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96)-신비와 두려움의 땅 게르마니아
타키투스(55~117), 『게르마니아』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민족 간에도 태생적으로 우수하거나 열등한 차이가 있을까? 우생학적 관점에서 자기 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지나친 맹신으로 인해 인류에게 큰 죄를 지은 사례가 적지 않다. 그 가운데 가장 극악했던 죄악은 나치가 저지른 악행이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 즉 게르만족이 순수혈통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민족으로서 다른 민족에 비해 매우 우수한 자질을 타고 났다고 믿었다. ​

게르만족에 대한 태생적 우월감은 유대인에 대한 뒤틀린 증오로 분출되었다. 열등 종족의 말살을 당연하게 생각한 나치의 망상은 유태인 학대와 끔찍한 학살로 이어졌다. 이는 자기 민족에 대한 긍정적 자부심을 왜곡된 민족주의로 잘못 분출하여 빚어진 일이다. ​

히틀러와 나치는 게르만족의 순수혈통에 대한 믿음의 근거로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에서 언급한 부분을 악용하기도 했다. 그들이 악용한 부분은 “게르마니아 주민들은 다른 종족과의 혼인으로 피가 섞이지 않았으며, 유례없이 순수한 특별한 종족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조한다”는 대목이다. ​

하지만 타키투스의 이런 기술은 어떤 과학적 분석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타키투스가 자신의 언급이 본의 아니게 후대에 의해 우생학적 판단근거로 활용된 것을 안다면 기겁할 것 같다. 당시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아 지역이 “황량하고 일기불순하며 살기에도 보기에도 음울한” 곳이어서 다른 종족들이 그런 곳으로 이주를 꺼렸고, 자연스럽게 이민족과의 교류가 거의 없어 피가 섞이지 않게 되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지리적 특성에 의해 게르만족이 고립적 상황에 처해 있었을 뿐, 그 자체로 다른 종족에 비해 우생학적으로 우월한 특성을 갖추고 있다는 명확한 논거는 없었다. 순혈이 우월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과학적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

아무튼 게르만족이 역사상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로마가 유럽 대륙의 각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부터다. 로마의 궁벽한 곳에서 북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던 로마 군단은 필연적으로 북이탈리아에 침입해 온 게르만족과 조우하게 된다. 초기에 게르만족과 로마의 충돌은 게르만족의 일파인 켈트족의 승리로 끝난다. 기원전 386년 켈트족에 의해 로마가 약탈당했던 것이다.​

로마의 게르만족에 대한 공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일찍이 갈리아 지방에 진출한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 역시 게르만족의 일파였다. 켈트족 또한 게르만족에서 갈려나온 종족이다. 갈리아 지방에 진출한 게르만족을 몰아낸 것은 카이사르의 업적이다. 카이사르는 영국까지 진출한 게르만족을 격파한 후 게르만족의 본거지인 라인 강 상류에서 하류의 너른 지역에 분포한 강력한 게르만족의 본류와 대치하게 된다. 그러나 로마도 게르만족의 본류를 모두 정복하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

게르만족에 대한 로마인들의 공포심은 매우 컸던 것 같다. 게르만족은 라틴족에 비해 키가 컸고 신체도 더 강건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로마군처럼 정교한 전술과 군율을 갖추지 못했지만 용맹성만큼은 매우 뛰어났다. 게르만족은 전투에서 자신들의 용기를 북돋우는 노래를 우렁차게 불렀다. 전열(戰列)의 합창은 적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게르만족은 로마인들에게 위압감을 주고 야만스럽게 비춰졌을 법하다. ​

로마인들이 게르만족에게 두려움을 가졌던 결정적인 사건은 기원후 9년에 발생한 대참패였다. 로마의 용병대장이었던 케루스키족 아르미니우스가 이끈 로마군 3개 군단은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게르만족 복병의 기습에 의해 괴멸했다. 그 충격적 패배로 인해 로마는 게르마니아 정벌을 포기하고 라인 강을 게르만족과의 국경으로 삼게 된다. 이로써 게르마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삼으려던 계획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후 로마는 자연스럽게 라인 강을 로마의 경계선으로 삼아 게르만족이 라인강 서쪽으로 침범해 오지 않도록 억제하는 정책을 쓰게 된다. ​

이 책은 타키투스가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군단의 지휘관으로 복무했었던 경험이나, 아니면 당시 게르마니아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문헌, 예컨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나 대(大) 플리니우스가 쓴 전쟁사 등을 참고로 하여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게르마니아의 지리, 풍토, 관습과 문화를 개관한 게르만족의 ​민속지(民俗誌) 성격이 짙다.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아의 민족적 특질과 지형적 특성, 무기와 전술, 관습, 사회 풍속 등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 책 곳곳에서 기술하고 있는 게르만족의 상무(尙武)적 특성은 주목할 만하다. 게르만족은 전투에서 방패를 버리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고,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많은 자들은 목매달아 자살함으로써 패배의 치욕을 씻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이들은 “주군이 전사했는데 살아서 싸움터를 떠난다는 것은 평생의 치욕이자 수치”로 여겼다. ​

주군이 시종들을 부양하고 시종들은 주군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시종집단을 거느리기 위해 폭력과 전쟁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게르만족이 평온보다 전쟁을 선호하는 문화를 만들게 한 요인이 되었다. 이는 게르만족이 용맹한 전사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

타키투스가 게르만족의 이런 상무(尙武)적 기풍을 자세히 소개한 이유는 로마인들에게 게르만족의 호전성을 알려 게르만족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대비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 같다. 그는 게르만족이 전쟁과 약탈로 자금과 물자를 충당하는 체계가 일상화 되어 있음을 로마인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이는 곧 로마가 게르만족의 약탈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깨우는 셈이다. ​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의 군사적 측면만 조명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군이 보기에 게르만 군대의 경우 분명 덜 체계화된, 즉 덜 개명된 야만적 요소를 갖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 명의 아내에 만족하는 엄격한 일부일처제의 유지와 간통죄를 엄벌하는 풍습은 방탕한 로마인들의 풍습보다 더 안정적이었다. 또 유흥과 연희에 젖어 있던 로마인들에게 게르만족의 검박한 풍습은 자신들의 공화정 시기의 미덕을 상기하게 만들기도 했을 듯싶다. ​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의 약점도 지적했다. 이들이 술을 매우 좋아한다는 점이다.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의 주벽에 맞장구쳐주면서 나쁜 음주 버릇을 들이게 하면 쉽게 정복할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아울러 게르마니아의 드넓은 지역에 분포한 다양한 종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특성과 관습들을 소개하고 있다. ​

타키투스가 언급하는 지역은 지금의 유럽 대륙 대부분의 지역을 포괄하고 있다. 그가 기술하는 지역은 흑해 서안과 다뉴브 강 인근에서부터 라인 강 주변은 물론 발트 해 연안에까지 이른다.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의 수도 수십 개가 넘는다. 당시 게르마니아로 불리던 지역의 판도가 현재의 독일 지역을 넘어 매우 넓게 분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대한 기록은 당시 로마인들의 게르마니아에 대한 급증하는 호기심을 채워주었을 뿐만 아니라, 게르만족에 막연한 두려움을 해소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을 것 같다. 아무튼 로마의 공화정 시기부터 제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게르만족과의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로마는 갈리아 지방을 안정적인 속주로 관리하고자 했다. 따라서 라인 강을 넘어 비옥한 땅과 자연환경을 갖춘 갈리아 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는 게르만족 때문에 늘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

이러한 상황에서 타키투스의 저작은 로마인들에게 유용한 읽을거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 시민에 의해 로마제국을 지킨다는 시민적 미덕이 상실되면서 타키투스의 게르만족에 대한 경고는 흐지부지 잊혀져갔다. 제국의 말기로 접어들면서 경계의 대상이던 게르만족 용병에게 로마 군이 의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한다. ​

로마 국경 수비를 게르만족에게 맡기게 되면서 로마 제국은 이미 스스로 지킬 수 없는 힘없는 제국이 되고 말았다. 결국 로마는 476년에 게르만족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Odoacer, 433~493)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게르만족의 위험성을 힘주어 경고한 타키투스의 선견지명을 잊은 후과(後果)였다.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게르마니아』, 타키투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12), 1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