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91)-운명의 덫에 걸린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
소포클레스(기원전 496/495년~406년), 『오이디푸스』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인간의 운명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일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맞닥뜨릴 때, 인간은 그저 그 운명의 굴레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오이디푸스 왕>은 바로 극단적인 상황이 빚어내는 인간의 비극적 삶을 통해 인간과 운명의 숙명적 대결에 관한 이런 치명적인 물음과 마주하게 한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란 오이디푸스는 그 불경한 금단의 운명을 깨기 위해 도전한다.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의 끔찍한 운명을 떨쳐내기 위한 오이디푸스의 처절한 몸부림이, 오히려 자신의 저주스런 운명을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이었음을 스스로 밝혀내게 되니 이 얼마나 참혹한 운명인가.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아들로 태어난다. 하지만 자신이 아들의 손에 죽을 운명이라는 신의 계시를 받은 라이오스는 아들 오이디푸스를 산속 깊숙이 갖다버린다. 그런데 양치기가 오이디푸스를 거두어 코린토스 왕 폴뤼보스에게 갖다 바침으로써 오이디푸스는 폴뤼보스를 친부로 믿고 자란다.

어느 날 오이디푸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너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신탁을 듣게 된다. 이에 그는 친부 살해와 근친상간의 비극적 운명을 벗어나고자 부모 곁을 떠나 먼 방랑길에 오른다.

그러나 테베에 이르러 길을 가던 중 테베의 왕 라이오스 일행과 마주친다. 여기서 서로 길을 비키지 않겠다는 싸움이 일어나 그 와중에 친부인 줄 모른 채 라이오스를 죽이게 된다. 불의의 사고로 왕을 잃은 테베 왕실에서는 테베 근처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풀지 못하는 사람을 죽이던 스핑크스를 물리치는 사람에게 테베의 왕위를 넘겨주고 왕비와 결혼할 수 있도록 한다는 포고를 내린다.

때마침 스핑크스를 만나게 된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가 낸 "아침에는 네 개의 다리로 걷고 낮에는 다리가 두 개가 되고 밤에는 다리가 세 개로 변하는 생물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에 대해 ‘인간’이라고 대답한다. 스핑크스는 그 정답을 듣자마자 절벽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죽고 만다.

   
▲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귀스타브 모로 1864년 작.

스핑크스를 퇴치한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으로 추대되고 자신의 생모인 줄도 모른 채 왕비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에테오크레스와 폴뤼네이케스, 두 딸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낳는다. 여기까지 오이디푸스의 인생행로에는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의 인생 역정 속에 숨은 탄생 비밀을 배경으로 깔고, 오이디푸스 자신이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저지른 죄과를 스스로 밝혀 나가도록 함으로써 비극적 운명을 처절하게 감당하게 한다.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다. 테베에 역병이 들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받은 델포이의 신탁을 구한다. 신의 계시가 ‘라이오스 왕을 죽인 자를 죽이라’고 나오자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자는 누구든 자신의 손으로 복수하겠다고 맹세한다.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 왕 살해자를 찾아내는 과정은 또 하나의 인생의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인간의 지혜를 묻는 것이었다면, 오이디푸스가 마주한 두 번째 난제는 자신에게 저주내린 운명을 안고 살아온 두려움으로부터의 벗어나고자 하는 숙명과의 대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라의 액운을 이겨내기 위해 살인자를 찾아가는 집요한 과정은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관객은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찾아내겠다는 오이디푸스의 열정과 성실한 노력이 오히려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일생을 짓누른 운명의 신탁에서 빠져나오려 할수록 스스로 자신의 운명의 굴레로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간다. 라이오스 왕 살해자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으려는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위협한 끝에, 자신이 바로 라이오스 왕의 살해자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 것이 바로 결정적인 파국으로 치닫게 한다.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은 처절하다.

“그대는 부지중에 가장 가까운 핏줄과 가장 수치스럽게 동거하면서도, 어떤 불행에 빠졌는지 보지 못한단 말이오.
……
그대는 지하와 지상에 있는 그대의 혈족에게는 원수외다. 그러니 어머니와 아버지의 저주라는 이중의 채찍이 언젠가 그대를 무서운 발걸음으로 뒤쫓으며 이 나라 밖으로 몰아낼 것이오. 지금은 제대로 보는 그 눈도 그때는 어둠만 보게 될 것이오,
......
앞 못 보는 장님이 되고 부자 대신 거지가 되어 지팡이로 앞을 더듬으며 이국땅으로 길을 떠날 운명이니까요. 보는 대신 눈이 멀고, 부자 대신 거지가 되어 지팡이로 앞을 더듬으며 낯선 땅으로 길을 떠나게 될 테니 말입니다.
......
그리고 그는 같이 살고 있는 그의 자식들의 형이자 아버지이며, 그를 낳아준 여인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그의 아버지의 침대를 이어받은 자이자 그의 아버지의 살해자임이 밝혀질 것이오.”

눈먼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말은 그대로 오이디푸스의 운명의 전주곡이 되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끔찍한 그 예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자신이 그러한 운명의 저주를 벗어나기 위한 인생행로를 걸어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자신에게 살인범의 혐의를 씌우는 것이, 그의 처남이자 사실상의 외숙부인 크레온의 음모에서 나온 것이라 몰아간다. 그는 크레온과 아내인 이오카스테를 추궁하여 라이오스에게 내린 신탁의 내용과 라이오스의 아들이 버려지게 되는 과정과 라이오스 왕이 살해될 당시의 구체적인 정황을 추궁한다.

하지만 코린토스에서 온 사자로부터 자신이 친부로 알고 있던 폴뤼보스가 친부가 아니란 사실을 듣게 된다. 게다가 라이오스에게서 아들을 버리도록 명령받았던 목자와 이 아들을 넘겨받아 코린토스의 왕에게 갖다 바쳤던 코린트에서 온 사자(使者)의 대질심문을 통해 자신이 라이오스 아들로 태어나 폴뤼보스 왕의 아들로 자라게 된 전말을 모두 확인하고는 쓰라린 고통에 울부짖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오카스테는 목을 매어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의 옷에 꽂혀 있던 황금 브로치로 두 눈알을 찔러 자신의 운명의 시선을 영원히 닫는다. 오이디푸스는 두 딸을 돌봐줄 것을 크레온에게 부탁하며 방랑의 길을 준비한다.

   
▲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샤를 프랑스와 잘라베르 1842년작.

결과적으로 인륜을 저버린 오이디푸스의 과실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그가 부친을 살해하고 모친과 결혼하게 되는 건 정말 피할 수 없는 필연이었을까? 그는 나름대로 운명을 깨기 위해 방랑의 길을 떠났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이디푸스가 자신에 씌워진 굴레를 벗어던질 기회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길을 가던 중 마주친 행인을 살해한 것은 분명히 그의 귀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라이오스 왕이 왕의 행차임을 밝히고 오이디푸스에게 길을 양보토록 요구했다면 살인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설사 행인들이 무례하게 자신을 밀어붙였다 하더라도 오이디푸스가 상대방이 죽을 정도의 반격으로 살상한 것은 그의 절제력의 부족 때문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굴욕을 참지 못한 오이디푸스의 젊은 혈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의 덫에 걸렸던 것은 아닐까.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예고된 운명을 의식적으로 회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지혜로 스핑크스를 물리치고 왕좌를 차지한 후 왕비와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이 또한 운명의 여신의 덫은 아닌지 회의하고 경계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폴뤼보스를 친부로 믿은 것 자체가 운명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다. 그 때문에 자신의 회의와 경계를 풀었던 것이 큰 잘못이긴 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에게 모든 단계에서 자신의 인식과 행위를 재점검하는 주도면밀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가정은 오이디푸스에겐 부질없는 일이 되었다. 어쩌면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의 여신의 덫에 걸려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신이 주관하는 연극 속에서 인간의 노고가 부질없다는 것을 인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오이디푸스는 신에게 불가피하게 ‘선택된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오카스테가 오이디푸스에게 사건의 전말을 더 이상 파고들지 말 것을 종용하면서 한 말이 바로 이런 신의 의도를 받아들인 체념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우연의 지배를 받으며 아무것도 확실하게 내다볼 수 없거늘, 그런 인간이 두려워한다고 무슨 소용 있겠어요? 되는 대로 그날그날 살아가는 것이 상책이지요.”

극의 마지막에 코러스가 청중에게 들려주는 노랫말 속에도 운명에 순응해 살라는 메시지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니 항상 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를 지켜보며 기다리되,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옥조여 오는 파멸의 그림자를 느끼면서도 라이오스 살해범을 찾아내겠다는 집념의 추적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밝히고 말겠다는 오이디푸스 왕의 의지와 열정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의 탄생 비밀의 실마리가 하나하나 드러날 때마다 독자들은 숨 막히는 극적 긴장 속으로 빠져든다.

자신을 억눌러왔던 예언의 늪에서 빠져나가고자 하는 해방의 욕구와, 자신을 파멸시키는 운명에 맞서 살해자를 밝히려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타협을 거부하는 오이디푸스 내면의 갈등과 대립 그 자체가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몸부림이 아닐까. <오이디푸스 왕>이 '비극적 아니러니'의 최고봉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의 참혹한 비극을 그리스 시민들에게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극단적 비극의 정점을 간접 체험하게 했다. 이로써 인간 각자가 겪고 있는 크고 작은 비극적 삶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카타르시스와 삶의 밑바닥으로부터의 원기를 불어 넣어주려 한 것은 아닐까. 비통함과 슬픔도 극단에 이르면 자기 내부에서 무화(無化)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이후 세대인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물론, 로마의 키케로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연극, 영화, 문학, 뮤지컬, 미술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창작의 소재로 쓰이고 있다. 헤겔의 <기독교의 정신>에도 오이디푸스 비극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은 오이디푸스 비극을 원용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이 때의 함의는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의 내용과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 작품은 지혜롭고 용맹스런 왕이었던 오이디푸스가 윤리와 규범의 파괴자로 파멸해 가는 모습을 관조하게 해 줌으로써, 관객과 독자로 하여금 인간의 의지와 운명의 관계를 숙고하게 한다. 나아가 범접해서는 안 될 금단의 영역을 재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문학작품으로서의 치명적 매력을 절감하게 해준다.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오이디푸스왕』,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