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좇고 자본이 투여된 예술 작품이 더 예술적이고 아름다워
예술과 돈을 연관 짓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에서 어색한 풍경이다. 예술도 경제가 될 수 있고, 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저급한 생각’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런 환경에선 예술 산업이 발전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자유경제원은 자유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인들을 모아 ‘시장경제로 본 예술’ 워크숍을 개최했다. 예술을 보는 사회적 인식이 보다 높아졌으면 하는 취지로 개최된 25일 워크숍에서 참석자들은 다양한 고견을 나누었다. 세션 2 ‘예술도 산업이다’ 발표자로 참석한 윤서인 만화가는 “우리가 아는 순수 예술작품 중에는 금전적 동기로 인해 생겨난 것들이 이미 많다”면서 “예술과 돈은 알고 보면 인간 욕망의 정점에 서 있는, 매우 공통점이 많은 요소”라고 지적했다. 아래 글은 윤서인 만화가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윤서인 만화가

팝 아트의 거장, 현대 미술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앤디 워홀(1928_1987). 딱히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미국의 화가, 판화가, 예술가다. 수 많은 예술 활동 영역에다가 락 앨범의 제작 및 영화제작까지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면서 독신으로 재미나게 살다 간 인물이다. 살아있는 동안 이미 전설로 등극했고, 예술가로서의 인기와 사업가로서의 성공, 두 가지를 생전에 모두 누렸다. 5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이 유일하게 아쉬운 점인 남자다.

그는 1975년에 낸 자전적인 에세이 <앤디 워홀의 철학> 에서 ‘돈 버는 것이 최고의 예술’ 이라 외친다. 지금이야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지만 예술은 예술, 상업은 상업이던 당시에는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앤디 워홀은 그 전까지 ‘도안사(?)’ 라 불릴 만한 직업을 예술가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아주 작정하고 무너뜨려버렸다.

자신의 작품들을 미술 뿐 아니라 영화, 광고, 디자인 등 시각예술 전방위적으로 마구 적용시키면서 “이게 예술이야? 그럼 이건 상업이야? 그럼 이거는? 이건?” 끝없는 질문들과 함께 수백년 이어오던 판을 흔들어버린 인류 미술사 최고의 혁신가이다.

   
▲ 앤디워홀의 자전적 에세이 ‘앤디 워홀의 철학’ 표지. 1975.

피츠버그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1949) 뉴욕에 정착하여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 등으로 이미 상업미술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돈도 벌만큼 벌었으니 이제 자아를 찾아야겠다고 맘먹고 1960년 돌연 기존의 상업미술 대신 순수미술로의 전환을 선언한다.

그래서 무슨 정물이나 인물을 그릴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도 그린 것들은 당시 유명하던 만화 캐릭터들인 배트맨, 딕 트레이시, 슈퍼맨 등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순수미술이야?” 고상한 예술을 추종하던 당시 뉴욕의 화상들은 크게 비웃으며 철저히 외면했다.

외면을 당하면 물러서서 방법을 바꾸는 게 상식인데, 워홀은 오히려 더 본격적으로 슈퍼마켓의 수프 깡통디자인, 코카콜라 병, 달러 지폐 같은 ‘예술이 되기 힘든’ 것들을 예술 작품처럼 그려내… 아니 실크 스크린으로 쿵쿵 찍어냈다. 그림이 아닌 어디 도안사들이나 사용하던 실크 스크린을 도입한 것도 충격이었다.

“아니 예술을 대량 생산한다고?;;” 절대 어울리지 않는 두 요소가 극적으로 합쳐지면서 오랫동안 쌓여온 예술의 고정 관념에 도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마도 기존에 상업 디자인으로 어느 정도 돈을 벌어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들을 들고1962년 뉴욕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 열린 '새로운 사실주의자들 New Realists' 전시에 참여했는데 거기서 대박이 난다. 관람객들을 아리송하게 만들어버리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 팝 아트의 거장, 현대 미술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앤디 워홀(1928_1987). 딱히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미국의 화가, 판화가, 예술가다./사진=『앤디 워홀 손안에 넣기』 표지. 리처드 폴스키 작. 박상미 역. 마음산책. 2006.

이 때부터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인 ‘팩토리’ 에서 이런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대량생산하기 시작한다. 팩토리라는 이름에서 보듯 고상한 예술이 만들어지는 스튜디오를 정면으로 거부해 버렸다. 조수들은 공장 직원이었고 자신은 공장장이었다. 예술과 산업이 본격적으로 만나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제작된 마릴린 먼로, 마오 등 유명인의 실크스크린 작품들이 뉴욕 곳곳에 내걸렸고 앤디 워홀은 엄청난 유명세를 얻는다. 유명세의 가치를 쫒아 유명인들을 찍어내면서 스스로도 유명해져버린 셈이다. 때마침 뉴욕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도 그의 유명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는 돈을 위해서 그림을 제작하고, 어떻게 하면 그림을 통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지를 항상 고민했다.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도 참으로 경제적이다. 적은 돈으로 최대의 가치를 창출해내기 위해서 공장에서 공업품들을 생산할 때 사용되는 방식을 사용해서 그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 사람의 그런 작품 활동은 미술시장의 규모를 확대시켰다. 앤디 워홀의 그림이 비싸게 팔리기 시작하면서 엉뚱하게도 다른 작가들의 그림도 비싸게 팔렸다. 미술 시장 역시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도 그는 스스로 증명해냈다. 돈이 있어야 미술도 할 수 있고 미술을 통해서 돈을 벌어들인 사람은 새로운 작업을 할 기회를 더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앤디 워홀은 부자가 되었다.

재밌는 점은 그의 작품이 실제로 상품에 적용되어 팔렸고 광고로 만들어졌으며 또 예술작품으로 액자에 들어가 화랑에 전시가 됐다는 점이다. 예술도 아니고 상업도 아닌 앤디 워홀만의 묘한 경계를 형성한 것이다.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는 것이 가장 환상적인 예술 아닌가?” 라고 주장하며 ‘비즈니스에 감히 예술이라는 말을 붙이다니… 돈은 더러운 것이다!’라는 인식이 분명하던 그때, 돈 버는 것이 예술이고, 특히 잘 되는 비즈니스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라는 반전 메시지를 세상에 던졌다. 에이~ 이런 게 무슨 그림이야 이걸 누가 돈주고 사냐? 라는 소리는 항상 있었고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의 그림은 항상 비싸게 팔렸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돈을 밝힌 예술작가가 아니다. 그는 처음으로 돈을 ‘대놓고’ 밝힌 예술작가이다. 이 ‘대놓고’ 야 말로 가장 위대한 그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수백 년 전 부터 거의 모든 예술가들은 돈을 밝혔다. 우리가 아는 순수 예술작품 중에는 금전적 동기로 인해 생겨난 것들이 이미 많다.

르네상스 시대의 뛰어난 그림들 대부분이 부유한 후원자들이 제공해 준 돈으로 그려진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다 빈치도, 미켈란젤로도 돈을 밝혔고 피카소 역시 “예술은 무한한 돈의 흐름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2006년 타계한 백남준에게도 평생 유대인 화상인 ‘칼 솔베이’ 하는 자금 후원자가 있었다. 솔베이의 경제적 후원이 없었다면 백남준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이 현상을 그토록 많은 예술가들이 ‘공식적으로는’ 애써 외면했던 것 뿐이다.

   
▲ 앤디 워홀은 1975년에 낸 자전적인 에세이 <앤디 워홀의 철학> 에서 ‘돈 버는 것이 최고의 예술’ 이라 외친다. 지금이야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지만 예술은 예술, 상업은 상업이던 당시에는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사진=2015 앤디 워홀 라이브(ANDY WARHOL LIVE) 기획전 포스터. 주최 YTN. 주관 아트몬.

예술과 돈, 둘은 알고 보면 인간 욕망의 정점에 서 있는 매우 공통점이 많은 요소들이다. 비슷한 주제에 서로 애써 외면하던 둘을 ‘에이 왜 그래 다 알면서~’ 이렇게 비웃으면서 와락 합쳐버린 남자. 그 성과는 놀라울 정도였고 이후 세계의 예술 흐름을 바꿔버린다. 1960년대에 그런 것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표현했다는 점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강성인 그에게는 안티팬도 많았고 심지어 자신의 팩토리 직원에게 총격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앤디 워홀이 세상에 나온 이후 무려 50년이 흘렀다. 그런데 대한민국엔 아직도 이 1960년대 남자만도 못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도 눈에 많이 띈다. 유명 웹툰 작가의 만화를 보면서 “야 이것도 그림이냐! 뎃생력 연출력도 없는 낙서 아니냐. 만화가가 돈 밖에 모르고 순수함이 없어!” “아주 그냥 어려웠던 시절을 다 잊었구만!” “그래 맞아 이 작가는 초심을 잃었어!!” 라고 말하는 선배 작가들이 있다. 아이돌 가수의 춤과 노래를 비난하는 인디밴드 멤버들이 있고, 애니메이션 더빙, 뮤지컬 출연등을 비판하는 무명의 배우들과 성우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보도하고 공감하는 언론과 대중들이 있다.

여전히 예술의 영역에서 돈은 논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돈을 밝히는 것은 순수함을 잃어버린 죄악시 된다.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한 예술가들이 이런 분위기를 주도하는 경향이 보인다. 잘보면 성공한 예술인들은 혹시라도 순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일까 두려워 쉬쉬 숨어들고, 그렇지 못한 예술인들은 오히려 소주 한잔 하면서 큰소리치는 모습도 관측된다. 큰돈을 벌고 나면 당연히 그에 맞게 작품도 사람도 변화하는 것인데 이것에 초심을 논하며 매도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무명의 만화가, 무명의 대학로 연극 배우, 무명의 미사리 가수들 모두에게 마음속엔 돈이 있다. 당장의 돈이 되지 않는 현실을 ‘순수성’ 으로 위안하고 돈 잘 버는 예술인들을 ‘더러운 영혼’ 으로 매도하는 그 심정도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이제는 좀 바뀌어야 한다. 언제까지 자신을 스스로 속이면서 살 것인가.

돈을 쫒고 자본이 투여된 예술 작품이 오히려 더 예술적이고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끝까지 외면할 것인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싸이의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신곡들이 온 나라에 울려 퍼지고 있는 2015년 스마트폰 IT강국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예술의 순수함을 아직도 논하고 있다니. 1960년대 청년 앤디 워홀이 이런 광경을 보면 뭐라고 한마디 할지 자못 궁금하다. /윤서인 만화가

   
▲ 앤디 워홀. 살아있는 동안 이미 전설로 등극했고, 예술가로서의 인기와 사업가로서의 성공, 두 가지를 생전에 모두 누렸다. 5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이 유일하게 아쉬운 점인 남자다./사진=에스콰이어 매거진(Cover for Esquire Magazine, Issue no. 414, May 1968) 표지. George Lois 작. 1968. Offset lithography, Gift of the desig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