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우 기자

(이 글에는 ‘내부자들’과 ‘검은 사제들’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525만과 523만. 현재까지 ‘내부자들’과 ‘검은 사제들’을 관람한 사람들의 숫자다. 두 숫자를 합치면 ‘트렌드의 기준’인 1000만이 된다. 한국영화의 흥행 성적이 부진하다는 최근의 분석이 무색하게도 쌍끌이 흥행을 하고 있지만 두 영화의 속성은 전혀 다르다는 점이 흥미롭다.

‘검은 사제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세계를 정면으로 다룬다. 귀신 들린 아이(박소담)를 쫓기 위한 구마(驅魔) 의식은 아이의 부모는 물론 가톨릭 교구에서조차 그 신뢰성을 의심받는다.

“참 사람들이 말이에요. 이중적이에요. 성탄절엔 아기 예수 탄생을 축복하면서, 이런 얘기만 하면 이성이니 논리니 따져들기만 하고.” 너무 오랫동안 생각해보지 않은 이야기를 진지한 자세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검은 사제들’의 매력이다.

반면 ‘내부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언론, 검찰, 조폭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화살표들이 공격과 수비를 반복하며 끝없는 게임을 펼친다.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있기는 한가?”라고 말하는 극중 안상구(이병헌)의 대사는 이 영화가 철저히 3차원의 이야기만을 다루고 있음을 드러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은 바보거나 이상주의자다.

   
▲ 영화 '내부자들'

두 영화의 결말 또한 자못 대조적이다. ‘검은 사제들’은 구마 의식의 실체를 의심하던 최부제(강동원)가 자신에게 부여된 숙명을 성공적으로 마감하는 일종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반면 ‘내부자들’의 마지막 장면은 훈훈한 분위기이긴 하지만 실상을 놓고 보면 결코 해피엔딩은 아니다.

족보도 ‘빽’도 없는 주인공 두 사람(조승우/이병헌)에게 ‘인생역전 같은 건 없다’는 대전제는 결말로 가도 바뀌지 않는다. 정의는 없다는 식의 ‘헬조선’류 세계관 또한 그대로 유지된다. 오히려 두 남자의 끈끈한 우정은 먼 훗날 새로운 커넥션으로 진화할 뿐이라는 느낌마저 준다.

이런 식의 ‘현실적인’ 결말은 어느 틈엔가 충무로의 대세를 점해버렸다. ‘내부자들’ 이전에 ‘부당거래’가 있었고 ‘범죄와의 전쟁’이 있었으며 ‘신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정의는커녕 배신과 복수만이 승리하는 결말의 연속이다. 세상은 썩었다는 사실을 보다 멋지게 표현하는 쪽이 흥행하는 게 최근의 경향이다.

   
▲ 영화 '검은 사제들'

이와 같은 영화들이 계속적으로 제작되는 일련의 경향은 한국 사회가 니힐리즘(nihilism), 그러니까 허무주의의 영역으로 빠르게 전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생은 부모에 의해 결정된다는 수저론, 한국 땅은 뿌리부터 열매까지 전부 썩었다는 헬조선론이 대세를 점한 세상에서 유일한 대안으로 꼽히는 것은 ‘탈(脫) 조선’이지만, 내달 전기세 납부도 걱정인 흙수저들에게 비행기 삯이 있을 리 만무한바 몸은 이곳에 있으되 정신만이라도 탈출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바로 니힐리즘의 첫걸음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관은 이 시대의 가장 손쉬운 도피처 중 하나다. 어차피 세상은 썩었으니 멋진 배우들이 연기하는 ‘극적으로 썩은 모습’이나 보면서 캐러멜 팝콘을 씹는 무정함이여.

그나마 우리는 사정이 나은 편인지도 모른다. 어떤 나라의 젊은이들은 현실도피를 극장이 아니라 테러집단 IS(이슬람국가)로 하기도 하니까. 코란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유럽 출신 청년, ‘파티걸’로 불리던 젊은 여성이 IS에 가입했을 때 그들에게 별다른 신앙심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들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인생의 허무를 마지막 파괴적인 욕망으로 메웠을 뿐이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 어떤 나라의 누군가는 영화를 보고, 어떤 나라의 누군가는 IS에 가입한다. 물론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고민이 상실되고 돈이나 권력, 섹스 같은 1차원적 쾌락 이외의 목적을 찾기 힘들어졌다는 점은 매한가지다. 21세기 밀레니얼(Millennials) 세대들의 내적‧외적 방황은 이렇게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공전하고만 있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