 현실을 함축해 준다.

그대는 죽음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미덕의 경계선에 도달하리라.

기원전 7세기경에 레스보스 섬에서 귀족가문으로 태어난 알카이오스(Alkaios)의 ‘바다 위의 국가’라는 시는 귀족정치를 개혁하려 정치 운동에 헌신하던 시인의 진보적 혁명사상을 표현하는 듯하다.

이번에 밀려온 파도는 지난번 것보다 훨씬 높구나.
파도가 배 안으로 들이쳐
물을 퍼내는 우리의 고역은 말할 수가 없구나.
어서 서둘러 배 난간을 보강하고
안전한 항구로 달려가자.
그리고 우리 모두 용기 없이 망설이지 마라.

우리 눈앞에 거대한 시련이 닥쳐왔다.
지난번의 고난을 상기하라.
그리고 이제 모두 자신의 신뢰성을 증명하자.
우리가 겁쟁이가 되어,
땅 아래 누워있는 고귀한 선조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말자.
지금은 한 사람의 명령을 따를 때가 아니다.
각자가 알아서 제 일에 충실할 때다.

서정시의 백미는 역시 사랑의 시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꼽히는 사포(Sappho)의 시를 읽노라면, 그의 예민한 감수성과 절묘한 언어 표현, 내면의 격렬한 감정과 솔직함, 절제된 언어의 은유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사포의 시 ‘질투’를 읽으면 자신이 사랑하던 동성 여인 아티스의 변심을 바라보는 사포의 격렬하고 간절한 애증의 심사가 그대로 느껴져 독자의 숨을 막히게 한다.

그는 생명을 가진 인간이지만
내게는 신과도 같은 존재.
그가 너와 마주앉아
달콤한 목소리에 홀리고
너의 매혹적인 웃음이 흩어질 때면

내 심장은 가슴속에서
용기를 잃고 작아지네.
흠칫 너를 훔쳐보는 내 목소린 힘을 잃고
혀는 굳어져
아무 말로 할 수 없네.
내 연약한 피부 아래
뜨겁게 끓어오르는 피는
귀에 들리는 듯
맥박 치며 흐르네.
내 눈에는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

온몸엔 땀이 흐르고
나는 마른 잔디보다 창백하게
경련을 일으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네.
하지만 모든 것을 견뎌야 하지......

   
▲ 갈망과 애욕의 신 포토스, 나폴리 국립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사포의 시 ‘처녀’ 또한 감동적인 수작(秀作)이다. 현대의 어떤 시인이 저토록 절제된 언어로 처녀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손에 잡힐 듯 말듯 형상화할 수 있을까? 시인인 번역자의 탁월한 번역도 한 몫을 한다. 몇 번을 읽어도 가슴이 뛴다.

가장 높은 나뭇가지 끝에서 익어 가는
달콤한 사과처럼
과일 따는 사람에게서 잊혀진
아니, 잊혀진 게 아니라
감히 팔이 닿을 수 없는,

양치기 발에 짓밟힌
산속의 히아신스처럼
비록 땅에 쓰러졌어도
보랏빛 꽃을 피우는.

서정시의 주제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과 순간에 닿아 있다. 기원전 6세기 말에 사모스의 궁정시인이었던 아나크레온(Anakreon)의 ‘늙음’이라는 시에서는 필멸의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허무와 슬픔이 전해진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인들 세월을 거스를 수 있을까?

귀밑털은 벌써 희어지고
머리털은 많이 벗겨졌네.
젊음의 매력은 얼굴에서 사라지고
이빨은 노인처럼 헐렁하네.
달콤했던 인생은 다 지나가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타르타로스의 세계가 두려워
종종 눈물이 나고 슬피 우네.
왜냐하면 하데스의 집은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하강이 있기 때문이네.
한 번 떨어지면
누구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네.

그리스의 서정시가 오로지 전업 서정 시인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아테네의 정치개혁을 이끈 걸출한 정치가였던 솔론(Solon)도 몇 편의 시를 남겼다. 그의 시, ‘지도자를 선출할 때’는 늘 바른 정치를 위해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며, 공동체의 합리적인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려 부심했던 위대한 정치지도자가 시민들에게 올바른 정치가 선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절절한 심사를 느끼게 한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잘못에 의해 불행과 피해를 겪고 있다면
조금도 신에게 불만을 돌리지 마라.
그대가 자질 없는 자에게 권력을 주고 높여주었으니
그대는 스스로 비참한 노예의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대의 문제는 모두가 여우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생긴 것이다.
대중들의 생각은 공기처럼 얄팍한 것이어서
그대는 교활한 자의 혀끝에서 나오는 말만 보았지
그가 숨긴 행동을 보지는 못하였구나.

그리스 철학을 아버지인 플라톤 역시 몇 편의 시를 남겨 흥미를 끈다. 영국 시인 셀리에 의해 시 ‘아도네이스’에 인용되어 유명해진 시 ‘헤스페로스(Hesperos)’가 있다. 마치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이다’라는 말이 의미하듯 플라톤 자신이 모습이 형상화된 느낌도 든다.

너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벽별이었고
죽어서는 저녁별이 되어 죽은 자들을 비추는구나.

고대 그리스 서정시를 통해 본 그리스 인들의 솔직한 감정과 시인마다의 독특한 개성에 따른 다양한 정서의 표현들은 2500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울림을 준다. 각각의 시들이 표현해 낸 인간 내면의 감성들이 현대인에게도 생생하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그리스 서정 시인들의 감성 표현력의 탁월함을 느끼게 한다. 또 개개인의 자의식이 살아 숨 쉬게 하는 그리스인의 자유정신과 예술적 환경을 뒤돌아보게 한다. 내 감성이 메말라갈 때 언제든지 두고두고 꺼내 읽고 싶은 책이다.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Classic 73: 『고대 그리스 서정시선』, 아르킬로코스 외 지음, 오자성 옮김, 청개구리 아카데미(2011), 2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