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92)-스토아 철학이 담긴 세네카의 오이디프스
세네카(기원전 4?~65), 『오이디푸스(Oedipus)』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고전의 매력은 시대를 초월하는 생명력에 있다. 특히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과 시사점을 안겨준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다. 나아가 후대의 뛰어난 철학자, 작가가 이전 시대의 고전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해 내는 수많은 문화예술 작품들 역시 고전의 가치를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기원전 5세기에 소포클레스가 쓴 위대한 비극작품 <오이디푸스 왕> 역시 후대의 문학과 예술 분야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로마의 대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세네카가 이런 중요한 소재를 놓칠 리 없다. 세네카는 <오이디푸스>, <아가멤논>, <트로이의 여인들>, <헤라클레스의 광기> 등 9편의 비극작품을 남겼다. 세네카의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 원작을 각색한 작품이다. 세네카는 소포클레스가 구성한 주제와 형식을 참조하면서도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재해석해냈다.

바로 수사학적 낭독법과 자신의 스토아 철학을 결합시키는 방식이었다. 여기서 ‘수사학적’이란 감정 표현을 위한 말을 길고도 정연하게 꾸미고 다듬었다는 의미다. 그러다 보니 배우들의 대사가 상당히 길어졌다. 코러스 또한 서술적 내용으로 그 분량이 상당이 많다. 이로 인해 실제 무대에서 배우가 대사나 코러스로 소화하기가 무척 어려워 보인다. 오히려 낭독하는 것이 실효적인 것 같아 보일 정도다.

일부 학자들이 <오이디푸스> 등 세네카의 비극작품들이 공연용이 아니라 낭송용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배경이다. 당시 극장의 관례나 공연방식 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세네카의 비극작품은 긴 대사가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어 법정 연설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웅변적 연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탁월한 웅변가이자 철학자였던 세네카의 특장이 그의 문학작품에 배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소포클레스의 원작 <오이디푸스>와 다른 부분을 살펴보자.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의 과거 행적과 관련한 사연들을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조금씩 천천히 보여주면서 극적 긴장감을 높여간다. 이에 반해 세네카는 극의 제1막을 시작하면서부터 오이디푸스 자신의 입으로, 긴 대사를 통해 부친 살해와 모친과의 결혼이라는 비극적 예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폴뤼보스 왕의 나라 코린토스에서 도망쳐 테베로 온 사연을 털어놓는다.

이렇게 도입부에서 작품의 배경 스토리를 명확히 설명하고 나서 극을 전개함으로써 청중의 명확한 이해를 돕는다. 하지만 청중 스스로 단계적인 추리와 상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가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에우리피데스가 자신의 비극작품의 프롤로그에서 서사를 통해 비극의 진행 방향을 미리 관객에게 보장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반감시켰던 예와 비슷한 구조다.

세네카의 비극 작품은 극의 전개 방식에서 과거 그리스 연극이 비윤리적 장면, 참혹한 장면들을 무대 뒤에서 처리해내던 것과는 달리, 청중이 보는 앞에서 그 모든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극을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을 찾기 위해 새점(鳥占)과 황소 제물로 점을 치는 장면에서 죽은 제물의 토막 쳐진 육신과 오장육부의 변형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부분은 끔찍하고 선정적이다. 당연히 무대에서 그 정밀한 해부학적 묘사를 실연하기도 어렵다.

이런 부분은 소포클레스 원작에는 전혀 없었던 부분이다. 이오카스테가 무대에서 배를 가르고 자살하는 장면도 같은 유형이다. 그리스 연극에서 자살이나 살인 등 잔인한 장면은 관객이 보지 못하는 무대 안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에서도 아가멤논 왕이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욕실에서 잔혹하게 살해되는 장면이나,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이는 복수의 장면 역시 장면이 아니라 코러스를 통해 인지할 수 있게 했었다.

이렇게 잔인한 장면을 암시적으로 처리했던 고대 그리스 연극의 전통적 표현방식과 달리, 세네카가 관객에게 직접 잔인한 장면들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 이유는 뭘까? 비극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도록 함으로서 또 다른 극단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세네카의 사실주의적 정밀한 표현방식은 실제 무대에서 공연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또 이는 당대의 관객들에게도 매우 낯선 방식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좀 더 자극적인 표현을 필요로 하던 르네상스시대의 극작가들에게 세네카의 비극작품이 그리스 비극 작가들의 작품보다 오히려 더 많이 차용되었던 듯싶다.

물론 세네카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원작의 큰 흐름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비극적 상황을 알게 된 이후의 오이디푸스의 행위를 표현하는 결말 부분에서는 소포클레스와 전혀 다른 방식과 내용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여기서 세네카의 작품 해석의 독창성과 그의 사생관(死生觀), 그리고 스토아 철학의 관념이 드러난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부친을 죽이고 모친과 결혼한 사실을 알고 난 후, 아내이자 어머니였던 이오카스테의 주검 앞에서 “내가 알고자 했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앞으로 어둠 속에 있을 지어다”라고 울부짖으며, 자신의 두 눈을 찌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자신의 죄과의 책임을 두 눈에 물은 것이다.

   
▲ <신에게 자식들을 부탁하는 눈 먼 오이디푸스>, Benigne Gagneraux, 1784년 작.
오이디푸스는 죽음을 택하는 대신에 자신에 대한 저주를 두 눈에 대한 자해로 표현했다. 사실 이 상황에서 오이디푸스가 자살을 택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두 눈에 대한 형벌로 대신한 이유를 청중이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반면에 세네카는 오이디푸스가 자살을 택하지 않고 두 눈을 멀게 한 이유를 독백으로 분명하게 밝히게 한다. 세네카는 오이디푸스가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참혹한 비극적 과오를 범했던 만큼 자살과 같은 방식은 오히려 자신의 고통을 단번에 끝내려는 비겁한 방식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원작에 없던 각색이 이를 잘 말해준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찌른 행위가 자신의 씻을 수 없는 죄에 대한 '느리고 고통스런 형벌'의 일환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나아가 “죽자, 그러나 죽지 말자”에서 그가 죽음과 삶의 의지가 교차하는 비극적 아이러니에 빠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단 한 번에 끝날 수 있는 것이 천천히 끝나게 하자.
아주 길고 느린 죽음을!
죽은 자들과 섞이지도 않고, 산 자들과 함께 하지도 않은 채,
혼자서 떠돌 수 있는 방법을!
죽자, 그러나 죽지 말자!
내 영혼아 너는 각오가 되었느냐?”

세네카가 소포클레스의 원작과 결정적으로 다르게 묘사한 부분이 또 있다. 이 대목이 이 비극작품의 클라이막스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신분의 비밀, 그리고 부친살해와 모친과의 결혼의 비극을 모두 알게 됨과 동시에,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가 먼저 자살하고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를 안고 울부짖는 상황을 그렸다. 이오카스테가 어떻게 자신과 결혼하여 네 남매를 낳은 아들이자 남편인 오이디푸스를 두 눈으로 견디어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세네카는 더 냉혹하다. 이 모자(母子)가 서로의 잔혹한 운명을 직접 맞닥뜨려 인지하게 함으로써 두 사람의 심리적 충격과 고통을 극단으로 치닫게 한다. 나아가 관객과 독자로 하여금 이 상황의 관조를 외면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다.

세네카는 거꾸로 오이디푸스가 먼저 자신의 눈을 찔러 절규하게 하면서, 두 눈을 빼어버린 처참한 모습을 어제까지 아내이자, 자신이 태어남과 동시에 어머니였던 이오카스테가 목격하게 하고 비극적 대사까지 나누게 만들었다. 세네카는 잔인하리만큼 집요하게 두 끔찍한 운명을 등장인물 간에, 그리고 청중 모두가 두 눈과 귀로 확인하게 만든 것이다. 정말 소름이 돋는 장면이다.

이오카스테:
“내가 당신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아들? 고개를 저으시는군요.
분명, 당신은 내 아들입니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부끄러우신가요?
말해 보거라. 내 아들아. 아무 말 않고 싶니?
왜 너의 텅 빈 눈을 치우는 거냐?”

오이디푸스:
“내게 이 어둠을 거둬들이고 다시 보게 하려는 이는 누구인가?
내 어머니의 목소리이구나. 내 어머니!
아무리 애써도 소용이 없구나.
우리 두 사람은 결코 다시 만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저주받았습니다.”

이오카스테:
“운명을 탓하거라.
어느 누구도 운명이 한 짓 때문에 비난받지는 않는다.”

이오카스테는 이 비극적 운명으로 빚어진 모든 일에 대해 오이디푸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 그녀는 오이디푸스의 아내 이전에 어머니로서의 모정으로 이 비극적 상황을 끌어안았다. 이오카스테의 이 숭고한 해법은 외면할 수 없는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서있던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다시 새로운 삶의 의지를 갖도록 북돋워주었던 것이다.

세네카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패륜적 죄를 범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굴레를 넘어서, 테베를 휩쓴 역병을 자신의 희생과 함께 모두 거두어가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것을 부각시킨다. 결국 테베의 역병을 물리치고 백성의 삶을 구제하기 위해 오이디푸스가 열정적으로 주도한 라이오스 왕의 해원(解寃)의 과정은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밝혀내는 부메랑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혹한 운명에 맞서 역병의 퇴치라는 왕으로서의 마지막 소임을 다하려던 오이디푸스의 인고의 노력에서 인간의 숭고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제 떨리는 발걸음으로 네 어둠의 길을 찾아가거라.
두 손을 휘저으며, 칠흑 같은 밤의 세계를 지나 가거라.
달리거라, 날아가거라! 하지만 멈추어라.
네 어미에게 걸려 그 위에 넘어지지 않도록...
……
내가 사라지면, 이 곳엔 더 밝은 하늘이 있을 것이다.
……
내가 너희로부터 사라질 때,
나는 이 땅을 집어삼킨 모든 역병을 함께 데려갈 것이다.
오너라. 가혹한 운명의 여신들아.”

세네카의 <오이디푸스>는 당대에는 소포클레스의 작품보다 덜 주목받았다. 하지만 우리가 차마 상정하기 힘겨운 가혹한 운명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비극을 딛고 다시 일어서려는 인간의 의지를 북돋우고 있다. 이는 공동체를 위한 이성적 삶을 중시하던 세네카의 스토아철학적 관념이 투영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세네카의 극적 기법은 셰익스피어의 극작품들이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또 연극사 속에서 가장 화려한 융성기를 맞았던 르네상스 극작가들이 그리스 비극작가들보다도 오히려 세네카에게 매료되었던 이유도 세네카 비극작품의 또 다른 탁월성을 웅변해 준다. 세네카의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의 그것과는 또 다른 창작품인 셈이다. 이 작품과 함께 동일한 설화를 바탕으로 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작품 <오이디푸스 왕>(연재 46회)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연재 91회)를 함께 읽고 작품의 전개 내용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오이디푸스』, 세네카 지음, 이현우 옮김, 동인(2007). 1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