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소비욕구·소유욕망과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구별 못해

반기업 정서의 근원 1 : 사회 · 심리적 접근 `시뮬라시옹과 한국사회`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La societe de consommation),
시뮬라시옹의 필터링으로 해석해보는 反기업정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산업시대와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에서 촉발된 대량생산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와 속도를 가진 공급자인 기업가들에 의해 혁명적으로 탄생한 생산과 소비의 시대를 맞이한다. 이 시기는 “냉전의 시작”이라는 시대적 절박함이 낳은 자유주의 진영이 만들어낸 긍정적인 결과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20세기 중반의 커다란 경제적 변화는 더 이상 생필품으로의 생산과 소비만이 아닌 인간이 지닌 개별적 기호로서의 소비, 즉 가격의 높낮이와 실용적 가치와도 별로 관계없는 “기호로서의 소비”가 “대중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 사진은 장 보드리야르 (1929 ~ 2007). 보드리야르의 이론은 1970년대 서구사회를 특정 짓는 상징체계로서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생산, 노동, 교환가치로서의 문제를 소비의 문제로 전환시키고 현대사회의 특징을 소비사회로 규정하는데 비롯한다. 보드리야르는 자본주의가 낳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물들이 인간에게 주는 새로운 의미에 주목한 대표적 학자이다./사진=자유경제원 '세상일침' 게시판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현대사회에 있어 사회관계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적 생산 정신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닌 소비의 이념에 의해 그려진다고 밝힌다. 그는 문화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사이에 맑시즘적인 대립관계를 서술하면서 문화적인 것들이 상품화로 변화하고,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것들은 상징화로 바뀌고 있음을 주장한다. 보드리야르에게 소비란 현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실용성보다는 문화적 기호로서의 가치, 즉 필수품이 아닌 욕망을 자극하는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보드리야르의 이념적 지향성을 떠나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의 등식을 넣어 反기업정서를 설명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시뮬라시옹(Simulation)과 시뮬라크르(Simulacre) 그리고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보드리야르의 핵심 이론은 시뮬라크르는 본래 캐나다의 미디어학자 「마샬 맥루한」이 사용했던 등식을 그가 예술과 대중문화의 담론 속에 끌어들여 극대화한 이론이다.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는 “모방과 재현”과는 다르게, 시뮬라크르는 원래 대상 자체가 없는 이미지로서 그 현실을 대신하고 그 이미지에 지배받는다는 이론이다.

즉 광고의 예를 들어보면 메스미디어 자체의 메시지 생산은 광고의 경우에서 보이는 것처럼 기호가 현실에서 독립하여 자율화 된다. 이러한 현상을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simulation) 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에 의해 창출된 것을 시뮬라크르(simulacre)라고 정의했다. 즉 시뮬라시옹이란 현실의 모사도 모방도 아닌 실체도 현실성도 없는 모델에 의해 상정하는 것이다.

그가 정의한 복제=시뮬라시옹은 기호화된 실재에 관한 극단적인 양상으로 무언가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현실보다 시뮬라시옹으로부터 현실이 만들어지는 것을 하이퍼리얼리즘 이라고 표현한다.

시뮬라시옹과 “헬조선” 심리에 깔린 공급자 카르텔에 대한 공포와 증오

소비문화는 현대 자본주의의 사회 · 경제적 논리를 이해하는 주요 핵심이다. 소비행위는 경제의 자연적인 현상이며 그 구조 안에는 당연히 재화를 생산하는 공급자와 그것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있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현대인들의 소비과정을 자유주의적 고전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미 존재해 있는 욕구나 다른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생물학에 근거한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으로만 판단하지 않는 대신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했는데, 소비는 구매자가 자신이 구매한 물건을 타인에게 검증받으므로 자신의 “정체성 의식”을 창조하고 유지하려는 시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과정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보드리야르는 자유주의 학자들의 이론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하나의 현상으로써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 시뮬라시옹 + 시뮬라크르 = 하이퍼 리얼리즘, 시뮬라시옹 - 시뮬라크르 = 하이퍼 리얼리즘. 이 사진에 주목해보자 누군가 잡지책을 들고 뒤의 여인에게 장난을 친다. 잡지책의 모델과 뒤의 여인은 전혀 다른 타인이지만 비슷한 프레임을 두고 겹쳐놓으면 미묘하게 닮았다. 그러나 같은 인물이나, 매개는 분명히 아니다./사진=자유경제원 '세상일침' 게시판

 

   
▲ 사진은 헬조선 페이지의 배너. 19세기말 동학혁명에서나 등장했던 구호가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죽창”과 “평등”의 뜻이 자신의 소비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는다면 당장에라도 저렇게 응징하겠다는 의미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사진=자유경제원 '세상일침' 게시판

우리의 주변에도 대형유통업체 혹은 고급백화점에서 소비를 하면서 혹은 자신의 현실적 상황에 대해 유독 신경질적인 반응을 하는 군상들을 접할 수 있다. 여러 차례 회자되고 사회적 지탄을 받은 甲의 횡포만이 아닌 헬조선 이라고 규정되는 지금 세대들의 사회를 규정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일탈에는 분명 건강치 못한 자아가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소비의 주체를 “개인의 책임”이 아닌, “기호의 주체”로 인식해버린 한국사회

포스트 모더니티로 통칭되는 21세기 오늘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의 궁극적 결정요인으로 당연시 되는 욕망과 욕구까지도 영상매체를 타고 우리의 의식 깊은 곳까지 침투하는 기호의 자극에 의하여 좌우된다. 자본주의는 이미 생산 위주에서 소비 위주의 체제로 변모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계층적 · 신분적 차이를 표시하기 위한 상징으로 소비되는 구조가 불가피하게 존재한다. 명품이라고 인식되는 서구사회의 Designer Goods 들이 그것이다. 이 이면에는 소비에 익숙한, 소비로 인해 자신을 검증받으려는 시뮬라시옹의 세계에 빠져 자아를 완성하지 못한 인격이 포함된다. 공급자가 제공하는 유통업체와 백화점의 세련되고 화려한 물건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이 깔려있다.

   
▲ 사진은 바코드 안에서 절규하는 자아. 현대인에게 있는 강박증에 가까운 스트레스 원인은 “소비의 심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욕구극복의 한계 때문이고 문제해결의 궁극적 해답 역시 자신의 지적수준에 있을 것이다./사진=자유경제원 '세상일침' 게시판

보드리야르가 말한 “기호의 소비”에 걸맞은 수많은 서유럽의 문화적 상품들은 중세의 길드제도에 의한 생산방식에 그 역사적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경희대 경제학과 안재욱 교수가 저서와 칼럼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였듯 당시의 길드제도는 생산자들에게 생산, 판매, 거래에 대한 규제권한을 부여한 것처럼 길드에 의한 생산품은 농민계층과 경제력이 부족한 일반인들을 위한 재화가 아니었다.

길드에 의해 생산되는 재화들은 갑옷, 검, 말의 안장, 말등자, 복식, 화장도구와 같은 일상에서 실용적으로 쓰이지만 더불어 생산력을 극대화함으로써 제품의 질을 높임과 동시에 기호로서의 디자인이 세련되게 입혀진다. 아마도 길드의 생산품을 소비할 수 있던 계층이라도 실용적 사용보다 “소유”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경제와 산업혁명을 거치며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므로 생산의 결과물인 재화는 계급에 상관없이 경제적 사정에 따라 그것을 소비할 수 가있고, 길드의 부정적인 측면은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날 유럽의 문화상품인 “기호의 소비”를 대변하는 생산품이 되었다.

   
▲ 사진은 17세기 스위스의 시계제조 길드(Guild). 시계와 같은 정밀공업, 디자인을 극대화한 피혁제품 같은 길드의 생산재화는, 설비와 자본보다 숙련된 인적자본이 산업의 중심이었던 만큼 그 질적인 우수함은 충분히 검증되어 있었고, 판매대상은 일반대중이 아닌 귀족계층이었다. 물론 재품의 우수함을 검증받은 만큼 공정가격(Just Price)은 없었을 것이다. 시장 상황에 따라 “부르는 게 값” 이었고 귀족계층은 그것을 소비했을 뿐이다./사진=자유경제원 '세상일침' 게시판

“기호의 소비”는 본인이 만들어낸 시뮬라시옹 “기업”과 “물신숭배”가 공격대상은 아니다

문제는 지나친 “기호의 소비”를 탐닉하는 자아가 가져오는 부정적인 측면들이다. 기호의 소비에서 그 개인이 갖춰야 할 경제력, 경제력의 원천인 사회활동과 자본축적의 논리는 배제되어 버린다. 거기에 세련되고 화려한 공급자의 구성원이 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해 마지않는 인격이라면 경제적 부담감보다 그것을 공급하는 구성원에 대한 음성적인 카르텔이 존재한다는 시뮬라크르를 만들어내는 것도 나쁜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의 그 시뮬라크르는 말 그대로 시뮬라크르일 뿐이다. 그 카르텔의 도그마를 극복하지 못 하는 인격이라면 공급자들이야말로 소비자들을 위해 더 화려하고 세련된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소비자의 소비를 이끌어낸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교환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을 뿐이다. 소비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극복하기 힘든 부분이 타인과 자신의 비교결과물일 것이다. 앞서 이러한 한계점을 개인의 지적수준으로 정의 했으나 심리적으로 극복하기 힘든 부분이라는 것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현재 대한민국은 그 공격의 방향이 묘한 곳으로 흐른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는 자신의 2007년도 저서 “사치의 나라 럭셔리 코리아”에서 한국의 소비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여기서 김난도 교수 개인의 문제제기를 비판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글들의 목차를 보면, 1부 사치의 소비심리학, 2부 사치 소비의 유형, 3부 사치 권하는 사회, 결론에서는 물신숭배에 열을 올리는 기업과 정부 그리고 소비자의 희생을 요구했던 경제성장으로 결론을 맺으며 그 공격의 대상을 노골적으로 反기업정서로 향하게 만든다. 본인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이 저서를 보고 쏟아져 나온 기사들만 봐도 표적은 기업들의 명품마케팅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 의도는 짐작할 만하다.

앞서 필자가 개인의 지적수준을 언급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사회가 가진 소비의 문제는 사치를 조장하는 기업이 아닌 “기호의 소비”와 “개인의 책임”을 구별 못하는 본인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길드제도에 의해 탄생한 “기호의 사치”는 본인이 지녀야할 경제적 능력과 메스미디어에 의해 형성된 시뮬라시옹을 구별 못하는 개인의 책임을 결코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 인간이 가진 소비욕구와 소유욕망은 그 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과 같은 공급자의 자연적인 생리는 이윤추구를 통한 자본의 축적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인류문명은 많은 국가가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고, 대량생산의 시대로 넘어오면서부터 계급에 상관없는 소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워졌다. 이제 문제는 자기 자신의 시뮬라시옹에 의해 만들어진 시뮬라크르를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분출할지 말지의 고민이 존재할 것이다.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

(이 글은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가 자유경제원 홈페이지 ‘세상일침’ 게시판에 기고한 글입니다. 자유경제원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