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자학·냉소로 망가지고 북한은 ‘전체주의 맷돌’에 깔렸다

   
▲ 조우석 주필
국회, 지하교인 14만 명과 주민 2000만 살리는 북한인권법 통과를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함께 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옆에서 장난을 하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주신다.”(이사야서 11장 1-9절,25장 6-9절)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각별히 좋아했다는 예수의 산상수훈 설교와 함께 그 중 아름다운 구절로 꼽히는 성경의 한 대목이다. 진정 멋지고 장려한 종교적 환시(幻視)가 아닐 수 없다. 이리떼와 어린 양, 독사와 젖먹이 아이가 평화롭게 뒹구는 생명과 평화의 유토피아란 누구에게나 감동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간의 눈물을 닦아주는 하나님 모습도 따듯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기독교신자가 아닌 필자가 굳이 이 얘기를 꺼낸 건 성탄절이 낼모레이기 때문이다.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란 큰 울림의 메시지란 굳이 네 종교, 내 종교를 구분할 일이 아니다.

길거리의 캐롤송도 전처럼 반갑지 않다면

개신교-가톨릭 등 기독교 지도자들의 성탄 메시지만큼 불교-원불교 등 타종교의 지도자들이 내놓은 ‘예수 오신 날 메시지’까지 듣기 좋은 것은 그런 연유다. 이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도 대한민국 땅에 반목과 갈등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좋다. 그런 유토피아가 공허한 덕담에 그치지 않으려면 ‘지금 이 곳’한반도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외면해선 안 된다. 그걸 조선조 말의 김일부(金一夫, 1826~98)는 우주적 스케일로 표현해냈는데, 나는 예전부터 이 귀절을 좋아해왔다. 은근히 묻어나는 한국적 정서에 매료된 탓이다.

“하늘과 땅이라도 해와 달이 없으면 껍데기에 지나지 않고, 해와 달도 지극한 사람(至人)이 없다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天地匪日月空殼, 日月匪至人虛影)

굳이‘지극한 사람’이라고 표현됐지만, 보통사람이면 어떤가? 요즘 말로 미생(未生)이라할지라도 최소한 오늘 하루만은 고된 삶을 위로받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김일부의 이 말은 결국 우리 한 명 한 명, 그리고 발 딛고 있는 한국사회라고 하는 공간이 중요하다는 뜻일텐데, 우리는 익히 안다.

   
▲ 크리스마스를 닷새 앞둔 20일 오후 '토이크리스마스' 축제가 열린 서울 창신동 문구·완구 거리./사진=연합뉴스
서울시내 길거리의 캐롤송도 예전처럼 요란하지 않으며, 듣는 이의 감흥도 덜하다. 사람들 표정 자체가 밝아 보이지는 않은데, 그게 집단적 우울증에 걸린 2015년 세밑 한국사회의 풍경이다. 현실은 답답하다. 20대에게 명퇴하라며 구조조정을 하는 침체일로의 경제가 무섭다. 세계경제도 퍼펙트 스톰, 즉 위기가 한꺼번에 겹치는 상황이란다.

한반도 역사상 최고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룬 게 지난 반세기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활짝 웃지 못한다. 요즘엔 함부로‘헬조선’이니 ‘금수저, 흙수저’ 등을 말한다. 대한민국이 처음부터 잘못 태어났다는 일부 정치인과 운동권의 선동적 언어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한 꼴이다.

이쯤에서 끝내자. 이건 명백한 정치적 위선이자, 좌파의 장난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그렇게 단언하는 건 성탄절이 코앞인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자학과 냉소로 스스로를 망치기보다는 북한을 제대로 봐야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낮고 외진 곳이 그곳이고, 비참한 삶을 영위하는 2000만 주민의 삶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토(凍土)의 그 땅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인류 최악의 공간이라는 걸 우리가 알지 않던가?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해야 한다고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보고서에서 밝혔다. “(인권) 침해의 엄중함과 규모, 성격은 현재 세계에서 도저히 비할 수 없다”고 강조했던 게 COI의 말였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인류 최악의 공간 북한

맞다. 한반도 남쪽이 펄펄 끓어 넘치고 겁 없이 날뛴다면, 북한 주민들은‘전체주의의 맷돌’에 끼어 얼어붙었다. 20세기 한반도 남과 북이란 너무도 극적으로 다르다. 남쪽의 우리가 서로 다른 꿈과 다른 생각을 가진 구성원들끼리 충돌하거나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데 여념 없다면, 저쪽은 국가범죄의 희생양으로 완전히 짓눌렸다.

2000만 명이 모두 구원과 해방의 대상이지만, 성탄절을 앞둔 오늘 우리가 각별히 떠올려야 할 사람들은 14만 명으로 추산되는 지하 교인들이라는 게 내 판단이다. 그들 이야기는 2년 전 개봉된 영화 ‘신이 보낸 사람’(김진무 연출)에서도 다뤄졌는데, 기독교 잡지 <지저스 아미> 최신호 역시 지하교회를 특집으로 다뤘다.
2015년 기독교 박해지수에서 북한은 소말리아, 이라크 등을 따돌리고 여전히 세계 1위다.“종교인들을 데리고서 공산주의 사회로 갈 순 없다”는 김일성의 발언을 지금도 저들은 금과옥조로 떠받든다. 형체라도 있던 1500곳의 교회를 허물고, 30만 명 교인들을 어디론가 끌고 갔던 게 벌써 1958년도의 일이라는 것을 <지저스 아미>는 소개했다.

저들은 기독교를 ‘국가전복의 수단 실현’으로 본다. 게다가 기독교 억압의 거대한 상징물이 금수산태양궁전이라는 걸 알고 필자는 깜짝 놀랐다. 김일성-정일의 미라 두 구(軀)를 전시한 그곳은 김일성 집무실 용도로 쓰였지만, 본래 교회였다. 그것도 해방 전‘동방의 예루살렘’소리를 들었던 평양을 상징하던 장대현교회였다.
그 교회는 20세기 종교사의 분기점으로 기록되는 1907년 평양 대부흥회 이후 서북지방의 역동성을 상징했다. 그 교회를 마성(魔性)을 뿜어내는 최악의 독재자 김일성이 올라탔다는 건 무얼 의미할까? 언제 이런 참담한 상황을 종식시킬까? 상황이 이러한데 흡수통일만은 결코 안 된다는 식의 정치적 얼간이들이 내뱉는 헛소리란 그저 역겨울 뿐이다.

장대현교회 위를 올라탄 김일성-김정일 시체

그 말을 바꿔서 우리민족끼리 신뢰하고 화합하자고 말한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국가 의전서열 제2위인 국회의장 정의화가 그런 발언을 해다. 아찔하다. 의장 정의화를 포함해 역대 최악의 ‘식물국회’가 당장 손대야 할 것은 따로 있지 않을까?

노동개혁 5대 법안, 기업활력제고 특별법(원샷법) 등 시급한 경제 활성화 법안이 통과되지 않고 있고, 테러방지법 등도 몇 년째 미뤄놓고 있는데 그것부터 처리해야 옳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인권법부터 처리할 것을 권유한다. 한국사회가, 사회지도층이 무엇으로 국민과 공동체에 희망을 줄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할 시점인데, 국회가 해야 할 것은 당장 그것이다.

상식이지만 북한은 해방과 구원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들뜨고 정신없이 사는 우리 자신의 망가진 모습을 지켜보는 뜻밖의 거울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 한반도 남쪽의 우리는 옛 시대의 가난과 권위주의를 모두 극복한 지금이지만, 여전히 철부지로 산다. 3만 불 국민소득이 코앞인데도 지금의 정체와 사회 불균형은 누구의 탓이냐를 놓고 서로 으르렁댄다.

그리고 섣부른 냉소와 자학 속에 사로 잡혀 있는데, 그걸 모두 내려앉히는 집단적 방하착(放下着)의 계기가 바로 북한이란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새롭게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다시 맞는 성탄절은 그걸 위한 의미있는 전환점이 되길 감히 기대한다. /조우석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