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방민준의 골프탐험(89)- 혹시 내가 어글리 골퍼는 아닌가

그는 싱글 골퍼다. 거실에는 그동안 받은 10여개의 싱글패가 진열되어 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그를 결코 싱글 골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구력이 20년에 가까운 그는 싱글 골퍼의 기량을 갖춘 것은 사실이다. 비거리가 눈에 띄게 긴 것은 아니지만 드라이브 샷은 안정돼 있고 그린 주변에선 거의 볼을 오케이 거리에 붙일 만큼 어프로치 샷이 기막히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이븐 파에도 접근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를 진정한 싱글 골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고질병처럼 굳은 그의 악습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잘 나가다가 드라이브 샷을 미스하면 스스로 그 홀의 스킨스 게임에서 탈락했다고 선언해놓고 볼을 한 번 더 친다. 그리고 스코어를 기록할 때는 첫 번째 미스 샷은 없었던 것으로 계산해서 기록하도록 한다. 퍼트를 할 때도 캐디가 라인을 정확히 읽지 못해 미스를 했을 경우 “라인을 잘못 알려주었잖아!”라며 미스 퍼팅의 핑계를 캐디에게 돌린 뒤 볼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고 퍼트를 한다. 물론 그 홀의 내기에서는 빠지지만 스코어는 첫 번째 미스 퍼팅을 빼고 계산한다. 실제 타수보다 대여섯 타 줄어들 것은 당연하다. 이런 고약한 습관으로 스코어카드에 기록된 그의 스코어는 대부분 70대에 머물고 최악이라고 해야 80대 초반을 넘지 않는다.

이 정도로만 그치면 그래도 봐줄 수 있을 텐데 고수인 연장자나 룰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치사할 정도의 ‘스코어 유지하기 전략’을 총동원, 동반자들로부터 비웃음을 사는 일을 자초한다. 대부분 하수들과의 라운드를 해온 그는 초면의 고수를 만나면 맥을 못 춘다. 동종업계에서는 구력도 가장 오래 된 데다 나이도 많아 1인자 행세를 하지만 다른 업계의 고수가 끼일 경우 자기 페이스를 잃고 추한 모습을 보이기 일쑤다.

   
▲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내게도 남에게 불쾌감을 주고 피해를 주는 못된 악습이 있다고 생각되면 새해에는 이런 악습을 떨쳐버리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삽화=방민준
하수들과 라운드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나는 패배를 모르는 1인자’라는 착각에 빠진 그는 동반자가 자신보다 잘 치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한다. 동원 가능한 온갖 방법 - 예를 들면 상대방이 샷을 할 때 실수를 예고하는 말을 시키거나, 시야를 방해하는 위치에 서있다거나, 개인적인 약점을 지적하는 식의 - 을 써서 좋은 스코어를 내는 것을 방해한다.

상대방이 이 같은 방해작전에도 흔들리지 않고 게임을 이끌어나가면 그는 스스로 자멸을 선언한다.
‘자멸 선언’은 바로 ‘스코어 유지하기 전략’의 일환인 셈이다.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거나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등 핑계를 대며 슬그머니 내기에서 빠진다. 그러면서도 기어코 싱글의 스코어카드를 만들어낸다. 동반자도 꼬리를 내리고 엄살을 떠는 그에게 동정을 베풀어 엉터리 스코어를 못 본 척 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잘 아는 후배들과 칠 때면 그가 과연 골프를 하러 온 것인지, 후배들을 학대하려고 나온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다. 어느 날 최소타가 83으로 싱글 패 받는 것이 소원인 한 후배가 전반에 버디를 2개나 낚으면서 잘 나가고 있었다. 그날 그 후배의 스윙은 큰 무리가 없었고 반드시 싱글을 해야겠다는 욕심도 갖지 않아 크게 무너질 위험도 없어 보였다. 그는 후배가 자신보다 좋은 스코어로 오너를 계속 차지하자 기어이 본성을 드러냈다.

후배가 모처럼 신기록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커녕 홀마다 “OB 걱정 된다.” “보기 하면 잘 할 거야.” “해저드가 입을 벌리고 있으니 조심해라.” “싱글 하면 누가 좋아하느냐?”는 등 온갖 악담을 늘어놓았다. 전반을 39타로 잘 버틴 후배는 후반에 그의 악담에 흔들려 41타로 마감했다. 그가 행한 갖은 방해공작을 감안하며 잘 견딘 셈이다. 후배는 천신만고 끝에 80타를 기록한 것을 대견해 하며 싱글 패를 기대했으나 그는 “70대가 아니면 싱글 패를 만들어줄 수 없다”고 딴전을 부렸다. 보다 못한 다른 동반자가 그가 모르게 싱글 패를 만들어주었다.

더욱 슬픈 일은 그가 주변의 아무도 자신을 싱글 골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동종업계의 동반 라운딩 기피인물 1호이며, 골프장에서 내뱉는 말을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으며, 거실에 진열된 싱글 패나 스코어카드에 대해 아무도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 나 자신은 이런 불행한 골퍼가 아닐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내게도 남에게 불쾌감을 주고 피해를 주는 못된 악습이 있다고 생각되면 새해에는 이런 악습을 떨쳐버리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