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전 지역에서 김일성 학정에 항거했던 공산당 타도운동
   
▲ 조형곤 21C미래교육연합 대표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역사적 의의

11월 23일,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제 70주년이 되는 2015년은 역사교과서 전쟁, 이념 전쟁으로 후대에 길이 남을 해로 기억될 지도 모른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놓고 이를 반대하는 측과 찬성하는 측이 양보할 수 없는 한 판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 교과서를 만드는 형식 논란은 이제 끝났다. 정부가 이미 고시를 발표했고 집필진을 구성중이며 국정교과서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안인 교과서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다.

이번 역사교과서 논란의 한 복판에는 검정교과서의 집필사관인 이른바 ‘민중사관’이 있는 바 이 사관은 공산주의 혁명사관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된다. 검인정 체제 하의 한국사 교과서가 민중사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대단히 잘못된 것으로 이를 주관했던 교육당국과 국사편찬위원회는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 한마디로 좌편향 한국사 교과서가 이념적으로 학생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된 것이다.

전쟁 직후 20여 년간 국가가 기념했던 사건이자 온 국민이 알고 있던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사건은 좌편향 역사교과서 및 사회교과서에서 모두 누락 되었다.

이에 대한 역사적 의의는 백년동안 출판사에서 발행한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제18권 『서북청년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 책의 목차만 봐도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역사적 의의가 크고 현대사에 끼친 영향도 지대하다.

“남한으로 내몰린 북한의 엘리트, 월남해서 빈민이 되다, 보수우익의 전위대, 서북청년회로의 대통합, 서북청년회의 지방 진출, 영남 지방에서의 반공투쟁, 서북청년회의 분열과 재건, 대북 공작, 총선을 통한 건국, 대한청년단으로의 통합과 625전쟁”

위는 도서 『서북청년회』의 목차이기도 하지만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역사적 의의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인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는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가 북한의 대탈출을 촉진했다고 주장한다. 책에 따르면 당시 남한의 좌익들은 북한이 공산혁명으로 지상낙원이 되고 있다고 선전했는데 공산당을 겪어 보지 못한 남한의 군중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이에 북한 공산주의의 폭거를 목도한 서북청년들은 북한 실정 보고대회를 열며 남한 내 좌익들의 선동을 막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 사진은 6.25 침략전쟁을 일으킨 북괴의 주역, 김일성과 박헌영.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가 도화선이 된 후 함경북도 길주의 고려학생동맹사건, 평양학생사건, 함흥학생사건, 해주학생사건 등 북한 전 지역에서 김일성의 공산 학정에 항거하는 공산당 타도와 반소 운동이 전개되었다.

서북청년회는 남한사회에 뿌리가 없는 월남민 청년들의 모임으로 지적 수준이 높은 단체였다. 그들이 신의주 학생의거 이후 대거 남한으로 쫓겨 내려왔다는 것은 북한 측 입장에서는 엘리트를 잃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북한의 인재부족 현상이야말로 오늘날 북한사회가 낙후된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서북청년회는 남한의 다른 어느 우익청년단체들보다 뚜렷한 이념과 확고한 행동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며 강령에서 ‘균등사회’의 실현을 내세운 것은 그들이 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자본주의나 보수주의를 맹목적으로 신봉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북한에서 유산계급이었을지 모르지만 남한에서 뿌리 뽑힌 빈민의 신분으로 떨어졌고,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경제적 평등주의를 내세우게 되었을 것이다,

좌익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서북청년회의 좌익 척결활동이 대한민국의 건국에 큰 기여를 했고 건국이 되자 좌익 타도의 역할은 국가가 맡아야 할 일이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서북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은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들로 인하여 군 입대 ‘붐’이 일어났다. 군대는 고향을 찾겠다는 의지가 강한 서북청년들에게 가장 적합한 일터였을 것이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반격작전으로 대규모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키려 했다. 상륙군의 진로를 유도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는 일이 중요했고 그 임무를 서북청년들이 맡게 되었다. KLO부대에 속한 서북청년회 출신 특수임무대원들은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를 전진기지로 삼아 덕적도 팔미도 등지를 샅샅이 탐색 보고했다. 이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지만 영흥도에 남아 있던 서북청년회 출신 KLO 대원 20여명은 불행히도 북한군과 현지 좌익들에 희생되었다.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가 도화선이 된 후 함경북도 길주의 고려학생동맹사건, 평양학생사건, 함흥학생사건, 해주학생사건 등 북한 전 지역에서 공산 학정에 항거하는 공산당 타도와 반소 운동이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과 김일성의 공산주의에 회의를 품고 대거 남하한 청년들이 조직한 서북청년회의의 모체는 신의주 의거의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국가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구국의 역할을 한 신의주 의거의 학생들이 있었고 따라서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40여 년간 단 한 차례도 추모대회를 개최한 바 없고 더욱이 신의주 의거에서 해주학생운동까지 역사교과서에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신의주 시민회 혹은 신의주 학생의거기념회가 주최하여 조촐하게 추모대회를 개최하고 있을 뿐이다.

4.19의거나 4.3 혹은 5.18 등에 비해 역사적 의미가 결코 적지 않은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를 홀대하는 역대 정부의 문제점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추모대회를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당시 희생자 숫자를 23명 혹은 24명으로 간단하게 언급하는 것도 매우 유감일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강제노동 수용소로 끌려간 학생이 과연 200명인지 500명인지도 조사해야 될 일이다.

   
▲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반격작전으로 대규모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키려 했다. 상륙군의 진로를 유도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는 일이 중요했고 그 임무를 서북청년들이 맡게 되었다. 사진은 정부수립 경축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총사령관./사진=연합뉴스

이번 11월 23일 추모대회는 추모 그 자체로 끝나서는 안 된다. 향후 진상조사 위원회를 꾸리고 국가적 기념일로 지정하며 모든 학생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에 역사학계는 진정성을 갖고 참여해야 할 것이며 이 일이 반드시 성공하도록 많은 단체들에게 관심과 후원으로 함께 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필자는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를 상세하게 알고 있는 조동영 선생을 찾아가 면담한 바 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 신의주 학생의거를 주도했던 분이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살아 있는 역사교과서라고 불릴만한 분이지만 2015년 현재 95세의 고령으로 그 분의 소중한 경험을 들어 볼 기회가 많지 않아 보여 애석함을 더했다. 본 단체는 당시 중학생이었고 현재 85세가 되신 네 분의 생존자도 만나보았다. 그분들은 1996년과 1998년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생존자가 제법 많았던 추모식 참가 사진이었다. 그러나 그 사진속의 인물 중 현 생존자는 몇 분 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할 때 진상조사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하고 남아 있는 기록물과 사진 등의 보존 문제도 시급함을 느꼈다. /조형곤 21C미래교육연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