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0년대 투쟁방식 못 벗어나…특권세력화 몰락의 길 자초
민주노총이 설립된 지 올해로 20년이 됐다. 민주노총은 한때 노조원 수가 80만 명에 달하면서 대중 노동운동을 선도하는 듯 했지만 점점 대중과 괴리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주노총은 번번이 강경 정치투쟁을 일삼았고 집회시위의 자유라는 명분아래 불법과 폭력을 휘둘렀다. 특히 비정규직이나 청년 등 노동약자를 대변하기보다 그들만의 기득권 사수에 투쟁수위를 높임으로써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더 큰 문제는 민주노총이 매 정권 개혁마다 발목잡기의 선봉으로 나섰다는 점이다. 1997년 국회까지 통과했던 노동법 개정안이 민노총의 강경투쟁에 의해 백지화됐고 참여정부의 노동정책도 민노총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됐다. 올해는 민중총궐기와 총파업 등의 모든 위협 수단을 동원하면서 국회 노동개혁 5대 법안 통과를 가로막고 있다. 민주노총 스스로가 노동운동의 진정성을 저버리고 대한민국 진보와 개혁의 걸림돌로 전락했다. 이에 바른사회시민회의(이하 바른사회)는 노동운동 조직으로서 민주노총이 가진 한계와 문제점을 진단하는 동시에 이런 사태를 야기한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바른사회가 16일 광화문 프레스센터 19층 목련실에서 개최한 ‘대한민국 진보의 걸림돌로 전락한 민주노총을 말하다’ 토론회는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의 사회로 시작했다. 박동운 단국대 명예교수, 조영길 아이엔에스 변호사, 조형곤 21C미래교육연합 공동대표,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전 국민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이 패널로 나서 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아래 글은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의 발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홍진표 시대정신 상임이사, 전 국가인권위 상임위원

민주노총 투쟁의 과격화, 원인은?

1. 민주노총의 과격투쟁 양상

한국의 노동운동은 국제사회에서도 ‘전투적 노동운동’의 대표격으로 불릴 만큼 그 과격성이 유명하다. 서구에서도 산업화초기에 노동자의 투쟁이 과격양상을 띠었다. 특히 노동운동이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론, 사회주의혁명론과 결합돼 반체제성격을 지니면서 더 급진성과 전투성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나라나 노동조건이 열악한 산업화초기에 노동운동은 과격해지기 마련이다. 이 시기는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적정하게 보장하는 제도가 취약하여 법적인 절차에 호소하기 어려운 노동자는 쉽게 물리적 투쟁에 의존하게 된다. 나아가 지켜야할 가진 것이 없는 이른바 무산자라는 처지 때문에 거친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다.

한국도 산업화시대에는 위에서 열거한 이유들로 인해 노동운동은 극단적인 투쟁 양상을 띠게 되었다. 80년대 이후 학생운동 출신들이 대거 노동운동에 진출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면서 일정한 반체제성격도 가지게 되었다. 80년대 후반부터 환경은 크게 변하였다. 민주화와 지속적 경제성장으로 인해 대기업을 중심으로 임금 등 노동조건은 급속히 향상되었으며, 소련동구의 붕괴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의 인기도 급격히 추락하였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과격양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과격한 거리투쟁은 학생운동이 주도하였다. 전국적 조직망을 갖추어 동원이 쉽고 특정한 직업적 이해관계가 없어 사회 전반의 이슈 제기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운동을 거의 독점하던 종북세력이 1995년 연대사태의 과격폭주와 종북주의 쇠퇴 등으로 급격히 몰락하면서, 그 빈자리를 노동운동이 대체하게 되었다.

   
▲ 민주노총은 올해 민중총궐기와 총파업 등의 모든 위협 수단을 동원하면서 국회 노동개혁 5대 법안 통과를 가로막고 있다. 민주노총 스스로가 노동운동의 진정성을 저버리고 대한민국 진보와 개혁의 걸림돌로 전락했다./사진=연합뉴스

특히 이시기에 민노총은 정치세력화를 본격화하면서 1997년 국민승리21을 창당하였고, 2000년에는 민노당 창당에 대주주로 참여하였다. 민노총은 이때부터 활동범위를 넓혀 사회전체의 이슈에 대해 직접 개입하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통상 서구에서는 좌파정당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노조는 이를 지원하는 외곽단체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에서는 민노총이 직접 좌파정당에 집단으로 가입하여 주요지분을 갖는 방식을 취하였다.

민노총이 그 조직력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사회운동을 대표하는 세력이 되고, 정치세력이 되면서 각종 사회적 이슈를 둘러싼 과격시위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 내에 종북세력의 영향력이 확보되면서(민노총은 여러 정파가 세력다툼을 하는 상태인데, 종북파는 그 중 주요정파이다) 평택미군기지, 광우병 촛불시위 등 반미투쟁에도 적극 나서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2000년 이후에는 폭력화된 대규모 도심 집회에서 민노총의 깃발을 매우 쉽게 보게 되었다.

고용노동부와 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일어난 불법 폭력 시위 102건 가운데 84%는 민노총이 주최했거나 참석했다고 한다. 같은 기간 벌어진 불법 파업 12건 가운데 8건(67%)도 민노총 사업장에서 일어났다. 민노총이 전체인금 근로자의 3%를 조직하고 있으니 이 비율은 거의 압도적이다. 민노총 소속 현대차는 파업의 선두주자로 공인되어 있다. 현대차 노조는 1987년 노조 결성 이후 2015년까지 4년(1994년, 2009~2011년)을 빼고는 연례행사처럼 파업을 벌여 파업을 안 하면 오히려 빅뉴스가 될 정도이다.

민노총 한상균 위원장은 77일간 공장을 점거하고 화염병은 물론 금속발사 새총과 간이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한 쌍용차 극단투쟁의 총 지휘자였다. 한상균 체제의 민노총이 이번 11.14 광화문 폭력시위를 주도하여 전 국민이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민노총의 과격투쟁은 우연적이거나 일회적이 아니고 항상적인 특징이었으며, 위의 통계들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2. 민노총 과격폭주의 원인

민노총의 과격화 원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과격투쟁이 이익을 준다.

사업장에서의 투쟁은 장기파업이나 고공농성 등이 주요수단이며 쌍용차 노조의 공장점거와 폭력동원 같은 극단적 사례도 있다. 장기파업은 기업의 생산차질을 우려하는 사측의 양보를 강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은 노동법상 일부 공공부문 외에는 대체인력투입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전투적 실리주의’라고 부르는데 현대차가 고액연봉에도 불구하고 매번 파업을 해 이익을 더 챙겨온 사례가 대표적이다.

최근 민노총은 노동개혁을 반대하면서 폭력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런 사회적 투쟁은 사업장투쟁과 달리 직접적 경제적 이익을 주지는 않는다. 대신 좌파진영에서 민노총의 중심역할을 보장해주는데, 이는 좌파정당과 사회세력으로부터 민노총 소속노조들의 철밥통 강화투쟁에 무조건적 지지를 얻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좌파내에서도 민노총의 지나친 이기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있으나, 사회적투쟁의 주도를 통해 이런 안티분위기를 견제하는 것이다. 특히 이번과 같이 민노총을 주도하는 귀족노조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노동시장 개혁은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려있다. 민노총의 대규모 시위는 노동개혁법안의 통과를 좌우하는 새민련에 대한 상당한 압력이 되었을 것이다.

   
▲ 지난 11월 14일 열린 1차 민중총궐기는 불법폭력이 난무하는 시위대의 경연장이었다. 복면을 쓴 시위대가 사전에 준비한 쇠파이프와 밧줄, 새총으로 경고방송을 하던 경찰들과 경찰차벽을 공격했으며 이로 인해 경찰버스 50여대가 파손되고 경찰 1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사진=연합뉴스

둘째, 내부의 세력투쟁에 따른 선명성 경쟁

노동계가 여러 정파로 갈려 서로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해온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정파분화는 본래 좌파운동권의 NL과 PD의 노선투쟁에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노조집행부가 누리는 권력과 이권에 대한 관심이 더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차, 기아차, 현대중공업, 전교조 등 대형 노조내에는 마치 정치권의 정당과 같이 노조집행부를 차지하기 위한 여러 그룹들이 상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단위노조의 이런 정파난립의 상태는 상급노조인 산별노조와 민노총에 그대로 반영된다.

정파간의 경쟁 심화는 선명성 경쟁을 유발한다. 만약 정파간에 뚜렷한 노선차이가 있다면 노선의 차별성을 중심으로 경쟁이 진행되겠지만, 귀족노조의 기득권 수호라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도 없기 때문에, 어떤 정파가 더 많은 이익을 따오지는를 놓고 경쟁을 하는 것이다. 이런 선명성 경쟁 때문에 노조집행부 선거를 앞두면 민노총 노조는 더 과격한 투쟁을 하게 된다. 합리적 노조가 단명하는 이유도 이런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이번 민노총 폭력시위 주도의 원인을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이 소수정파출신이라는 데서 찾는 분석이 있는데 일리가 있다. 한 위원장은 처음으로 시행된 직선제 선거에서 "촛불로는 이길 수 없다. 죽창과 파이프를 들고 그들의 심장부로 달려가야 한다"는 과격발언을 앞세웠다고 한다. 이런 과격성을 경쟁력으로 삼은 현 민노총 지도부가 그 실력(?)을 입증하려고 노력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셋째, 좌파이념의 잔재

한상균 위원장은 조계사로부터 퇴거요구를 받자, 조계사 은신이 자신의 권리인 것처럼 여기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종국에는 조계사를 비판하며 “조계종단이 사실 계급적 관점으로 우리하고 동질하지 못하다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라는 발언을 하였는데, 계급이라는 표현에 관심이 간다. 한 위원장이 소속된 정파인 ‘노동전선’은 11.14 광화문 폭력시위를 앞두고 ‘평화집회가 아닌 국가폭력에 대한 투쟁을 선동하며 민중항쟁론’을 펴는 성명을 발표했다. 민노총 내에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는 표현들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노사 간의 대립은 계급투쟁의 성격을 가지는 비타협적인 것이며, 자본가계급의 타도를 통해서만이 노동계급의 해방은 가능하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론은 노동자가 소득과 생활수준 등에서 더 이상 단일한 집단이 아니며, 그 신분이동이 자유로워 계급이라고 할 수 없게 된 자본주의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박물관형 낡은 이론이다. 나아가 노사 간에는 갈등적 요소 보다는 기업의 생존과 발전이라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더 크다는 것이 현대사회의 상식이다. 민노총 내에 좌파이념의 잔재가 남아있는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의 질긴 생명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현실적 명분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귀족노조의 기득권 수호는 그 본질은 ‘우리만 잘 먹고 잘살자’인데, 이런 탐욕을 마르크스주의의 자본과의 비타협투쟁론이 적절하게 포장해준다. 이는 각종 님비현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익을 공익으로 포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통진당의 해산으로 인한 민노총내 종북파의 세 약화를 고려하면, 이른바 PD그룹내의 여러파벌이 계급주의를 강화하는 선명성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 사진은 지난 14일 민중총궐기 불법폭력시위 직후, 조계사로 도망간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은 '화쟁'을 언급하며 부처의 자비를 바랬다./사진=연합뉴스

넷째, 조직세 약화의 불안감

민노총은 창립 초기 40여만명이던 노조원 수가 한때 80만명까지 늘어나는 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2011년 복수노조가 허용되고, 민노총의 패권주의가 비판받으면서 2014년말 기준으로 약 63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한국노총의 약 84만명에 비해 20만명이 더 적은 수이다.

민노총이 근래 탈퇴노조가 늘어나면서 위기감에 빠진 것도 과격화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조직세가 약화되면 유연성을 강화하여 불만세력을 포용하여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도 있다. 민노총이 유연성 강화보다는 과격화의 길을 선택한 것은 금속노조 등 그 핵심노조가 전투성의 강화가 이익을 준다는 관성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특히 민노총이 말로는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보호를 떠들지만 정작 자신들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다는 실체가 알려지면서 생긴 고립의 위기감은 과격화 양상을 더 부추기는 것 같다. 이는 민노총이 투쟁 강화로 노동계의 과잉대표성을 억지로 유지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민노총이 세 약화에 대해 강경투쟁의 단선적 대응을 하는 것을 보면서, 민노총이 스스로 몰락의 길을 재촉한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한국의 산업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기업의 노조들이 여전히 민노총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민노총의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실체를 알아가는 하층노동자들과 실업청년들이 늘어나게 되면 사회적 고립이 심화될 것이다. 그동안 민노총이 마치 사회적으로는 정의로운 집단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누렸던 많은 혜택들이 사라지면 민노총은 타파해야 할 특권집단 외에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홍진표 시대정신 상임이사, 전 국가인권위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