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동하 기자] 글로벌 지속가능항공유(SAF) 의무화 파고 속에 국내 정유업계가 사상 초유의 원료 수급 위기에 직면했다.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가 기존 정유 설비를 활용한 '코프로세싱(공동처리)' 방식으로 SAF 상용화에 나섰지만, 핵심 원료인 폐식용유 공급망이 붕괴 직전에 몰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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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D현대쉘베이스에서 운영하는 윤활기유 공장 전경./사진=HD현대오일뱅크 제공 |
17일 기후에너지환경부와 정유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폐식용유 시장에서는 우려했던 '자원 유출'이 현실화됐다.
지난해 상반기 기준 국내 폐식용유 수출 물량은 9만5311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190% 급증했다. 이는 반기 기준 역대 최대치다. 반면 같은 기간 수입 물량은 감소세를 보이며, 수출량이 수입량을 훌쩍 뛰어넘는 '물량 역전(Net Export)' 현상이 고착화됐다.
이 같은 '수출 폭주'의 배후에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유럽연합(EU)의 탄소중립 정책이 있다. 미국은 자국 내에서 바이오 연료를 생산할 경우 막대한 세액 공제 혜택을 제공한다. 이 보조금을 무기로 미국 바이오 연료 기업들이 한국 수거상들에게 시세보다 리터당 300~500원 높은 가격을 제시하며 물량을 '입도선매'하고 있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정유사가 리터당 1300원을 부를 때 글로벌 트레이딩 기업은 1800원을 부른다"며 "영세한 수거 업체 입장에선 당연히 해외로 넘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은 사실상 선진국들의 '하청 원료 공급기지'로 전락했다"고 토로했다.
국내 정유사들이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내 발생량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기후부와 한국바이오에너지협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국내 폐식용유 연평균 발생량은 약 37만6874톤이다. 수치상으로는 적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 연료(바이오디젤·SAF 등)로 재활용 가능한 물량은 전체의 47~60% 수준인 약 24만 톤에 불과하다. 나머지 13만 톤 이상은 가정이나 소규모 요식업소에서 하수로 버려지거나, 체계적인 수거 시스템 부재로 회수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 한정된 '24만 톤'마저 앞서 언급한 대로 해외로 유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유 4사가 SAF 생산을 위해 설비를 풀가동할 경우 연간 수십만 톤의 원료가 필요하지만, 국내 잔존 물량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수급 불균형' 상태가 심화되고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정유 4사다. 이들은 수조 원이 투입되는 SAF 전용 공장 건설에 앞서, 시장 선점을 위해 기존 정유 공정에 폐식용유를 투입하는 '코프로세싱' 전략을 채택했다.
△SK에너지는 울산 CLX △GS칼텍스는 여수 공장 △에쓰오일은 온산 공장 △HD현대오일뱅크는 대산 공장에서 각각 실증 사업을 마치고 상업 생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안정적인 원료 공급망이 확보되지 않으면서 가동률 저하를 우려해야 할 처지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코프로세싱은 기존 설비를 활용해 투자비를 아낄 수 있는 효율적인 방식이지만, 원료가 없으면 공장을 돌릴 수 없다"며 "현재 확보된 물량으로는 장기 공급 계약을 맺은 항공사들의 수요를 맞추기에도 빠듯하다"고 밝혔다.
부족한 물량을 채우기 위해 시도했던 수입마저 '자원 민족주의'의 벽에 부딪혔다.
세계 최대 폐식용유 수출국인 중국은 최근 자국 내 SAF 산업 육성을 위해 폐식용유 수출 시 적용하던 증치세(부가가치세) 환급(13%) 혜택을 전격 폐지했다. 사실상 수출을 억제하고 내수 물량을 지키겠다는 의도다. 이로 인해 중국산 폐식용유 수입 단가가 급등하며 국내 정유사들의 수익성을 위협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주요국들도 자국 바이오산업 보호를 위해 원료 수출 금지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 정유업계는 '안에서는 뺏기고, 밖에서는 차이는'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폐식용유를 단순 폐기물이 아닌 '국가 전략 자원'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개별 기업의 힘만으로는 거대 자본을 앞세운 미국·유럽의 보조금 전쟁이나 중국의 자원 통제를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국내 정유사에 원료 공급 시 세제 혜택이나 탄소배출권 인센티브 제공 △폐식용유 수거 체계 양성화 및 투명화 △수출 물량에 대한 모니터링 및 쿼터제 검토 등 실질적인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에너지 전환 시대에 폐식용유와 같은 바이오 원료는 과거의 석유와 같은 안보 자원"이라며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국내 바이오 항공유 산업의 경쟁력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내수 공급망을 보호할 특단의 조치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미디어펜=김동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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