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의 서명 참여는 일종의 ‘침묵시위’라고도 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마저 한 사람의 ‘서명자’로 돌아가서 호소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답답함의 표출인 것이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미디어펜=문상진 기자]흔히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되곤 한다. 착각이다. 누구보다 높은 권좌에 앉아있는 것은 맞으나 그 권좌는 그저 사람 하나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인 데다 별로 편치도 못한 자리다.

좌파들에게서 막강 권력의 소유자이자 독재자로 취급 받는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자금을 이용한 정치 공작으로 많은 비판을 받곤 한다. 하지만 발상을 바꿔 보면 박정희가 정말 무소불위의 독재자였다면 ‘공작’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무한할 것 같아 보이는 권력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별도의 공작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난 18일 박근혜 대통령이 재계가 추진하는 ‘경제활성화법 천만 서명운동’에 직접 참여한 것은 분명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그런 만큼 이런저런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박 대통령의 이번 결정은 대통령이라는 직위가 주는 피로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다가오게 만들기도 한다.

이날 박 대통령은 앞선 업무보고회의 모두발언에서 정치권에 대해 이례적으로 감정적인 토로를 하기도 했다. 경제계의 입법촉구 서명운동에 대해서도 “오죽하면 국민들이 그렇게 나서겠는가”라고 반문했던 것. 이 일갈에는 대통령이 아무리 갖은 노력해도 국회(야당)가 발목을 잡으면 바꿀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삼권 분립의 냉엄한 현실이 담겨 있다.

총선 정국이 구체화되면서 세간의 시선은 누가 어디에 출마를 하고, 누가 무슨 자리를 맡는지에만 쏠리고 있다. 2015년에는 큰 선거가 없었던 만큼 오랜만에 찾아온 ‘대목’에 각 종편과 언론사들도 흥행몰이에 여념이 없는 듯하다.

이를 민주주의의 활기라고도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적어도 국민들의 목줄을 붙잡고 있는 시급한 현안에 대해서는 윤곽선이라도 잡혀 있는 상태에서 선거를 해야 그것이 ‘민주주의의 축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국회는 이름만 국회일 뿐 사실상 기능이 정지된 불구의 상태에 가깝다. 세계 각지에서 테러가 빈발해 민간인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지만 한국에선 테러방지법이 국회에 묶여 있어 테러와 관련한 국제정보 공유가 전혀 되고 있지 않다. 대통령 또한 이에 대해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상황”이라고 강조한 바다.

민생과 직결된 경제 법안들 역시 병목에 걸려 있기는 마찬가지다. 경제위기 해소를 위해선 기업활력 제고법과 노동개혁 5법안의 통과가 절실한 상황임에도 야당은 친노와 비노, 친안과 반안으로 나뉘어 조선시대의 사색당파 싸움을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국회의원들의 행태는 입법파업을 넘어 ‘입법방해’에 해당하는 수준인 것이다.

대통령의 서명 참여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감행된 일종의 ‘침묵시위’라고도 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마저 한 사람의 ‘서명자’로 돌아가서 호소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답답함의 표출인 것이다.

어느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한 이 행보에는 힘이 있다. 리더였던 대통령이 여론 속에 합류해 적극적인 의견을 표출하니 유권자인 국민에게도 무력한 정치권을 심판하고, 경제활성화법과 테러방지법의 국회통과를 위한 압박을 가할 동기가 부여되는 것이다. 모처럼 던진 대통령의 승부수에 야당을 포함한 정치권과 국민들이 이제 ‘응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