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발전의 산증인 ‘박승’


가난한 시골 소년

한국 경제발전의 수장이 되다!

교수에서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건설부 장관과 한국은행 총재까지

‘박승’의 끝없는 도전!


역사 속 ‘박승’이 바라본

굴곡진 한국경제발전사

그 두 번째 이야기!



- 돌아온 고국, 그러나 유신정권 그 혼란 속으로



박승은 미국유학과 사우디아라비아 경제자문단 등 긴 해외생활을 끝내고 1976년 귀국한다. 고대했던 한국행이었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긴 유신정권으로 어수선해진 사회분위기였다. 한국은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한은은 정부의 출장소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금리 인상, 인하에는 국장도 총재도 필요 없을 정도였다. 중앙은행으로써의 역할을 잃은 한은의 상황은 박승에게 큰 아픔이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 민간기업과 연구소, 대학의 스카우트 제의가 이어졌고 결국 박승은 오랜 고민 끝에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로 자신의 꿈이었던 교단을 선택했다. 그러나 상아탑 역시 시대상황을 피해갈수는 없었다. 신군부의 등장과 독재, 그리고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군부는 학생들을 탄압했고 박승은 그들을 지켜내고자 고군분투했다.



- 박승의 작품 ‘일산’, 일산신도시 개발 속 비화




박승은 노태우 대통령 취임 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을 거쳐 건설부 장관에(1988) 임명된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런 박승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겼다. 바로 주택난 해결이었다. 당시 서울시에는 강북, 강남의 불균형으로 인한 주택난이 산재해있었다. 이것은 서울시의 고질적인 문제인 부동산 거품으로 이어졌고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균형발전을 골자로 한 신도시건설 개발을 제시했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일산’이었다. 일산신도시 개발과정, 그리고 분당신도시 개발과정 속 숨겨져 있던 특혜논란도 직접 밝힌다. 굴곡진 한국 경제발전사의 산증인 ‘박승’, 그의 두 번째 이야기를 TV자서전을 통해 만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