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저급문화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시장은 대중이 '원하는 것'을 반영할 뿐
예술과 돈을 연관 짓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에서 어색한 풍경이다. 예술도 경제가 될 수 있고, 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저급한 생각’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런 환경에선 예술 산업이 발전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자유경제원은 자유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인들을 모아 ‘시장경제로 본 예술’ 워크숍을 개최했다. 예술을 보는 사회적 인식이 보다 높아졌으면 하는 취지로 개최된 25일 워크숍에서 참석자들은 다양한 고견을 나누었다. 세션 1 ‘시장경제로 본 예술’ 발표자로 참석한 곽은경 자유경제원 시장경제실장은 “시장이 저급문화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시장은 원하는 것을 반영할 뿐”이라면서 “오히려 시장은 다양성을 인정하며, 예술의 독점화를 막는다”고 지적했다. 아래 글은 곽은경 실장의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곽은경 자유경제원 시장경제실장

시장경제로 본 예술

1. 예술가도 기업가다

예술가들은 신성하고 고귀한 존재라 돈을 목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강하다. 돈을 쫒는 예술가들을 속물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예술가도 경제적 동기를 가진 존재로 자본주의의 부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예술가라는 직업 자체가 사회가 부유하고 안락하게 된 후에 생겨난 직업이다. 인간이 육체노동에게 벗어나고, 의식주가 해결되면서부터 아름다움에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창작을 위한 재료를 구입해야 하며,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예술가들은 돈을 주는 사람을 위해 일했으며, 계약서을 작성했고, 보수가 적절하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하기도 했다. 그들의 작품은 시장 거래를 통해 가격이 매겨지기 때문에 ‘부’는 명예와 더불어 예술가에게 작품 활동을 위한 강한 인센티브가 된다.

타일러 코웬은 “가장 예술적인 것이야 말로 상업화되고 대중화 되어야 하며, 예술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술이 상업성과 경제성을 멀리하는 것은 경쟁 기피 증상 중의 하나이며 예술문화도 산업화가 필요하다.

예술가도 부를 원한다

예술가에게 부는 작품 활동에 필요한 재료를 구입할 능력을 의미한다. 작가에게는 종이와 펜, 작품 구상을 위한 여행을, 조각가에게는 청동과 돌, 알루미늄과 같은 재료를 구입할 수 있게 한다. 음악가에게는 좋은 악기를 구입하고 좋은 스튜디오를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생계를 잇기 위해서 돈벌이에 전념한 예술가들도 많다. 폴 고갱은 증권 중개인이었으며, T.S 앨리엇은 로이드 은행에서 일했다. 모차르트는 “제 유일한 목표는 그저 벌수 있을 만큼 버는 거예요” 라고 말하는가 하면, 베토벤은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곡을 쓰는 음악의 고리대금업자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독립적으로 살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살려면 얼마간의 수입이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살바도르 달리도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돈이다”라고 한 바 있다.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는 조각가, 건축가로 엄청난 명예와 부를 얻을 수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무능력했던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평생 돈 걱정을 하며 살았다. 찰리 채플린은 1972년 아카데미상을 받는 자리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는데 거기서 예술이 생겨났지요. 여러분들은 제 말에 환멸을 느껴도 할 수 없어요. 그게 사실이거든요”라고 했다.

   
▲ 예술가도 경제적 동기를 가진 존재로 자본주의의 부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예술가라는 직업 자체가 사회가 부유하고 안락하게 된 후에 생겨난 직업이다. 사진은 프랑스 바로크 음악의 거장인 마크 민코프스키와 루브르의 음악가들의 공연을 즐길 수 있는 ‘한화클래식 2016’ 관련 이미지. 올해 3월 서울 예술의전당과 대전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사진=한화그룹 제공

부와 명성을 쫒는 것이 예술작품의 상업적 가치, 즉 성공과 직결된다는 것을 인식한 예술가도 많았다. 피카소는 “예술은 비즈니스다. 예술은 무한한 화폐의 흐름이다”라고 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높은 가격에 팔렸고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국의 펑크 바이올리니스트인 나이젤 케네디는 “예술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 주위로 돈이 얼마나 몰리는가를 보고 자신의 사람들과 얼마나 교감을 나누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렘브란트는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만들기 위해 다른 화가를 고용하기도 했다. 고갱은 타이티 섬으로 들어가 있는 동안 자신의 작품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림 가격을 주시했다.

한편 사업수완이 없고 천재성만 가진 예술가도 많았다. 고흐는 평생 동안 단 한 점의 그림 밖에 팔지 못했으며, 평생을 동생 테오에게 의지해 살았다. 또 모네는 인상파 화가의 작품이 인정받기 전까지 친구들에게 애절한 편지를 써서 돈을 빌리며 살았다. 시인 이상은 다방 경영에 실패하고 가난에 시달렸다. 폐병을 얻어 27세에 요절하고 말았는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멜론이 먹고 싶다”였다.

예술가들, 시장을 개척하다

초기 인상파 화가들은 아카데미가 주도하는 살롱전에 낙선했다. 살롱전에 전시를 하지 못하면 그림을 팔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대중에 작품을 공개하기 위해 독립 전시회를 개최했다. 처음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었고 마침내 성공했다. 드가, 피사로, 모네, 고갱 등은 그림으로 돈을 벌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 화가들은 살롱전의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유통망과 판매망을 개척해 부를 축적했다.

19세기 바르비종파였던 밀레, 루소, 코로 등은 기성화단과는 차별화된 명암법을 시도했다. 아카데미는 바르비종파를 적대시하자 이들도 독립적인 시장을 창출했다. 쿠르베는 개인전을 열고, 파리에서 구매자를 찾지 못하자 외국 전시회에 출품하는 등 해외 시장도 개척했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버트 라우션버그 등 20세기 팝아티스트들도 처음에는 대중에 인기가 없었다. 그들은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보다, 혁신적인 화법으로 소비자들의 취향을 향상시켜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

예술에도 혁신이 필요하다

예술가들은 작품에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했다.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으로 유명한 얀반 에이크(Janvan Eyke)는 염료에 계란 노른자를 섞는 방식이 너무 빨리 건조해 원하는 색이 나오지 않자 수백 번의 실험 끝에 유화물감을 만들어 낸다. 이후 유럽전역으로 전파되어 새로운 회화기법을 탄생시킨 혁신이었다.

초상화가 존 랜드는 1841년 튜브형 물감을 발명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전준비가 너무 번거롭다는 생각에 금속튜브에 물감을 담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이전에는 돼지 방광으로 만든 주머니에 물감을 저장했다. 금속튜브가 생긴 이후 물감이 말라서 사용하지 못하거나, 별도로 새로운 색을 만들어야 하는 불편함이 사라졌다. 또한 원하는 양을 원하는 곳에 짤 수 있게 됐다.

금속튜브는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작업실에서 나와 캔버스를 들고 어디에서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와 함께 접는 것이 가능한 팔레트, 이동식 이젤, 화구함 등의 용품도 함께 개발되었다.
건축가였던 브루넬레스키는 거울로 실험을 반복한 끝에 선원근법을 발명했고,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에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피카소는 프랑스 인상주의를 모방하는 낡은 방식 대신, 입체파를 창안했다. 브람스는 베토벤의 교향곡과 비교당하고 싶지 않아 합창곡을 작곡했다.

예술을 비즈니스하다

예술적 능력만큼이나 비즈니스에 뛰어난 수완을 보이는 예술가도 많았다. 루벤스는 탁월한 사업가였다. 그는 티치아노의 색감과 라파엘로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조합해 그림을 그렸다. 시간과 돈을 절약하며 소비자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또 그는 화실을 화려하게 꾸몄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비서에게 편지를 받아쓰게 하는 등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이미지를 연출해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했다. 스페인 펠리페 4세가 한꺼번에 많은 작품을 주문하자 본인이 직접 그리는 대신 실력 있는 화가를 고용해 그림공장을 운영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15개월 만에 56점의 작품을 완성시켰다. 타국에서 수집한 골동품을 그의 작품과 끼워팔기 방식도 활용했다.

이탈리아 조각가 베르니니 역시 홍보 전략가였다. 그는 로마 나보나 광장의 분수 제막식에서 마지막 물줄기를 세차게 뿜어내도록 기획했고, 그의 후원자인 교황과 추기경을 만족시켰다. 그는 돈 버는 일에는 실패한 적이 없으며, 뛰어난 판매전략으로 그는 고객들의 마음과 지갑을 동시에 열었다.

   
▲ 예술가의 작품은 시장 거래를 통해 가격이 매겨지기 때문에 ‘부’는 명예와 더불어 예술가에게 작품 활동을 위한 강한 인센티브가 된다. 사진은 화일산기 '화합과 상생'./사진=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 운영위원회

라파엘로는 가격차별 정책을 활용했다. 그는 동판화가인 마르칸토니오와 라이몬디와 함께 작업을 했다. 라파엘로가 그린 소묘를 대량을 찍는 방식으로, 진품을 살 수 없는 소비자에게 값싸게 작품을 팔았다. 동판화는 대량생산이 용이했고 운송도 쉬워 시장을 확대하는 좋은 전략이 되었다.

피카소와 앤디워홀은 대중매체를 적극 활용했다. 피카소는 화상, 경매, 대중행사 등을 적극 활용해 작품을 홍보 했으며, 대중매체를 이용해 창작의 자유를 극대화 했다. 그는 대중매체를 활용한 최초의 화가로 칭해진다. 한편 앤디워홀은 “미디어가 예술이다. (I believe media is art)”라고 했으며, '달러 사인', '캠벨 수프' 등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작품에 활용해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2. 경제가 성장한 곳에 예술도 꽃핀다

상업의 부흥이 예술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해상무역국가였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유럽 산업혁명 이후의 프랑스 파리, 2차 세계대전 이후 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의 뉴욕에서 예술작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시장이 확대됐다.

예술시장의 탄생: 소수 권력자에서 대중 소비자로

고대의 예술은 시민 공동체가 그 수요층을 이루었다. 이에 예술도 공동체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신전, 야외극장, 경기장 같은 공공 건축이 발전했고, 연극은 시민 공동체의 종교 축제의 모습을 띄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제대로 된 미술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고, 작가와 구매자가 직접 거래를 했다. 이 구매자는 주로 공공기관, 정부였고, 공적 목적으로 시설에 설치할 조각품 등을 작가에게 직접 의뢰하는 방식이었다.

반면 로마에서는 미술 시장이 등장한다. 로마인들이 그리스 미술품의 가치를 인식하여 이들을 작품들을 징벌했고, 로마로 건너온 미술품들은 사적인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리스로부터 유입되는 미술품의 공급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로마 상인들이 그리스 조각가들을 고용하여 기존 작품을 모방하도록 하는 복제품 시장도 나타났다.

중세유럽은 정치, 문화적으로 교회가 지배하는 기독교 사회였고, 경제적으로는 봉건제 사회인 중세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 시기에는 미술품을 사고 파는 거래가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기독교가 사회, 정치, 문화 등 유럽인들의 모든 것을 지배했던 중세시대에는 미술품도 종교적 맥락에 국한되어있었다. 당시 제작된 작품들은 교회를 위한 종교적 기능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에 생산과 거래가 주문제작 방식이었다.

피렌체: 축적된 부로 예술의 소비를 창출하다

피렌체는 르네상스 초․중기에 걸쳐 매우 부유한 도시로 조각과 소묘, 회화, 수공예 등 예술 전 분야에 걸친 발전이 있었다. 로마 교황청의 종교예술 수요와 교회, 수도원, 상인길드, 지방정부, 중상층 주택소유자 등 재력가들의 수요가 서로 경쟁을 하면서 화가들의 경제적 지위가 개선되었다.

판매망도 다양해져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등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북부유럽의 다양한 고객들로부터 작품을 주문받기 시작했다. 금세공업과 금속공예업이 발달해 예술가들은 금, 은, 동, 대리석 등 금세공에 바탕을 둔 작업을 했다. 유약을 바른 단지, 궤짝, 등받이, 와인잔 등이 제작되었다. 또한 길드나 교회의 주문으로 웅대한 공공 미술품도 제작됐다.

이 시기는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였다. 전근대사회에서 예술가는 왕, 귀족, 교회 등 소수의 후원자의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이들의 주문에 의한 작품만 생산했다. 이들은 특정 후원자에 고용되면 수입은 안정되지만 여행할 자유와 다른 후원자의 주문을 받을 기회가 제한되었다.

일부에서는 계약에 의한 거래도 이뤄졌다. 라파엘로는 작품에 나오는 인물을 손수 그린다는 조건으로 계약했으며, 특정대상을 넣을지, 키를 얼마로 할지까지 소비자의 지시를 받았다. 예술가들은 상대적으로 나은 보수와 일거리를 따라 옮겨다니기 시작했다.

피렌체의 부흥기도 16세기 초중반 스페인과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쇠퇴했다. 무역로가 끊기고, 국고는 고갈되고, 메디치 가문의 독재가 시작됐다. 메디치 가문은 미술품의 주문에 규제를 가하기 시작했고, 미술 시장에 자유경쟁이 사라지고 화가들이 권력집단에 가담했다.

암스테르담: 시민이 예술품의 고객이 되다

17세기 미술시장이 가장 활기를 띄었던 곳은 네덜란드이다. 해상무역을 장악하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의류, 목재, 소금, 와인, 꽃을 수출하며, 곡물거래나 조선업, 증권거래, 출판, 어업 등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데카르트는 암스테르담을 두고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사업가인 굉장한 도시”라고 칭했다.

이러한 경제성장은 미술시장의 주요 고객인 중산계급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암스테르담은 왕정이나 군주제가 없어 부유한 시민들이 도시의 기반을 이루었다. 미술품의 소비자가 상인과 중산 계급이 주를 이루자 네덜란드 회화의 내용도 바뀌었다. 웅장한 예술품이 아닌 일상에서 부담 없이 감상할 작품이 주를 이뤘다. 특히 네덜란드의 주택은 좁아서 풍경화나 정물화가 어울렸고, 얀스텐, 칼프, 베르메르 등의 화가가 일상생활, 바다풍경, 정물화 등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술시장은 상업화, 전문화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선 계약 후 작품 제작을 하거나 소수의 후원자의 재정적 지원에 의존하던 것과는 달리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를 위해 작품을 만들었다. 이러한 근대사회의 성장은 예술생산이 예술가의 주관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 미술가는 기술자인 장인에서 전문직업인으로 상승하여 예술가 대접을 받게 되었다.

미술작품은 일반 상품과 마찬가지로 장터나 공판점, 화상을 통해 대중에게 팔렸다. 투자를 목적으로 미술품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으며 직업 미술상도 등장했다. 작품이 시장을 중심으로 거래되면서 화가들은 시장에서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경쟁적으로 좋은 작품을 내놓았으며, 자기 상품을 알리기 위해 전람회를 개최했다. 안정된 시장 덕분에 많은 양의 그림이 거래될 수 있었다. 한편 네덜란드도 전쟁과 경제적 쇠퇴로 프랑스에게 미술 시장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파리: 예술의 주도권, 국가에서 시장으로

19세기 유럽의 산업화와 함께 서양미술도 황금기를 맞는다. 기차와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사람과 물자가 파리로 몰리며 ‘도시문화’가 형성되었고, 산업화와 근대화를 발판으로 중산층이 생겨났다. 이러한 시대정신을 반영해 인상주의 운동이 일어나 기존의 살롱으로 대변되는 아카데미 화풍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공립 미술학교, 살롱전 등을 운영했고, 살롱전에 출품된 작품을 대량으로 사들여 정부 청사나 공공장소를 장식하며 예술품 유통을 독점했다. 인상파의 등장으로 정부 주도의 예술활동이 시장주도로 넘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고갱은 쿠리에의 말을 인용해 “독립 작가들의 재능이나 그들이 보여준 작품들은 국가의 예산지원이 무익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국가에서 장려한 것들은 시들고, 국가에서 보호한 것들은 소멸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자본주의의 부는 여러 방식으로 예술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축적된 부를 이용해 기업형 화상들이 등장했으며, 이들이 인상파의 그림을 사들여 파리의 화가들을 후원하고 생계를 도왔다. 또한 박람회, 서커스, 카바레, 카지노, 무도장, 경마장, 뱃놀이등 중산층의 여흥문화가 다양해졌으며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등은 이런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세계최초의 봉마르쉐 백화점이 등장해 미술품 전시 문화도 바꿔놓았다. 한쪽 벽에 다닥다닥 최대한 많은 작품을 전시하던 것과 달리 봉마르쉐는 넓고 호화로운 공간에 미술 작품을 전시했다.

   
▲ 타일러 코웬은 “가장 예술적인 것이야 말로 상업화되고 대중화 되어야 하며, 예술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2015년 11월 18일 저녁,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고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한 관객이 기념음악회 전시물 앞을 지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뉴욕: 중개업자가 예술 거래를 촉진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리가 서양 미술 중심지에서 밀려나고, 1920년대부터 산업발전과 부를 축적한 미국 뉴욕이 현대미술 사조를 이끌었다. 몬드리안, 샤갈, 뒤샹 등 유럽화가들이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들어오면서 추상표현주의를 등장시켰다. 피카소는 자신의 미술작품의 가치를 제고하는데 마케팅을 적극 활용했고, 앤디워홀을 중심으로 한 팝아트 역시 부흥했다.

파리에서부터 등장한 전문 화상은 뉴욕에 와서 더욱 역할이 커진다. 이들은 화랑이나 미술관에 작품을 전시하고 고객과 직접 접촉해 작품을 판매했다. 미술 비평가나 기자, 화상들은 저평가된 작품을 찾아 고객에게 정보를 전달한다. 현대적 마케팅과 판매망은 고객의 취향을 세련되게 하고 시장의 기능을 원활하게 했다.

중개인의 등장: 예술의 상업화를 촉진하다

예술 시장의 생산자는 예술가이다. 다만 일반 상품시장과 다른 예술 시장의 특징이 있다면, 한 예술가라 하더라도 똑같은 작품을 두 점 생산해 내기란 불가능하며, 예술가들의 영감과 창의력이 투입된 예술작품을 시장가치로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비대칭성을 보완하기 위해 예술가들의 작품을 평가하며, 생산자와 수요자들 연결해줄 수 있는 중개인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다.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되는 15, 16세기, 이탈리아 귀족들 사이에서 미술품 수집이 유행했는데, 이때 미술품을 공급해 주었던 아트 딜러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의 등장으로 경매를 통해 미술품 구매가 가능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그림뿐 아니라 상거래에서도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그는 17세기 암스테르담에서 미술품 시장이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렘브란트 이전 화가들은 부와 권력을 가진 귀족들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이러한 후원 제도를 광범위한 미술품 수요자들이 뒷받침해 주는 시장으로 대체하는데 기여했다.

프랑스가 미술시장을 주도하면서부터 화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작품 전시 후 고객과 접촉 판매하게 되면서 판매업자나 중개업자의 역할이 커지게 된다. 동시에 미술 비평가, 감정사, 큐레이터 등의 영향력도 커졌고, 중개업자들은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작품들을 남보다 먼저 찾아내려는 금전적 동기가 강해졌다. 이들이 내린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소비자들은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고 소비하게 되었다.

19세기 유럽에는 자유 미술 시장이 정착되며 나타난 기업형 화상들이 현대적 미술 시장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들은 미술품을 사서 모으고, 그들이 후원하는 미술가들의 작품과 생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자 했다. 예술가와 작품을 평가함으로써 그들의 가치를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파리를 무대로 활동한 갤러리스트 폴 뒤랑뒤엘은 대중과 새로운 장르의 미술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한 대표적 미술상이다. 그는 인상주의 작품을 시장에 유통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또 다른 화상으로는 앙브루아즈 볼라즈가 있다. 그는 당시 대중들이 선호하던 작품 대신 피카소, 세잔 등 당대의 화풍을 역행하는 화가들을 발굴한 화상이었고, 개인 전시회를 열면서 현대 미술의 진로를 모색했다.

다니엘 하인리히 칸바일러는 1913년 피카소, 브라크, 드랭 등의 작품을 사들이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소개했다. 피카소는 “칸바일러에게 사업 감각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었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백남준에게도 칼 솔베라는 미술품 거래상이 있었다. 그는 백남준의 작품을 판매함으로써 큰 돈을 벌었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칼 솔베는 거래를 통해 미술의 경제적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듯 중개인은 예술시장에서 수요자와 공급자를 연결하며 시장거래를 활발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시인 김광균의 <시와 경제의 사이>의 시가 중개인의 역할을 잘 설명하고 있다.

시와 경제의 사이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경제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지폐
종이 두 장만 남을 뿐이다

_김광균 <생각의 사이> 중


3. 자본의 축적이 예술을 발전시킨다

미술: 산업의 발전으로 다양한 재료가 등장

자본주의 산업의 새로운 기술은 미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화학 공업과 야금 기술에서 물감의 재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물감을 직접 만들어 써야했기 때문에 창작이 실내에서 이루어졌던 반면, 1841년에는 양철로 만든 물감튜브의 발명 이후에는 창작에 공간의 제약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 튜브물감은 1860년대 런던에서 대량생산으로 상용화되어 화가들에게 공급되었다. 야외 작품 활동을 위한 용품들이 함께 개발되었고, 더불어 캔버스의 활용이 쉬워졌으며, 재료의 가격 또한 떨어지면서 예술가의 창작활동이 쉬워졌다.

튜브물감이라는 작은 혁신이었지만, 야외에서의 작품 활동이 가능해짐으로 인해 미술에도 빛의 효과가 부각되었고, 결국에는 인상주의가 부흥했다. 기술 진보가 이루어진 후에 유화 물감 뿐만 아니라 대리석, 청동, 종이 등이 미술 재료로 사용될 수 있었다. 작품의 영역이 다양해진 것이다.

인쇄업의 발전에 따라 다양한 종이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종이 값이 떨어지자 소묘 화가가 늘어났다. 이에 소묘자체가 미술의 독립적 장르가 되었다. 또한 인쇄업은 목판화 장르의 발전에도 도움을 주었는데, 인쇄 책자의 삽화로 주로 이용되었다. 현대에서는 합성수지를 재료로 한 아크릴물감 등이 발명되었다. 그 후 현대 미술은 지속적으로 다양한 재료가 개발되고 있으며, 회화 재료로 실용화 되고 있다.

음악 : 저장매체의 등장으로 시공간 제약이 사라짐

피아노, 바이올린, 신디사이저, 음량 조절장치의 발명 등 기술혁명으로 인해 장비 가격이 떨어졌다. 또한 저장매체가 생겨남에 따라 LP, 카세트, CD 등을 통해 사람들은 쉽게 음악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자본의 집약으로 인한 기술의 발전은 제작비의 절감으로 이어졌고, 이에 작가들은 소비자들의 취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새로운 기법을 창안하고 독창적인 세계를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음반과 라디오 덕분에 음악의 수요에 장소의 제약이 사라짐에 따라 교향악단의 생산성도 높아졌다.

한때는 음반이 생겨나며 고전 음악시장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지만, 디지털 음악은 그 이상으로 음악시장의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실제로 90년대 MP3가 퍼져나가면서, 음반시장이 위축되었고 이제는 MP3를 빼놓고는 음악 산업을 말하기 어려워졌다. 뿐만 아니라 휴대전화의 통화 연결음 등에도 음악이 쓰이는 등 디지털 음악시장은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문학 : 인쇄술로 도서 대량보급 가능

18세기 중반 미국에서 유명했던 책의 경우 당시 가격으로 소 6마리, 돼지 30마리 값이었다. 이후 인쇄기가 발명되고 자본이 투입되어 대량생산과 판매가 가능해지며 도서 가격이 크게 하락하게 되었고 독자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즉, 기술 진보와 경제 성장으로 출판 시장이 커지며 1인당 도서 구매량은 꾸준히 증가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언어가 표준화 되며, 문맹률 또한 매우 낮아지게 되었다. 인쇄기로 인한 종이 생산의 혁신이 출판시장의 부흥을 일으켰듯이, 오늘날에는 인터넷으로 인한 문자 파급력이 문학의 영역에서 새로운 변화를 유도한다.

예술의 상업화: 문화의 다양성을 보장하다

자본주의는 문화의 다양성을 지원하고 대중의 주류에서 벗어난 예술가들에게도 작품 활동의 기회를 부여한다. 음악 시장의 예를 보면, 비교적으로 기반이 탄탄한 대형 음반사가 생존력이 더 강하기 때문에 작은 음반 회사들은 시장에 진입하기 어렵거나 진입한다고 해도 장기간 생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비주류집단이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허용한다. 처음에 랩과 헤비메탈은 주류 음반사에서 거절당했으며 작고 독립적인 레이블(label)에서 성공하고 나서야 받아들여졌다. 또한 메이저 음반회사로부터 거절당한 흑인 리듬앤블루스 음악가들은 독립음반사를 통해 음반을 낼 수 있었다. 이들은 백인음악만 선호했던 라디오 방송을 대신해 작품을 전달했다.

자본주의 체제 내의 출판시장에서는 대안적인 매체가 번성할 수 있기 때문에 대형 출판사에서 거절된 책들은 소규모 출판사에서 출판이 가능하다. 상업 사회가 성장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문학은 더욱 다양해지고 창조적 활력을 띄게 된다. 국제적 명성을 누리는 작가들을 기업형 출판사의 마케팅 지원을 받기도 한다. 이윤 추구에 주력하는 이들 대형 출판사는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는 조력자가 되어 번역하고 판매를 독려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저급한 문화를 생산할 우려가 있어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하에서 예술가는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만든다. 고급예술에 대한 수요가 존재한다면 고급예술을, 저급예술에 대한 수요가 있으면 저급예술을 만들어 낸다. 즉, 시장이 저급문화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시장은 원하는 것을 반영할 뿐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장르소설로 매우 상업적인 작품으로 비판받았다. 오히려 시장은 다양성을 인정하며, 예술의 독점화를 막는다. /곽은경 자유경제원 시장경제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