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이후 민주화 체제 이념 갈등의 원천…자기모멸·현대사 비하 극복해야
2016년 대한민국 앞에 놓여 있는 중대기로 앞에서 우리는 새로운 모색을 해야 한다. 불과 반세기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했던 한국은 저성장, 경제침체에 발목을 잡히고 성장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답으로 ‘자유화’를 언급하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있다. 기업가정신이 살아나고 기업이 자유롭게 경쟁하며 발전할 수 있도록 놓아주는 ‘자유화’야말로 개인과 가족이 부유해지고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가는 유일한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자유경제원은 “과거의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지금의 대한민국은 자유화로 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11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산업화와 민주화, 다음은 자유화다’ 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패널로 참석한 조우석 미디어펜 주필은 “자유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첫째, 산업화 시절 ‘과거와의 화해’가 결정적이며 둘째, 87년 체제 이후 민주화 과정 속에서 ‘가짜 민주화’와 체제 타락의 부작용을 걸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조 주필은 “1987년 이후 민주화라는 명목 아래 취해진 정치-경제-사회 개혁프로그램은 좌경세력에게 ‘민주화’라는 포장을 씌워주게 되는 일이었으며, 그게 현 이념갈등의 최대 진원지”라고 일갈했다. 아래 글은 조우석 주필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조우석 주필

올바른 산업화-민주화 이해가 자유화를 낳는다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의 발제문 ‘산업화와 민주화, 다음은 자유화다’를 인상 깊게 읽었다. 새해 정초 신문칼럼 형태라서 울림이 남달랐고, ‘산업화와 민주화, 그 다음은 자유화다’란 캐치프레이즈 자체가 대중적 설득력이 컸다. 이를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가치가 크다는 발견도 새삼 했다. 오늘 이 자리도 그걸 위한 모색일텐데, 대한민국 활로의 큰 방향은 그쪽이 분명 맞다. 눈먼 좌파 세력과, 좌파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기회주의적 관망만을 능사로 하는 위선적 지식인 무리 외에 누가 감히 그 명제를 부인하랴?

단 자유화에 대한 더 넓은 정치-사회적 동의를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가 관건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다. 세상을 균형있게 보려 하는 우리의 판단에 따르면, 이 사안이야말로 진정한 사회통합을 위한 기초 중의 기초이자, ‘다시 뛰는 대한민국’을 위한 조건이다. 걱정은 그 때문이다. 한국사회처럼 진영논리가 판을 치고 사분오열된 나라에서 정치-사회적 동의를 얻어내는 작업이 가능할까? 그걸 이끌어낼 수 있는 올바른 정치세력은 과연 존재하긴 할까?

혹시 그게 몇몇 지식인 그룹의 소수의견 내지 선언적 문제제기에 그치는 것만은 아닐까 라는 걱정도 피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되물어야 할 질문이다. 분명한 점은 자유화의 길 밖에 제3의 선택이 없다는 점이다. 우회로는 없다. 정면돌파를 하기 위해 선결돼야 할 점을 분명히 하려 한다. 오늘은 우선 산업화 시절‘과거와의 화해’가 필수라는 걸 강조하려 한다. 즉 올바른 산업화-민주화 이해가 제대로 된 자유화를 낳는다는 점에 새삼 착목을 하자.
 
즉 산업화 시절의 진실 재발견이 중요한데, 그건 1960~80년대가 ‘정치의 경제화’룰이 칼처럼 적용됐고, 그래서 중소기업을 중견기업으로, 중견기업을 대기업으로 빵빵하게 키워냈던 위대한 빅뱅의 과정이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패배하는 과정이었다”는 어느 전직 대통령의 속류적(俗流的) 인식이란 위험천만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과 다르다. 발제자가 지적한 정치권의 망국적 포퓰리즘 남발과, ‘가짜 통합’에 대한 강박증이란 이 위대했던 산업화 시대의 기억을 까맣게 잊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등장한 폐해의 하나다.

   
▲ 김영삼 정부가 내세웠던 민주화-문민화란 위선적 구호 자체도 문제였다. 민주화란 명목 아래 취해진 정치-경제-사회 개혁프로그램은 좌경세력에게 민주화라는 포장을 씌워준 바보짓이었고, 그게 지금 이념갈등의 최대 진원지다./사진=연합뉴스

정확하게 말할 때가 지금이다. 포퓰리즘의 원조는 김대중-노무현 좌파정부가 아니라 전두환 정부다. 수도권정비계획법(1982년)을 통해 수도권규제를 시작했던 것도 5공이며, ‘경제의 정치화’의 씨앗을 뿌린 것도 그들이다. 그건 전두환의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박정희 이후’ 우리 모두의 못난 사회적 합의였음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전두환은 집권 뒤 이른바 시장경제개혁을 단행했는데, 핵심은 ‘박정희 반대로’였다. 개발연대의 차별화-불평등을 이용한 경제성장의 방정식 자체를 청산 대상으로 삼았다.

그것이야말로 경제 포퓰리즘의 출발이라고 보는 게 주류경제학과 사뭇 시각이 다른 좌승희 박사의 시각인데, 토론자 역시 그 진단에 동의한다. 이 대목,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을텐데, 토론자는 양보할 생각이 없다. 5공은 박정희 시절 가장 혜택을 많이 본 집단으로 재벌-대기업과 수도권-대도시를 설정해 이들을 때려잡겠다고 선언했던 첫 번째 정치세력이었다. 그걸 ‘정의사회 구현’이라고 저들은 거창하게 설명했었음을 우리는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실제로 30대 재벌에 대한 각종 규제가 그때 쏟아지기 시작했다. 박정희 시대와, 5공은 경제 패러다임 자체가 달랐다.

당시 공업발전법도 제정했는데, 이야말로 박정희 불균등-불균형 성장방식의 포기였다. 정부가 큰 그림을 그리고, 대기업을 최전방에 배치하는 전략적 관계를 포기했다. 그걸 정경유착이라고 딱지를 붙인 저들은 모든 기업에 대한 균등한 기회 보장을 선언했다. 기업이 잘 하건 못하건 n분의1씩 나눠 지원하는 것은 당시 이미 시작됐다. 이런 5공의 경제개혁을 국내 경제학계는 성공작이라고 평가한다. 박정희 반대로 했으니 잘했다는 소리인데, 그들은 화려했던 3저 호황을 근거로 든다. 나는 그 진단에 동의 못한다. 외려 5공의 경제정책은 한국경제에 지뢰밭을 깐 것과 다름없으며, 때문에 당시의 반짝 호황은 해외여건 호전에 힘입은 반짝 경기다. 그건 축복이 아닌 저주였는지도 모른다.

“이에 따라 성공하고 유능한 기업에게만 개방되었던 산업정책의 문이 (모두를 향해) 활짝 열렸다. ‘작은 나라 큰 기업’의 첨병인 중화학공업육성책과 같은 차별화 정책(과 불평등 경제발전)이 사라지고, 그 대신 ‘작은 나라 수많은 작은 기업’으로의 길이 열렸고, 이와 동시에 중복투자와 외형 경쟁을 가능하게 하는 로비와 (새로운 방식의) 정경유착의 길도 더 크게 열렸다.”(좌승희-김창근 지음 <이야기 한국경제>)

이걸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니 어느새 경제민주화는 유사 사회주의, 혹은 명백한 사회민주주의 이념이 헌법적 가치인 시장경제와 거의 동격(同格)이 됐다. 명분 그럴싸한 민주화 타령 속에 경제민주화가 외려 더 힘을 쓰는 고약한 시대가 지금이다. 그게 선진화의 길이자, 민주개혁이라고 1980년대 말 당시 우리는 굳게 믿었다. 권위주의 정부에 질렸던 탓이지만, 과거사 인식에서 결정적으로, 집단적으로 삐끗했던 우리 모두는 이후 너무 엇나가기 시작했다.

   
▲ 한국사회처럼 진영논리가 판을 치고 사분오열된 나라에서 정치-사회적 동의를 얻어내는 작업이 가능할까? 그걸 이끌어낼 수 있는 올바른 정치세력은 과연 존재하긴 할까? /사진=연합뉴스

경제민주화야말로 박정희와 신군부의 독재-관치경제-재벌경영과 굿바이한 뒤 찾아온 새로운 시대정신이라며 함께 환호했다. 경제학자 변형윤 식의 평등과 분배정의, 균형발전 구호에 현혹됐고, 개발연대의 터널만 빠져나오면 신천지가 펼쳐질 것이라고 믿었다. 너무 압도적인 그 물결에 휩쓸려 대학과 정치권 모두가 개발연대의 성취를 깍아 내리는 풍조 속에 “우리가 어떻게 해서 성공했나” 하는 노하우를 함께 잊기로 작정했다. 자기모멸과 현대사 비하와 함께 경제 저성장의 씨앗은 그때 이미 뿌려졌다고 필자는 감히 단언한다.

노태우 정부-김영삼 정부의 과도기에 그 점이 이미 대세였고, 좌파 정부 10년의 망조(亡兆)로 굳어졌다. 이어진 우파 정부 두 차례에도 이런 기조는 쉽게 바뀌지 않은 채 여기까지 왔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헛소리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아니 대세다. 공교롭게도 현진권 원장의 그 글이 실리던 날 중앙일보 지면을 보자. 그 신문사 고문이자 전직 총리를 지냈던 이홍구는 ‘경제민주화 시즌 2’가 앞으로 펼쳐져야 옳고, 이 시기의 국가과제는 경제민주화라는 헛소리를 자못 근엄하게 펼쳐놓아 독자들의 헛웃음을 유발시켰다.

그는 말한다. 87년 체제 이후 펼쳐진 민주화 시즌1은 효율성이 떨어진 게 사실이며, 국민의 참여 보장이 우선이었다고…. 그 스스로도 그 민주화 30년 실험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칼럼(‘새해에 짚어보는 민주화2의 행로’)에서 밝히고 있는데, 되물어보자. 다시 경제민주화를 해야 나라가 산다고? 거의 정신착란에 해당하는 해괴한 논리를 대중에게 늘어놓는 지식인 그룹이 어디 이홍구 뿐일까? 이홍구 류는 부지기수다. 이 글 서두에서 언급했던 ‘좌파정서에 물든 채 기회주의적 관망만을 능사로 하는 위선적 지식인 무리’가 절대다수다.

역시 87년 체제 이후 민주화에 대한 평가도 결정적인데, 이게 선행돼야 자유화의 방향이 옳게 잡힌다. 유감스럽게도 그동안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빛과 그늘을 균형있게 보지 못한 채 몽땅 선악이분법에 사로잡혀 있어왔다.‘군부=악’이고 ‘민간=선’이라는 도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YS의 경우 그가 내세웠던 민주화-문민화란 위선적 구호 자체가 문제였다. 민주화란 명목 아래 취해진 정치-경제-사회 개혁프로그램은 좌경세력에게 민주화라는 포장을 씌워준 바보짓이었고, 그게 지금 이념갈등의 최대 진원지다. 그게 지금 잘못된 현대사 인식의 주류로 자리 잡고 있는 게 우리의 현주소다.

반복한다. 위선적 지식인의 한 명인 이홍구의 도착적인 자기진단과 달리 자기모멸과 현대사 비하와 함께 경제 저성장의 씨앗은 87년 체제에 7년 앞선 전두환 정부에서 시작됐다.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린 채 그걸 깔끔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 산업화-민주화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우리가 원하는 자유화를 낳는 핵심 동력이다. 우리가 원하는 자유화란 이후 비로소 찾아온다. /조우석 주필

   
▲ 어느새 경제민주화는 유사 사회주의, 혹은 명백한 사회민주주의 이념이 헌법적 가치인 시장경제와 거의 동격(同格)이 됐다. 명분 그럴싸한 민주화 타령 속에 경제민주화가 외려 더 힘을 쓰게 되었다./사진=미디어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