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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우 기자 |
“사람들은 천하고 무식한 노예들이 알긴 뭘 알겠냐고 무시하고 있다. 노예들은 자신의 부당한 처지를 절대 깨닫지 못할 거라며, 등이 갈기갈기 찢겨 피를 철철 흘리더라도 무릎 꿇은 채 유순하게 복종하리라 치부하고 있다. 다들 속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노예들의 기도가 응답받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 끔찍한 복수의 날, 주인은 살려달라며 울부짖게 될 것이다.” (솔로몬 노섭 ‘노예 12년’ 中)
2015년 12월 18일은 노예제 폐지 내용을 담은 수정헌법 제13조가 의회를 통과함으로써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지 150주년이 되는 날이다.
1619년 아프리카인들이 영국 식민지였던 버지니아에 도착하면서 시작된 흑인 노예의 역사는 이날로 종언을 고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도 많긴 하지만 15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흑인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 여성 대통령을 배출한 대한민국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마침 오늘(18일) 흑인 인권과 관련된 기념비적인 에피소드를 남겼다.
이날 오전 새마을운동 교육차 한국을 찾은 27개국의 유학생들과 함께 서울 관악구 삼성동 일대에 연탄 3000장과 쌀을 전달하는 봉사활동에 나선 김 대표는 한 흑인 유학생을 향해 “니는 연탄색깔 하고 얼굴 색깔이 똑같네”라고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 발언을 들은 학생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흑인 유학생의 피부를 연탄색깔에 빗대는 위험한 농담을 대체 왜 던진 걸까.
이런 생각을 해봤다. 차기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정치 거물이 미국 노예제 폐지 150주년 같은 세계사의 빅 이슈를 몰랐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사실 김 대표는 흑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이 존재하던 150여 년 전과 비교해 지금이 얼마나 좋은 시대인지를 알게 하려는 축하의 ‘퍼포먼스’를 펼치려던 게 아닐까? 다인종‧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피부색에 대한 농담 정도는 가볍게 던질 수 있을 만큼 좋은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자축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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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김무성 페이스북 캡쳐 |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추리는 김무성 대표의 사과문과 함께 끝이 나버리고 말았다. 김무성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다음과 같은 다섯 문장의 글을 올렸다.
“오늘 오전 동절기를 맞아 한국에 온 유학생들과 함께 연탄 나르기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현장에서 친근함을 표현한다는 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고려하지 못한 잘못된 발언이었습니다. 즐거운 분위기 속에 함께 대화하며 봉사하는 상황이었지만 상대의 입장을 깊이 고민하지 못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저의 불찰입니다. 마음 깊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언뜻 실수처럼 보이는 김 대표의 오늘 발언은 보수 정당으로 알려진 새누리당의 인권 감수성이 알고 보면 얼마나 예민하고 진보적인지를 과시하고 있는 하이엔드 퍼포먼스였을 거라고 차라리 그렇게 믿고 싶어지는, 2015년 12월 18일은 그런 날이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