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00) 국가 통치자의 덕목과 리더십의 모범
크세노폰(기원전 430?~355?)의 『키로파에디아』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당대 동서양을 대표하는 숙적의 관계였다. 특히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3차례의 침략(BC 492년~BC 479)을 물리친 후 최고의 번영기를 맞았다. 페리클레스가 이끈 기원전 5세기의 번영은 페르시아라는 오랜 위협세력을 몰아낸 국방의 안정이 토대가 되었다. ​

하지만 아테네의 번영은 곧 아테네의 퇴조를 함께 내재하고 있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그리스 동맹국가들 위에 군림하는 제국주의로 흘렀기 때문이다. 결국 아테네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BC 404)이 발발하고 그리스 세계의 분열을 가져왔다. ​

크세노폰은 바로 이 내전이 시작되기 1년 전인 BC 430년에 아테네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어 플라톤과 동문수학했다. 그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무릎을 꿇고(BC 404년), 30인 참주정의 폭정과 민주정의 복원이 이루어지는 등 격동하던 시대 상황을 직접 겪었다.

크세노폰은 군인, 철학자, 역사가로 여러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작 가운데 당시 적국이던 페르시아에 대한 쓴 것은 이 책이 유일하다. 그는 과거 페르시아의 현명한 군주로 이름났던 키루스 대왕의 일대기 『키로파에디아(Cyropaedia)』를 썼다. ​

어느 나라의 역사를 보든 국가를 융성시킨 인물은 무언가 남보다 탁월한 역량과 리더십을 가졌던 것 같다. 페르시아 제국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가진 최초의 대제국이었다. 하지만 그 출발은 아주 미미했었다. 그 작은 국가였던 페르시아가 주변의 큰 국가였던 메디아, 아르메니아, 리디아, 아시리아, 시리아, 바빌로니아를 잇달아 정복하며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

그 위대한 창업주가 바로 키루스(BC 585?~BC 529)였다.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소년기 교육 및 성장과정과 주변국들을 정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키루스가 보여준 지혜와 노력, 그리고 리더십을 조명하고 있다. 키루스는 왕자 교육과정에서 정의와 절제를 배웠다. 육체적 단련과 군사훈련과 함께 정신적 자질을 키우는 데에도 중점을 두었던 것 같다.

그는 판결을 내릴 때 언제나 법에 근거해야 한다고 배운다. 키루스는 아버지로부터 다른 사람이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키루스는 “사람을 복종하게 만드는 가장 큰 동기는 복종하는 자에게는 명예를 주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처벌과 불명예를 주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아울러 주변의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배운다. 키루스는 성장기에 배운 이런 리더십의 요체를 유효하게 발휘하여 제국을 성장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끄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정비했다. 우선 병사들에게 강인한 체력을 갖추게 하고, 전술을 습득시키고 전쟁에 필요한 용기를 키우도록 조련했다. 분대, 중대, 연대, 여단 등 군대의 편제를 정비하고, 훈련과 전투에서 항상 각 부대와 병사들이 경쟁하도록 유도하고, 실적과 전공에 따라 보상하는 원칙을 실천했다. ​

합당하고 공평한 보상 원칙은 군대를 통솔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귀족과 사병을 가리지 않고 실적에 근거한 보상을 함으로써 부하들이 공을 세우려고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었다. 전리품의 분배와 승진은 실적에 의해 공정하게 실시했다. 이런 결과, “키루스의 군대는 열정과 야망, 힘, 용기, 격려, 자기 통제, 복종심으로 가득했다.” 현대의 모든 조직의 리더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특히 키루스는 자신의 군대에 합류한 복속 국가들과 함께 전쟁을 수행할 때 획득하는 전리품의 배분권한을 페르시아 군대가 독차지 하지 않고 다른 국가의 지휘관들에게 맡겼다. 그의 논리는 신선한 역발상이다. 키루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적은 양을 배분한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이득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많이 얻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있기를 기뻐할 것입니다.” ​

키루스는 현재의 이익을 확보하는 것은 수명이 짧은 부를 안겨주지만, “현재의 이익을 희생하고 부가 흘러나오는 근원을 확보하는 것은 부가 영원히 솟아나는 샘을 소유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참으로 소탐대실하지 않는 지혜로운 판단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키루스는 페르시아 군대의 약점과 강점을 분석해 늘 새로운 발전적 변화를 이끌었다. 페르시아 군대에 없던 기병대가 창설된 것도 메디아 기병대의 전투력을 보고 곧바로 벤치마킹한 덕분이었다.

전차부대도 창설했다. 하지만 그때 까지 활용되던 키레네인의 전차 운용 방법을 대대적으로 혁신했다. 전차 운전석을 탑 모양으로 만들고 바퀴에 날카로운 쇠낫을 달았던 것도 그의 창안이었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 다레이오스 대왕과 크세르크세스가 이끈 전차부대는 바로 키루스의 전차 운용법을 그대로 전수한 것이었다.

키루스는 적진을 교란시키는 이동식 망루도 개발했다. ​또 아시리아와 전쟁을 할 때 전쟁 기간에도 농부들이 평화롭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계약을 맺음으로써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약탈을 하지 않아도 되게 했다. 이는 전쟁에서 이길 경우 식량자원을 안전하게 확보하게 하는 길이기도 했다. 전쟁 중에도 적과의 윈윈(WIN-WIN)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키루스는 용기 있고 지혜로운 적장은 포용하고 아량을 베풀었다. 그가 엄청난 부와 강력한 군대를 가졌던 리디아를 정복했을 때, 크로이소스 왕을 죽이지 않고 곁에 두어 핵심 참모로 활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그가 어디를 가든 크로이소스를 데리고 다녔던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한 처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적에게 아량을 베풀고, 반란을 꾀하게 하지 못하게 하려던 이중의 포석이었는지도 모른다. 키루스의 영악함을 알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

키루스는 대제국이 완성되자,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경영 체계를 수립한다. 자신의 신변 안전과 경호를 위해 거세를 시킨 환관제도를 만들었다. 인간의 욕망이 거세된 환관이 더 주인에게 충성을 보일 것으로 생각했다. 또 페르시아 군대에서 1만 명의 군사를 뽑아 왕의 수호부대로 활용했다. 페르시아 전쟁 당시, ‘불사부대’로 불린 1만의 병사들은 바로 이 전통에 의해 만들어진 부대였다.

그는 드넓은 제국의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총독을 파견하여 왕을 대리하여 통치하게 했다. 한편으로 ‘왕의 눈’과 ‘왕의 귀’를 심어 이들을 상시적으로 감시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총독이 다스리는 지방 정부는 페르시아가 복속시킨 국가들에서 일상 시 세금을 징수하고, 전쟁 시에는 군대와 물자를 징발하는 효과적인 기구가 되었다. 총독이 뒷받침하는 중앙집권적인 이런 체계는 제국 경영의 기본 시스템이 되었다.

키루스는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소송이나 경연에서 판결이 필요한 문제가 생길 경우 재판관을 선정할 때 당사자들이 서로 동의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결국 귀족간의 분쟁 시에 키루스 자신을 판관으로 선정하도록 경쟁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는 귀족들의 결집을 방해하고 자신에게로 권력이 집중되도록 고안한 장치였던 것 같다.

키루스는 제우스신을 섬기는 의식을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아 정비했다. 왕의 위엄과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권표(權標)를 든 대신과 화려한 전차와 제단, 수만 명의 기병대와 병사와 전차부대가 뒤따르는 대규모 대왕의 행렬을 만들었다. ​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화려한 의복을 갖추고 전차에 탄 키루스는 대왕 행차 대열의 웅장함에 압도된 백성들의 부복을 받았다. 또 이동 간에 백성들의 청원을 대신과 군사 지휘관을 통해 받았다. 왕을 만날 수 없는 일반 백성과 소통하는 창구를 지나치게 화려하고 격식 있게 만든 셈이다. 이 권위적이고 장대한 왕의 행차 방식은 페르시아 역대 왕들에게 그대로 전수된다. ​

크세노폰은 이 책에서 키루스가 자연사한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실제와는 다르다. 그는 마사게타이를 정벌하는 도중에 죽었다. 이 책에는 키루스가 이집트를 정벌한 것으로 나오는 데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 책은 순수 역사책이 아니다.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사실과 창작을 적절하게 뒤섞은 것 같다.

   
▲ 키루스의 무덤
아무튼 키루스가 정립한 제국의 통치 방식과 군대의 관리방식, 그의 빛나던 덕목들은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했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아버지에 비해 상당히 용렬했던 것 같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하는 공을 세우지만 아우 스메르디스를 죽이고, 이집트 원정 중에 반란이 일어나 되돌아오는 길에 자신도 죽는다. 결국 키루스의 직계 아들의 왕권은 귀족들의 반란으로 다레이오스 1세에게 넘어간다. 키루스가 어렵게 세운 대제국의 대왕 자리가 아들 대에 그치고 만 것이다.

크세노폰은 마지막 장에서 키루스가 제국을 번영시키던 덕목들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BC 4세기 당시의 페르시아인은 키루스 대왕 시절에 비해 정직하지 못하고 매우 나약했으며 예의범절도 무너졌다고 기술한다.

왕실의 교육에서도 말 타기 수업과 실습이 없어졌고, 사냥도 자주 나가지 않아 나약해졌다고 말한다. 군대의 용맹성도 예전보다 훨씬 뒤떨어졌고, 백병전을 기피하며 그리스 용병의 도움 없이는 전쟁에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

크세노폰은 왜 페르시아의 역대 왕 중 가장 큰 영토를 정복했던 키루스 2세의 이야기를 썼을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BC 4세기에 그리스에서는 페르시아를 정복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한다. 아마 분열되었던 그리스 세계를 하나로 뭉치게 하기 위한 또 다른 적을 외부에서 찾고자 했었던 것은 아닐까? 당시 아테네의 웅변가 이소크라테스도 페르시아에 대한 범 그리스적 전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선동했다고 한다. ​

크세노폰 역시 아테네가 다시 부흥하여 강력한 국가가 되길 희구했을 것이다. 그는 페르시아를 작은 도시에서 대제국으로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키루스의 리더십에 주목했다. 크세노폰이 키루스의 성장과정과 자질, 그의 정복 활동을 재조명한 이유도 아테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고자 했기 때문인 것 같다. ​

크세노폰이 적국이었던 페르시아 제국의 실질적 창업주였던 키루스를 어떤 이유로 주목했던지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의 저술에 자신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그는 한 때 페르시아 내전에 그리스 용병으로 참여하여 페르시아 군과 대적하다 패한 후 고립된 그리스 용병을 이끌고 무사히 생환했다. 그 때의 분투기를 스스로 책으로 남겼다. 『아나바시스(Anabasis)』가 바로 그것이다. 아마 크세노폰은 이 참전 과정에서 페르시아에 전해 내려 온 키루스 대왕의 제국 건설의 일대기를 인상적으로 접하고 이를 그리스 세계에 전하고자 이 책을 쓴 것 같다. ​

이 책이 전하려했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독자들은 국가의 통치와 기업의 경영, 가족의 운용에서 키루스가 발휘한 덕목과 리더십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창업자의 열정과 덕목, 그리고 전략이 어떻게 하면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유지 계승될 수 있게 만들지에 대한 고민도 해보면 좋겠다. ‘창업(創業)보다 수성(守成)이 어렵다’는 실례를 키루스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키로파에디아(Cyropaedia)』, 크세노폰 지음, 주영사(2012), 4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