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우 기자

이른바 ‘수저론’을 가지고 요즘 말들이 많다. 다이아몬드수저부터 흙수저까지를 디테일하게 구분하는 유형부터 부모를 욕되게 해선 안 된다고 정색하는 유형까지 아주 다양하다.

관건은 개인의 노력으로 자신의 인생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느냐다. 계층 이동이 얼마나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느냐가 핵심이다. 빈부격차가 크더라도 개천에서 용이 여러 마리 날아오르는 사회에는 희망이 있다. 90년대에만 해도 사람들은 김영배의 ‘남자답게 사는 법’, 벅의 ‘맨발의 청춘’ 같은 노래를 부르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꿈을 꿨다.

현재의 한국은 어떤가. 수저의 색깔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발상이 팽배한 이 현실은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개천 용’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현실을 부정하고 ‘노력(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비웃음을 당할 뿐이다. 노력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지구는 돈다는 말을 진지하게 하고 있는 사람을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역동성이 사라진 사회에서 노력이라는 돛단배는 ‘운’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지는 경우가 잦다. 엄연한 현실이 이러한데도 노력이란 두 글자를 주문처럼 읊조리고 있는 사람들은 다단계 업체들의 행태를 한번쯤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서자희가(글)/데몬제이(그림) 작가의 ‘던전 오브 다단계’라는 웹툰에는 다단계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체험과 증언이 다수 포함돼 있어 좋은 공부가 된다.

주 7일 출근에 밤낮도 없이 새로운 회원 영입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다단계 회원들의 성공공식은 이미 나와 있다. “열심히 노력해서 2명만 데려오자.” 부자가 될 준비가 되어있는 2명만 데려오면 그들이 새로운 2명을, 또 새로운 2명을 데려와 결국 나는 앉아서도 큰돈을 만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발상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타당하다. 하지만 현실은? 아무리 노력해도 다단계로 돈을 벌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세상엔 철을 먹는 사람도 있고 100미터를 9초에 뛰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다.

   
▲ 웹툰 '던전 오브 다단계'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처음엔 선량한 의도로 시작한다는 점에 있어서도 다단계에는 리얼한 구석이 있다. 왕래가 뜸했던 친구에게 얼굴 한 번 보자는 연락이 왔을 때 거절하지 못하는 건 그 사람이 선량해서다. 그 친구가 요즘 일하는 사무실을 보여주겠다며 얘길 건넬 때 거절하지 못하는 건 그 사람이 선량해서다. 알고 보니 다단계였던 그 업체의 사무실에서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1박 2일을 세뇌 당하면서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 사람이 선량해서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 또한 그렇지 않은가. 이마에 ‘나쁜 놈’이라고 붙이고 다니는 악인은 한 명도 없다. (반면 성경구절을 외고 다니는 악인은 매우 많다.) 착한 사람들끼리 만나서 연출되는 제로섬의 불꽃놀이가 바로 다단계의 실체이고 또 동시에 우리 인생의 씁쓸한 단면인 것이다.

생활 웹툰과 개그 웹툰이 대세를 점한 이 시점에 ‘던전 오브 다단계’의 방식은 어쩌면 지나치게 단조로운지도 모른다. 전혀 드라마틱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이 웹툰은 그저 합법의 이름으로 수많은 청춘들의 돈과 시간과 열정을 갉아먹는 다단계 업체들의 전횡과 함정을 있는 그대로 고발하고 있을 따름이다. (어쩌면 업체들의 행태 자체가 너무 웃겨서 별다른 개그가 필요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근본적인 메커니즘에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덧입혀지는 노력이란 통째로 시간낭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씁쓸한 사실을 이 웹툰은 말하고 있다. 부제는 ‘노력에 관한 우화’ 정도로 해두면 어떨까. 노력은 가끔 우리를 배신하기도 한다. 슬프지만 진실이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