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필벌 없는 관치에 의한 경제평등주의 저성장·양극화 초래
   
▲ 좌승희 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 석좌교수, 미디어펜 회장

저성장·양극화…‘평등의 역설’

오늘날 한국 경제의 과제는 동반 성장, 즉 어떻게 하면 성장을 회복하고 양극화도 완화할 것인지다. 이 과제는 또한 전 세계 선진국들이 부딪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권은 물론 자본주의 경제권도 각각 전자는 사회주의 체제를, 후자는 수정자본주의 체제를 추구하면서 재분배 동반 성장을 추구해 왔다. ‘더불어 사는’ 세상을 추구한 결과 사회주의는 다 몰락했고 자본주의 선진국들도 모두 장기 저성장과 양극화에 직면하고 있다.

한국도 개발연대 30년간은 세계 최고의 동반 성장을 달성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와 함께 균형 있는 선진 경제를 추구해 왔다. 오늘날 한국의 경제는 어떤가. 선진화는 고사하고 저성장·양극화에 직면해 있다.

지난 60여 년을 경제적 평등을 추구해 온 세계가 이제 모두 다 저성장과 양극화, 즉 하향 평준화 속에 심화되는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재분배를 잘하는 것이 동반 성장의 길인 양 주장해 온 것이 민주정치 이념이고 이를 뒷받침해 온 것이 주류 경제학이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 역사를 보면 정치적 자유·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일인일표라는 표퓰리즘성 때문에 거의 모든 경우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평등민주주의로 전락하는 것이 보편적 경향이다./사진=미디어펜

동반 성장은 어떻게 가능해질까. 경제 발전은 ‘경제적 불평등’을 전제로 한다. 시장이란 경제적 성과에 따라 기업이든 개인이든 차별적으로 대접함으로써 모두가 보다 좋은 성과를 지향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장치다. 신상필벌의 압력으로 동기를 부여해 성장의 길로 나서도록 독려하는 장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이를 통해 ‘같아지지는 않지만 모두 발전하는 동반 성장’을 만들어 낸다.

금강산도 식후경…민주주의는 ‘사치재’

만일 국가가 나서 관치에 의해, 즉 재분배에 의해 경제적 평등을 보장한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장은 작동을 멈추고 모두가 동기가 차단된 채 정부만 바라보고 재분배를 요구하게 된다. 사회주의 경제가 경험했듯이 경제성장은 정체되고 극상층의 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해지는 하향 평준화의 길을 걷게 된다. 지난 60여 년간 경제적 평등을 추구해 온 평등민주주의 실험 결과인 저성장과 양극화 또한 이를 증명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정치적 자유·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1인 1표라는 포퓰리즘성 때문에 거의 모든 경우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평등민주주의로 전락하는 것이 보편적 경향이다. 산업혁명 이후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는 경제 발전에 따라 그 수요가 폭발하는 ‘사치재(luxury good)’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또 흥미로운 것은 ‘경제적 평등’ 또한 이와 유사한 사치재로 보인다는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인 셈이다.

보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두 가지 사치재가 결합하기 시작하면 대부분이 재분배 평등민주주의로의 진화를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경제 발전은 바로 ‘모두 같아지지 않는 속성’ 때문에 동반 성장을 막는 경제 평등민주주의 체제를 그 자체 내에서 잉태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향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동반 성장은 친구가 되기 어려워 보인다.

   
▲ 성장과 발전의 동기가 사라진 경제에는 백약이 무효다. 경제·사회 모든 부문에 신상필벌의 동기부여 장치를 살려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에 삼성전자와 같은 기업이 하나가 아니라 5개, 10개가 생겨날 수 있다./사진=미디어펜

따라서 오늘날 전 세계와 한국이 직면한 시대적 과제는 민주주의 체제와 경제 평등 이념을 효과적으로 격리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의 태생적인 동반 성장 메커니즘, 즉 같아지지는 않지만 모두 성장하는 동반 성장을 지속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평등민주주의 체제의 개혁 없이 세계경제는 물론 한국 경제의 동반 성장 회복은 어려워 보인다.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된 정치

정치학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체적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여기서 형식적이란 것은 1인 1표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반면 실체적 민주주의는 경제적 평등을 달성함으로써 부의 불평등이 정치에 주는 영향력을 배제해 모든 사람이 실질적으로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분류는 경제 번영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도외시한 채 오로지 평등이라는 지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소위 정치(학)나 자기들만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정치체제는 그 자체만으로 평가될 수 있는 절대적 가치가 아니다. 정치체제는 경제가 잘돼 국민 생활이 풍족해지고 안정되도록 하기 위한 국가 운영의 수단이다. 그래서 경제학의 본래 명칭인 ‘정치경제학’은 경제적 번영을 정치를 포함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달성할 수 있는 종합예술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실체적 민주주의의 주장은 수단인 정치가 오히려 목적이 되고 목적인 경제가 수단으로 전락되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실체적 민주주의의 추구는 사회민주주의라는 평등민주주의를 가져왔고 궁극적으로 시장의 차별화 기능을 무력화함으로써 지금의 저성장과 양극화를 초래했다.

이제 ‘민주주의냐 독재냐 권위주의냐’도 정치권의 이해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국민들의 관점에서 재정의돼야 한다. 지금의 민주주의와 비민주의의 정의는 정치 시장에서 권력을 얼마나 쉽게 경쟁을 통해 쟁취할 수 있느냐, 다른 말로 권력에 의해 국가 자원을 자의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특권’을 얼마나 쉽게 나눠 가질 수 있느냐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특권을 오래 독점하는 체제는 비민주적, 자주 교대해 특권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체제는 민주적이라고 정의하는 셈이다.

필자의 눈에는 이런 의미에서 민주적이란 말이 정치인들끼리의 담합 체제가 좋다는 뜻으로 들린다.

만일 정치체제의 정의를 정치적 관점이 아니라 국민의 경제적 번영 측면에서 분류한다면 정치체제를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정치와 그렇지 않은 정치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면 동반 성장 친화성 여부가 정치체제 선택의 제일 기준이 돼야 할 것이다.

   
▲ 기업의 성장·발전이 없는 경제의 성장·발전은 없는 법이다. 오늘날 세계적 경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경제들은 모두가 일류 기업을 더 많이 보유한 경제다. 한국경제가 배출한 세계 초일류기업은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차를 비롯, 여러 기업들이 있다./사진=미디어펜

아무리 지고의 민주주의라고 하더라도 그 기능이 경제 발전에 장애가 된다면 이는 개혁의 대상이 돼야 한다. 다소간 절차상 권위주의적이라고 해도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이를 비민주적이라고 배척만 할 일은 아닌 것이다. 더구나 특정 민주주의가 절대적 선일 수도 없다.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있을 수 있고 국가의 목표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하는 민주주의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신상필벌이라는 시장의 차별화 기능을 적극 수용하는 민주정치는 동반 성장 친화적이지만, 역으로 관치에 의해 경제평등주의를 실현하려는 민주주의는 동반 성장의 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정치적 평등은 추구하되 경제적 차이·차등·불평등을 용인할 줄 아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저성장·양극화를 초래하는 재분배 평등의 잣대만을 내건 민주주의는 결코 하느님일 수 없다. /좌승희 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 석좌교수, 미디어펜 회장

(위 글은 좌승희 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 석좌교수가 11월 4일 한국경제매거진, 한경Business 'Issue&Topic'에 기고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