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99)-통치자를 위한 가혹한 형벌통치의 설계도
한비(기원전 280?∼233) 『한비자』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중국 고대의 법가(法家)사상을 집대성한 한비(韓非)의 <한비자(韓非子)>는 형명(刑名)과 법술(法術)로 봉건전제체제를 적극적으로 창도한 법가 이론의 바이블이다. 한비(기원전 약 280∼233년)는 혼란했던 전국시대 말기에 한(韓)나라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법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는 진(秦)의 재상으로 20여년 법가의 이념을 실천한 상앙(商昻)과 신하를 다스리는 권모술수를 강조한 신불해(申不害), 권력과 위세를 중요시한 신도(愼到)가 주장한 법 중시 사상을 집대성했다.

하지만 한비는 그의 조국인 한에서 자신의 사상을 펼쳐보지도 못했고, 후에 진시황이 되는 이웃나라 진왕 영정에게 발탁되었으나, 동문수학한 친구 이사(李斯)의 계략에 빠져 비극적으로 자살하고 만다. 한비는 생전에 진왕에게 중용되지는 못했지만, <한비자>에 담긴 철학은 이후 진왕조의 통치 이념적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한비의 법가 사상은 한마디로 군주의 전제독재를 위한 통치공학이었다. 그는 군주가 강력한 통치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법(法), 술(術), 세(勢)의 융합적 추구를 강조했다. 그는 법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이병(二炳)’의 수단으로 실질적인 성과에 따른 공평한 상(賞)과 가벼운 죄라도 가혹한 벌(罰)로 다스려야 한다는 중형주의(重刑主義)를 주장했다.

한비가 가벼운 죄에도 무거운 벌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형을 무겁게 하고 상을 적게 하면 위가 민을 사랑하는 것이 되므로 민은 상을 타기 위해 죽는다. 상을 많게 하고 형을 가볍게 하면 위가 민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므로 민은 상 때문에 죽지 않는다.”(칙령 2)고 생각했다.

무거운 형벌만이 더 큰 범죄의 유인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비의 중형주의는 일찍이 법가의 선구자였던 상앙(商殃)이 일관되게 주장한 경죄중벌(輕罪重罰), 즉 가벼운 죄도 무겁게 처벌해야 무거운 죄를 예방할 수 있다는 주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아울러 한비는 신하들을 견제하기 위해 술수를 통해 군주권을 확립해야만 부국강병을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자기가 의도하는 바를 견지하고, 신하의 주장과 실적을 맞추어 보며 군주로서의 상벌권을 신중하게 손안에 굳게 장악하여 신하의 욕망을 차단시키고 음모를 깨뜨려 군주 자리를 욕심낼 수 없게 한다”(주도 3)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군주에게 큰 일은 법이 아니면 술(術)이다. 법이란 문서로 엮어 내며 관청에 비치하고 백성들에게 공포하는 것이다. 술이란 가슴 속에 감추어 두고 많은 사례들에 맞추어 몰래 여러 신하들을 부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은 분명하게 밝히는 것만 못하며 술은 드러내 보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난삼 8)

이렇듯 한비에게 술(術)은 곧 은밀한 권모술수다. 한비가 군주에게 신하를 이토록 경계하여 권모술수를 부리도록 권고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기본적으로 군신의 관계를 이익의 충돌 내지는 모순 관계로 인식했다. 이러한 군신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면 곧 군주는 군주권의 유지는 물론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어렵다고 보았다.

당시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제후국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겼다가 멸망하기를 거듭했다. 그 와중에 불충한 신하에 의해 군주가 시해 당하는 일이 수십 번도 넘었던 현실이 한비로 하여금 이러한 냉혹한 대응책을 모색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군주는 계산을 가지고 신하를 기르고 신하 역시 계산을 가지고 군주를 섬긴다. 군신은 서로가 계산하는 사이다. 자신은 손해를 보면서 국가에 이익이 되는 일을 신하는 하지 않으며, 국가에 손실을 끼치면서 신하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군주는 행하지 않는다.… 군신 관계는 계산을 가지고 결합되는 것이다. 어려운 국면을 당하여 반드시 죽기로 각오를 하고 지혜를 다 짜서 있는 힘을 다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은 법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식사 13)

군신 관계가 냉혹한 계산에 기초한다고 본 것은 탁견이다. 정확한 통찰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이런 현상은 오늘날의 국가 통치자들 간에도 늘상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황제서(黃帝書)』에 ‘군신 사이는 하루에도 백 번 싸운다’는 말이 있다. 신하는 사심을 숨기고 군주의 태도를 살피며, 군주는 법도를 잡고 신하를 제재한다. 그러므로 법도가 확립되는 것은 군주에게 소중한 보배이며 도당을 형성하는 것은 신하에게 보배가 된다.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하지 못하는 것은 도당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양권 6)

특히 한비는 군신의 모순관계에서 군주가 우월적 위치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법과 술이라고 보았다. 특히 “술(術)이란 것은 담당할 힘을 맞추어서 관직을 주고 명문에 따라서 실적을 추궁하며 살생하는 권병을 손에 들고 여러 신하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정법 1)으로 생각했고, 법술의 효과적인 집행을 위해 세(勢)까지 가미할 것을 주장했다.

“세란 것은 다스리는 데 편리하나 어지럽히는 데에도 유리한 것이다.” “법을 지키고 세의 자리에 있으면 다스려지고, 법을 어기고 세의 자리를 버리면 어지러워진다.” “포상의 권장이나 형벌의 위엄이 없이 세의 자리를 놓아두고 법을 버린다면 요·순이 집집을 설득하고 사람마다 타일러도 세 집조차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이 또한 세의 유용성을 잘 드러내주는 말들이다.

한비의 법가 사상은 혼란한 전국시대에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사직의 보존과 권력의 유지에 골몰해야했던 제후 군주들에게 단비와 같은 난세의 전략이 될 수 있었다. 엄격하고 잔혹한 형벌을 통해 신하와 백성을 복종시킬 수 있었고, 끊임없는 권모술수로 신하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비의 상벌관이 가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한비의 상벌의 기준은 ‘성과의 많고 적음’이 아니었다. 신하가 제시한 계획과 결과적으로 드러난 성과가 일치하는가도 중요한 잣대였다.

“군주에게 제출한 신하의 업무계획이 ‘명(名)’이며, 실제로 해낸 고과표가 ‘형(形)’이다.” 따라서 상벌은 형명(形名)의 원리에 따라 주어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미리 제시한 계획보다 더 성과가 큰 경우에도 처벌해야 된다. 이는 “정상이야 어떻든 간에 시행착오에 대해서는 한 치의 관용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냉담한 통치논리”이다.

이러한 한비의 ‘형명(形名)의 원리’에 의한 상벌제도는 현대 경영에서의 실적주의의 원리와도 어느 정도 맥락이 닿는다. 한비는 신하의 성과가 부족하면 나태한 것으로, 성과가 과도하게 넘칠 경우 직권의 남용이나 가렴주구(苛斂誅求)의 가능성을 경계했던 것 같다. 더 크게는 계획과 성과의 불일치는 결과적으로 군주의 통치권을 위협할 수 있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한비는 인간을 철저하게 불신했고, 군주에게 누구도 믿지 말 것을 역설했다. 한비는 인간의 본성을 악한 것으로 본 맹자의 성악설의 입장에 닿아 있었다.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이익 추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마를 만드는 사람은 가마를 만들면 사람들이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관 짜는 사람은 관을 만들면 사람들이 요절해 죽기를 바란다. 가마 만드는 사람이 어질고 관 짜는 사람이 잔혹해서가 아니다.…그러므로 후비가 부인이나 태자의 패거리가 이루어지면 군주가 죽기를 바라는 것도 군주가 죽지 않으면 세력이 강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군주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군주가 죽는 데서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다.”(비내 3)

이렇듯 그는 인간의 이기심, 즉 ‘호리지성(好利之性)’을 냉혹하게 간파하고 제어할 수 있는 통치전략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가 끊임없이 측근의 신하는 물론 부인과 자녀, 왕족들을 의심하고 경계하도록 촉구한 이유다. 법가들이 범죄에 대한 엄중한 형벌과 함께 연좌제를 시행한 것도 인간의 호리지성과 두려움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결과적으로 한비의 법가 사상은 군주 일인 독재체제의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 역대 왕조들은 겉으로는 유가의 통치이념을 명분으로 내걸고 실제로는 법가의 잔인한 형벌통치를 실행했다. 이는 곧 외유내법(外儒內法), 달리 말해 양유음법(陽儒陰法)의 통치전략이다. 중국 역대 정권은 한비의 사상을 통해 국가의 무질서를 바로 잡고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늘 국가의 분열 시기에 법가 사상이 난세 극복의 중요한 전략으로 등장하게 만든 배경이 된다.

   
▲ 한비
최근 중국 공산당 정권의 행태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공자의 부활과 유가적 덕목을 명분으로 내걸며, 내부적으로는 공산당의 통치를 다지기 위해 한비자의 형벌주의를 존숭하면서 철저하게 언론을 통제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특히 한비의 법가 사상은 역대 왕조에서 자행된 가혹한 형벌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된 측면도 적지 않다. 특히 황제의 중앙집권적 전제체제를 수립하고 유지하는 데 초점을 둠으로써 황제의 일인독재체제를 위협하는 이론에 대해 무자비한 ‘문자옥(文字獄)’이 반복되는 악폐를 낳았다. 물론 이 결과가 오롯이 한비의 잘못일 수는 없다. 오히려 한비의 법가 사상의 맹신자들의 과도한 집행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한비의 법가 사상 자체의 근본적인 취약점이 이런 일탈을 지속적으로 불러오는 요인이 되고 있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한비의 법가 사상의 가장 큰 맹점은 그의 법치의 비책이 철저하게 유일무이한 권력을 지닌 황제의 관점에서 태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차원에서 한비의 ‘법치’와 ‘근대적 법치’는 확연하게 다르다. 중국 근대기의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가, 역대 왕조의 법가 사상이 서양의 근대 법치와 달리 "법률이 만능이면 결과적으로 군주도 만능이 된다"는 법가 특유의 단점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양계초는 법가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통치자 중심의 법치, 즉 인치(人治)와 술치(術治)가 혼합된 법치로서 근대적 민주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근대적 법치는 영속적으로 사유화한 국가 통치 권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의 원천인 국민에 의한 법률의 입법과 국민에게 한시적으로 권력을 위임받은 대리인의 합리적인 법 집행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법가의 법치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괘를 달리한다. 다만 한비의 법이론은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정부의 권력주체들이 권력 남용과 일탈 행위를 하지 않도록 일정부분 통제하고 관리하는 비법으로 활용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

아울러 <한비자> 55편의 각 장에는 한비자의 탁견이 많이 담겨있다. 특히 군주가 경계해야 할 신하들의 간악한 행위를 적시한 ‘팔간(八姦)’이나, 국가를 망하게 하는 징조를 나열한 ‘망징(亡)徵)’편을 살펴볼 만하다. 특히 법치주의에 반하는 여덟 가지 인간상을 유형별로 거론한 ‘팔설(八說)’, 천하를 다스리는 자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여덟 가지 통치 원칙을 제시한 팔경(八經), 국정을 혼란하게 만드는 좀벌레 같은 다섯 유형의 인간들을 적시한 ‘오두(五蠹)’ 등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번뜩이는 지혜가 많이 담겨 있다. 현대 국가의 통치자와 사회지도층에게 주는 경구로 받아들여도 부족함이 없는 것들이다. 한비자가 시대를 초월하여 통치자들을 강하게 유혹하는 이유다.

아무튼 한비의 냉혹한 법가 사상은 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방책이었다. 특히 그의 사상이 권력을 쟁취하고 지키려는 인간의 끝을 모르는 탐욕과 엄한 형벌에 굴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속성을 꿰뚫어 보고 도출한 탁월한 비책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변치 않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관계의 심리적 요인들을 고려한 조직 경영관리의 기법으로 차용될 여지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한비의 법가 사상이 오로지 주권이 군주 일인에게 귀속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권재민(主權在民)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근대적 법치로 다가올 수 있는 여지가 좁다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따라서 법가의 법치를 마치 현대적 법치와 등치되는 것으로 작위적으로 이해하거나 포장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한다. 군주를 위한 법치는 국민의 자유와 인권, 권리와 복리를 위한 법치와는 추구하는 지향과 법운용의 철학 자체가 크게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한비보다 100여 년 전에 활동하던 플라톤의 <법률>을 읽어보면, 동서양의 법치의 구상이 어쩌면 이토록 극명하게 다를까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스인들은 법률(nomoi)은 '지성의 배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법이 통치자들의 주인이고 통치자들은 법의 종이 될 때 이상적 법치가 구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신을 만물의 척도로 보고, 법 제정은 곧 신을 모방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과정에서 알맞은 정도 곧 적도(適度: to metrion)와 중용(to meson)을 구현하고자 했다.

중국의 법가가 오로지 전제 군주 일인을 위해 백성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플라톤은 권력을 독점하는 참주를 경계했으며, 오히려 특정한 누군가를 위한 법이 아니라 공동체(koinonia) 전체를 위해 민중에게 어느 정도 자유로움(to eleutheron)을 용인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플라톤이 우려한 것은 오히려 민중들에게 무제약적인 전적인 자유(pasa eleutheria)가 주어지는데 따른 방종이었다. 그가 아테네 민주주의가 우중(愚衆)정치로 전락했다고 질타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플라톤은, 입법가는 공동체가 추구할 이념과 가치, 그리고 유지해야 할 질서의 모델, 즉 파라데이그마(paradeigma)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로서, 이들이 신성(神性)에 버금가는 지성을 갖추었을 때 최선의 법률(aristoi nomoi), 바른 법률(orthoi momoi)이 확보될 수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의 <법률>에서 그리스인들이 법의 정신과 법의 지향점, 구체적인 법률안을 모색하는 대화를 살펴보면, 이들이 2400년 전에 벌써 근대의 법 정신의 구현에 다가갔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플라톤의 법사상은 한비자 등 중국 법가의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괘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동서양의 법가 사상의 근저에 깔린 철학의 상이함은 이후 2천여 년 동안 법의 운용과 근대적 민주주의의 태동과정에서 현격히 다른 길을 걷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않았나싶다. 이런 차원에서 한비의 <한비자>와 플라톤의 <법률>를 함께 읽으면 법치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상앙의 <상군서>, 한비의 <한비자>와 플라톤의 <국가>, <법률>, 그리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함께 읽는다면 금상첨화다.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한비자 Ⅰ』, 『한비자 Ⅱ』 한비 지음, 이운구 옮김, 한길사(2012, 10쇄), 9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