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93)-가정과 사유재산을 질시한 루소의 불평등 철학
루소(1712~1778), 『인간불평등기원론』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회적 담론과 지성의 성찰은 그 시대의 누적된 문제와 욕구, 그리고 필요를 대변해 낸다. 인간은 평등한가, 불평등한가, 불평등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고, 언제 어떤 시대적 양태로부터 생겨났을까?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던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또한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자신의 독특한 통찰을 드러냈다. 사유재산권과 국가 체제에 대한 그의 곱지 않은 시각은 17~18세기 절대왕정을 구가하면서 상류층과 하류층의 간극의 확대로 곪아가던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 구체제)에 대한 파열음의 전조를 대변했다.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군주 위에 ‘법의 지배(Rule of Law)’의 원칙을 세운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래, 절대왕정이 더욱 공고해져 왕족, 귀족, 승려 등 지배계층의 사치스런 생활이 지속되었다. 더구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영국과의 전쟁의 패배로 백성들의 삶은 곤궁하고 피폐해진 상태였다. 이렇듯 불평등한 현실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던 시대였던 만큼 백성의 불만을 해소할 새로운 사상의 출현에 대한 기대가 싹트고 있지 않았을까.

루소는 이런 누적된 사회적 모순과 자신의 빈한했던 삶의 체험 속에서 인간의 본성과 사회 작동 원리를 발굴해 냈다. 바로 사람사이에 ‘불평등’을 만드는 근본적 원인과 전개양식을 통찰해 낸 것이다. 그는 ‘불평등’의 요소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 ‘자연적·신체적 불평등’과 ‘사회적·정치적 불평등’이다. 하지만 ‘불평등’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각기 온도가 다르다.

그는 연령, 건강, 체력의 차이, 정신 또는 영혼의 질적 차이가 만들어내는 자연적·신체적 불평등에 대해선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반면 ‘사회적·정치적 불평등’의 기원을 냉정하게 추적한다. 루소는 생존의 본성에 충실한 원시인의 생활과 습성을 설명하면서, 자연상태의 인간에게는 타인을 제어하고자하는 욕망이나 적대적 행위도 없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모든 동물과 유사한 본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능력과 이성에 근거해 서로 협력한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연민’의 감정은 인간과 동물을 확연하게 구분 짓게 해주는 요소다. 인간의 연민의 정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정의의 황금률 대신, “타인의 불행을 되도록 적게 하여 너의 행복을 이룩하라”는 선한 원칙을 마음속에 품게 한다. 루소의 자연상태는 연민의 정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 기초한다. 이러한 루소의 인식은 자연상태를 ‘만인과 만인의 투쟁’으로 본 홉스의 관점과 예리하게 대립한다.

루소는, 이런 평화로운 원초적 인간형에 비극이 시작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자기 개선능력(perfectibilite)’ 때문이라고 본다. 자연의 건강한 상태에서 동물적 삶에 의존하던 인간은 이성과 사색을 통해 자기 개선능력을 발휘하면서 복잡한 욕구를 만들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욕망의 인식은 결핍의 자각으로 환원된다. 이에 따라 욕구와 결핍의 충족을 위한 여러 악덕이 생겨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 장 자크 루소 초상
결국 루소는 자연상태에서 찾을 수 없던 불평등의 기원과 진보를 인간 정신과 기술의 연속적인 발전 과정에서 찾으려 했다. 그 분기(分岐)를 이루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사유(私有)’의 관념이다. 자기 생존과 보존을 위한 배려에서 시작된 인간의 감정은 다른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자각시켜 동물과의 투쟁에서 우월성을 확보한다. 나아가 이성(異性)에 대해 인식하고,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협동의 이익을 자각하면서 가족을 형성하여 정착하게 된다. 루소는 남편과 아내, 자식을 공통된 주거에 결합하게 한 상황을 ‘사유재산’을 도입하게 한 최초의 혁명으로 본다.

루소에게 ‘사유제’의 관념은 인간의 불행과 불평등의 뿌리로 인식된다. 사유의 도입으로 노동이 필요해지고, ‘한 사람을 위해 두 사람분의 저축을 갖는 일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되면서 온순하고 자연적인 연민의 정이 풍부하던 원시인의 덕목과 평등한 관계는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루소의 이런 진단은 맞는 것일까? 가정이 사유 관념의 산물임에는 틀림없다. 가정의 형성은 야만적 동물의 시대에서 인간적 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즉 가정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던 이성(異性)들이 서로 특정한 상대의 짝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산물이다.

사랑하는 특별한 남녀의 결합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야만적 짝짓기의 종결이다. 이는 보다 안온한 행복을 오래도록 누리고 싶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이것이 불온한 탐욕일까. 사랑의 산물인 자식을 낳아 가정을 번성시키려는 욕망은 인간의 자연적 욕구가 아닐까.

루소의 말대로 가정과 사유재산이 진정 불행과 불평등의 뿌리일까? 루소의 진단처럼 자연상태에서 시현되었던 인간에게 내재한 연민의 정이 가정을 이루고 사유재산을 보유하게 되면서 사라지게 되었을까? 오히려 진보된 사회일수록 자선을 통해 연민과 같은 인간의 도덕감정이 더욱 풍부하게 발현되고 있지 않은가.

루소가 불평등의 기원으로 든 두 번째 요소는 야금(冶金)과 농업의 발명이 만들어낸 기술이다. 루소는 쇠를 제련하여 농기구를 만들고 농업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농업혁명을 불평등을 만들어낸 주범으로 지목했다. 농업혁명으로 인해 생긴 재산의 과다 여부에 따라 강자와 약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빈곤한 자와 부유한 자 사이의 불평등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해 서로의 권리와 의무를 제한하는 규칙으로서 사회와 법률이 자연스럽게 요구되었다. 특히 자연법을 대체한 시민법의 준수를 약속해 줄 보증인으로서 보다 강력한 공동체가 정치체(국가)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루소는 시민들의 재산과 이익을 지켜 주기로 암묵적 계약을 한 정치체가 오히려 합법적 권력으로서 불평등을 조장하고,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공고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결국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를 만들어낸 인간이 스스로 불평등의 폐해를 확대하고 영속시키게 되었다는 의미다. 루소는 자기애와 연민을 가진 순수했던 인간 본성의 타락과, 평등을 담보해내야 할 정치체제가 전제화 됨으로써 불평등을 만드는 사회적 구조로 고착된 점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루소가 전개한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오로지 원시자연인의 상태에 대한 낭만적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명과 진보에 대해 신뢰하던 당대의 계몽사상가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볼테르는 루소의 주장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거지의 철학”이라고 반박했다. 심지어 루소의 글을 읽다 보면 "네 발로 걷고 싶어진다"고 조롱했다.

사실 루소의 사유에 대해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이 적지 않다. 특히 ‘자연적·신체적 불평등’이 ‘사회적·정치적 불평등’의 선행요인이 될 수 있음에도, 이 둘의 연계가 만들어내는 일정부분의 필연적 불평등을 도외시한 점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불평등의 요인을 발굴하면서 인간의 마음을 격동시켰던 데 반해 불평등을 완화할 현실적 대안에 대한 고민을 생략했다는 점도 결정적 한계다.

존 로크는 ‘사적 소유’를 사회계약 이전에 자연법적 질서에 따라 성립된 자연적 제도로 이해했다. 반면 루소는 ‘사적 소유’를 자연법적 질서를 해체시킨 주범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도발적이다. 더구나 루소가 상정한 자연상태에서의 평등이 현실적으로 성립 가능했을 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자연상태에서 강자에 의한 소유와 지배의 확대로부터 약자들이 생존권을 담보하기 위해 무리를 형성하고 서로를 규율하는 규칙을 만들어낸 것을 인간 문명의 진보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사유’의 개념을 잉태시킨 ‘가족’에 대한 루소의 곱지 않은 시선과, 당시 프랑스 절대왕정체제를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전제정치로 본 루소의 인식은 결과적으로 자유·평등·박애의 가치를 내건 프랑스 혁명(1789년)을 부르는 또 다른 전주곡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루소의 불평등에 대한 인식은 불평등한 사회 현실에 대해 숙고하게 해 준다. 그러나 사유 관념에 대한 루소의 부정적 인식은 냉정히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소유의 관념은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자유로운 선택과 노력에 의해 성취된 소유는 인간 행복의 원천이 된다. ‘나의 것’이 인정되지 않는 사회, ‘나의 것’을 보장해 주지 않는 국가체제에서 개인의 행복은 결코 담보될 수 없다. 이런 자유로운 선택이 만들어낸 불평등은 평등 수준을 점차 높여나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자유를 박탈하고 평등을 추구하여 만들어낸 구조적 불평등은 개선 가능성이 절망적이다. 사회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역사적 오류가 이를 웅변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 본성의 발현과정에서 나온 소유의 관념을 생래적으로 불평등의 근원이 되는 것처럼 과장되게 인식한 것은 분명 루소의 오류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저작에 강하게 깔린 루소의 평등사상은 그가 원하든 원치 않았던지 간에, 프롤레타리아 계급 혁명을 통해 계급과 국가체제를 타파하려던 사회주의 사상가들에게 변형된 영감을 불어넣었다.

원래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은 1753년 디죵 아카데미 논문 현상 공모에 제출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공모에서 낙선했다. 왜 낙선했을까. 루소가 던진 ‘불평등’에 대한 화두는 당대 암울한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겠지만, 인간의 본성과 인류 사회의 진화의 동력에 대한 그의 인식과 진단은 진실에서 크게 빗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루소의 인식대로 인간이 문명사회를 버리고 자연상태로 돌아가면 평등해질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어떠한 소유를 보장해주지 않는, 즉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소유를 담보해주지 않는 완전한 평등의 시대로 회귀하면 인간은 더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불평등’은 어느 시대에나 흥미로운 주제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평등하다.' 이 냉혹한 현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다양한 삶의 태도와 방식이 나올 것 같다. 불평등의 현상을 인식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평등을 시정하는 과정에서 개개인에게 얼마만큼 선택의 자유와 자신의 사유재산을 지켜내는 일을 보장해 줄 있느냐가 아닐까. 불평등을 완화하는 최선의 해법은 기회의 평등을 확대하는 일이 아닐까.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인간불평등기원론』, 장 자크 루소 저, 이영찬 옮김, 계명대학교출판부(2011), 1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