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98)-가혹한 형벌통치의 바이블
상앙(?~기원전 338년) 『상군서』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현대의 모든 국가는 법치국가다. 법치의 철학과 내용은 천차만별이지만 어느 사회이든 법의 테두리를 완전하게 벗어나는 공동체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그만큼 국가의 법은 인간의 삶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법의 태동과 운용의 실태는 동·서양, 그리고 고금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법의 외양은 같더라도 법운용의 철학과 방식이 얼마나 판이한 변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상군서(商君書)>가 잘 보여준다.

법의 태동기에 법이 인간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고전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서양에서 법률에 대해 가장 구체적인 논의를 한 고전은 기원전 5세기에 플라톤(기원전 427~347)이 쓴 <법률(Nomoi)>이다. 그의 영향을 받은 로마 시대의 정치가 키케로가 쓴 <법률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 그 뒤를 잇는다.

동양에서는 기원전 3세기에 법가(法家)인 한비(기원전 280?∼233년)가 쓴 <한비자(韓非子)>가 널리 알려져 있고, 기원전 4세기에 법가의 창시자로 불리는 상앙(기원전 390?~338년)이 쓴 <상군서>를 들 수 있다. 법가를 집대성한 <한비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저술이 바로 이 책이다. 이로써 상앙과 한비는 법가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원래 상앙의 본명은 성은 공손이요, 이름이 앙으로 공손앙(公孫鞅)이다. 진(秦)나라 효공이 그를 상(商) 일대에 봉했기 때문에 상군(商君)으로 불렸고 상앙이라 불렀던 것이다. 상앙은 법을 최고의 통치술로 숭상한 전형적인 법가였다. 그는 전국시대에 진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변법의 실행을 통해 진의 부국강병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짧은 성공은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해 거열형(車裂形)으로 최후를 맞이할 만큼이나 많은 논란거리와 후유증을 낳았다.

그는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법으로써 귀족들을 억압하고 백성을 직접 통치하고자 했다. 귀족정치를 법을 실행하는 관료정치로 대체하고자 했고,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과 수공업을 억제하는 중농정책을 썼다. 특히 농민을 가혹한 형벌로 지배하고 군사력으로 활용하는 군국주의를 실행했다.

그는 군사력과 법이라는 강력한 힘을 추구했다. 당연히 유가(儒家)는 철저하게 배격했다. 유가의 가르침이 현실의 난국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비록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이 향리마다 한 묶음씩 있고, 집집마다 한 권씩 있다 하더라고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가난하고 위태한 상황을 부유하고 안전한 상황으로 바꿀 수 있는 술책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언변을 좋아하고 학문을 즐기며,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면서 농업․전쟁을 피하게” 되는 경향을 혐오했다. 그는 오로지 농업과 국방에 종사하는 순박하고 충직한 백성만을 중요시했다. 상앙은 상벌을 엄격하게 시행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를 그대로 실행했다.

   
▲ 상앙의 초상
그는 농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관직과 상으로 유인하고, 강력한 형벌로써 일탈자를 징계하는 수단을 강구했다. 그는 "상은 격려작용을 일으키는 문(文)의 수단이고, 형벌이란 강제작용을 일으키는 무(武)의 수단"으로 여겼다. 상앙은 농사와 전쟁을 국가라는 마차를 움직이는 두 바퀴로 생각했다. 순박한 농민들을 엄한 형벌로 다스리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형벌이라는 강제력을 써서 전쟁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백성들 가운데 이익을 원하는 자는 경작을 하지 않으면 이익을 얻을 수 없고, 형벌의 화를 피하려는 자는 전쟁을 하지 않으면 면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을 요체로 생각했다. 백성을 땅에 묶어 두고 경작에 집중하게 하고, 형벌로 위협하여 전쟁으로 내모는 상앙의 통치술에서 농민은 농업생산력이자 전쟁도구인 농노에 불과했다.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으로는 농경만한 것이 없고,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는 전쟁만한 것이 없습니다. 농경과 전쟁이라는 두 가지 일은 효자도 그의 부모를 위해 종사하기 어려워하는 것입니다. 만약 군주가 자기의 백성들을 부려서 효자와 충신들도 어려워하는 일에 참여시키고자 한다면, 형벌을 이용해 강요하고 포상을 사용해서 부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또 상앙은 “왕들을 다스리는 패자(覇者)는 형벌이 9이고 상이 1이다. 강국은 형이 7이고 상이 3이다. 약국은 형이 5이고 상이 5이다”라며, 상과 벌이 1 대 9의 비율이 되는 나라를 패권국가의 조건으로 높이 샀다.

특히 그는 일관되게 경죄중벌(輕罪重罰), 즉 가벼운 죄도 무겁게 처벌하여 무거운 죄를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범죄에 대한 엄중한 형벌과 함께 연좌제를 시행함으로써 연대책임을 묻는 제도를 고안해 냄으로써 역사상 가장 고약한 해악을 끼쳤다. 이런 상황의 국가라면 전체주의나 군국주의 국가에 다름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상앙의 뚜렷한 목적의식에 따른 냉혹한 통치술은 단기간에 국력을 신장시키고 전쟁에 강한 군대를 만들어냈다. 그의 통치술은 그가 죽은 후 진나라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제국을 수립하는 밑거름이 된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법가의 철학이 당시 여러 국가 간의 치열한 생존경쟁의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부국강병의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등장한 것임은 이해된다. 하지만 인간의 자발적 복종과 인애의 중요성을 도외시한 그의 가혹한 통치술은 치명적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특히 상앙이 활동하던 시기보다 몇 세기 앞선 시대부터 자유 시민들이 공동체인 폴리스의 일원으로서 자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중장보병의 전사로 참가하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예에 비추어 보면 법치의 개념과 인간관의 현격한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상앙의 법률관은 오로지 통치자의 관점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가 일률적이고 차별 없는 상벌, 즉 일상(壹賞)과 일형(壹刑)을 주장한 것도 피치자의 인간심리의 측면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상벌을 확립하고 통일성을 확보하기 위한 보조적 장치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백성들의 자발적 의지나 요구를 고려하지 않았고, 오로지 군주의 강력한 힘을 어떻게 유지하고 발휘할 수 있을까에 골몰했다. 이를 위해 그는 백성이 지혜로워지지 않도록 우민(愚民) 정책을 썼다. 나아가 백성의 생활이 풍족해질 경우 나태해져 전쟁을 기피할 것으로 보아, 백성의 재산과 역량이 쌓이면 관직을 팔아 재산을 수거했다. 또 전쟁을 통해 그들이 생활의 여유를 갖지 못하도록 하는 약민(弱民) 정책을 끊임없이 실행했다. 상앙이 주청하는 말이 그의 약민관을 여실히 드러낸다.

"백성이 나약하면 법을 준수하고, 방탕하면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백성들이 나약하면 쓸모가 있고, 백성들이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면 사나워져서 법을 준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백성을 사납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여 사나운 백성을 제거하는 국가는 약해지고, 백성을 나약하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여 백성을 제거하는 국가는 강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민화를 통해 통치권을 유지하는 방식은 중국의 역대 왕조에 고스란히 계승된다. 루쉰, 보양, 류샤오보, 쉬즈 위안 등 중국의 지식인들이 한탄하는 중국인의 노예근성의 뿌리가 여기에 닿아 있다.

상앙의 법사상은 인간의 도덕적 성취를 유도해 내고, 군주와 백성 사이에 인의와 자애를 바탕으로 한 상호관계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그는 『시경』, 『서경』을 불살라 버리라고 주장했고, 예악과 인의, 염치, 지혜 등 유가적 덕목은 폐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앙은 당면한 부국강병의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전통적 덕목을 버리는 것을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혁신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인간과 사회의 동력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결여된 반쪽 철학이다. 이런 취약점 때문에 그의 사상은 한비자에게 전승되었지만 당대 지식인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상앙은 중국 역사상 잔인한 형벌통치의 전통과 악습을 만들어낸 비조(鼻祖)로 봐야 할 것 같다. 그가 제시하고 실행했던 군국통치와 형벌통치의 전통은 2천여 년 동안 중국의 역대 왕조에 의해 비법의 통치술로 활용되어 왔다.

하지만 후대의 중국 통치자들은 상앙처럼 군주의 권력을 수호하고 발휘하기 위한 법치를 솔직하게 내걸 수는 없었다. 이들은 상앙처럼 순진하지 않았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겉으로는 유가의 통치이념을 명분으로 내걸고 속으로는 법가의 잔인한 형벌통치를 실행하는 영악함을 보였다. 이게 곧 외유내법(外儒內法), 양유음법(陽儒陰法)의 통치전략이다. 국외자들이 중국 사회의 표방 가치와 작동 가치 사이의 괴리를 느끼게 되는 주요인은 바로 이런 포장된 통치전략의 허구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통치자에게 혹독한 형벌통치를 권고한 상앙의 법치는 통치자들을 ‘법률에 대한 봉사자(hyperetes)’로 규정했던 플라톤의 법철학과 너무나 판이하다. 플라톤의 법치의 철학은 법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바로 근대적 ‘법의 지배’(rule of law)의 정신의 발현에 다름 아니다.

   
▲ 아테네 학술원 앞에 있는 플라톤 좌상, ⓒ박경귀
하지만 상앙과 한비자 등 법가의 숭상한 법치는 통치자가 법을 자의적 전제권력의 수단으로 활용하여 지배하는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였다. 당연히 ‘법에 의한 지배’는 전제정치, 전체주의와 친화적이고, ‘법의 지배’는 민주정치와 사법부의 독립 등 삼권 분립의 철학과 보다 잘 어울린다. 동양의 법가가 법의 강제성과 위협성을 강조했다면, 플라톤은 설득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췄다. 이렇듯 ‘법치’란 동일한 이름과 외양에도 불구하고 동서양이 추구해 온 개념은 극명하게 다르다.

현대 중국 공산당 정권의 행태는 상앙과 한비자가 정립한 전통적 법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최근 공자의 부활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면서 유가적 덕목을 명분으로 내걸고 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공산당의 통치 철학을 보충하기 위해 한비자 등 법가를 존숭하며 배우는 데 열성을 다하고 있는 현실은 양유음법의 통치전략을 그대로 대변해준다.

아무튼 중국의 법가 사상은 인류보편적 관념에서 보면 시대착오적 측면이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중국의 역대 정권이 통치 권력의 유지와 강화를 위한 비법으로 법가 사상에 늘 의존해 온 것을 보면 법가의 치명적 매력은 분명히 있는 듯하다. 하지만 법가의 영향이 길게 드리워져 있는 한 중국에 근대적 법정신이 차지할 자리는 비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앙의 <상군서>를 통해 중국 역사상 전제군주국가의 전형적 통치전략의 시원(始原)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깊다. 상앙이 중국 역사에 끼친 단기적 순기능 보다는 장기적 차원에서의 역기능이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에게 군국통치와 우민화 정책의 해악을 고스란히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상앙의 법사상을 국가통치철학으로 활용했던 진 나라는 전국을 최초로 통일하는 위업을 이루었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인 불과 15년 만에 멸망했다. 이는 가혹한 형벌과 군사력으로 세운 나라가 얼마나 취약한 가를 웅변해 주지 않는가.

플라톤의 <법률>이 보여주는 법의 정신과 운용 철학과 대조해보면 동양의 법가 사상이 통치자를 위한 철학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과 진정한 법의 정신을 기초로 수립되지 않는 국가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국민의 동의와 자발적 동참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무법의 법치'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중국과 북한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현대 국가가 상앙류의 '법가'사상을 차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상군서』, 상앙 지음, 우재호 옮김, 소명출판(2005), 5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