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방민준의 골프탐험(93)- 0K! 줄 때는 관대하게, 받을 때는 인색하게

골프장에서 상대방으로부터 가장 받고 싶지만 상대방에게 주기는 싫은 것이 있다. 오케이(OK) 또는 기브(give)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concede(양보하다, 인정하다)’다.

그린에 올라온 볼이 핀에서부터 아주 가까운 거리에 붙었을 경우 상대방이 쉽게 넣으리라는 가정 아래 상대방이 1타만에 넣은 것으로 간주해 퍼팅 생략을 인정해주는 것이 OK 또는 기브다. 이때 적용되는 거리가 퍼터의 손잡이 부분을 뺀 길이(60~65cm)다. 퍼터를 거리를 재보아 손잡이 부분에 이르지 않으면 오케이를 주게 된다.

국내에서는 OK가 더 자주 사용되지만 미국에서는 give가 널리 쓰인다. 어원은 그린 위의 볼이 퍼터 손잡이 안쪽 거리에 있을 때 볼 동료가 상대방에게 ‘이 볼 원 퍼팅으로 넣은 것으로 치고 그냥 집게 해줘.’라는 뜻으로 “기브 미(give me)”라고 말한 데서 비롯됐는데 이를 줄여서 ‘기미(gimme)’라고도 한다.

골프를 사랑한다면 기브에 대한 철학을 세워둘 필요가 있다. 기브는 받았을 때는 안도감을 함께 얻지만 받지 못했을 때는 모멸감과 불안을 함께 얻는다.

기브란 엄격히 말해 일종의 자선행위다. 그것도 상대방의 자선을 기대한 자선행위다. 기브란 받는 쪽도 속이 편하고 기분이 좋지만 그 쾌감의 강도는 주는 쪽이 더 강하다. 기브를 준 사람은 시혜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자신도 언젠가 상대방으로부터 기브를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기 때문이다.
프로골퍼들도 스킨스 게임을 할 때는 너그럽게 기브를 주는데, 이는 자신이 다른 게임에서 기브를 쉽게 받기 위한 사전포석의 성격이 강하다.

골프가 사교적인 게임인 이상 기브를 없앨 수는 없다. 동반자와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자신의 관대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장점도 있다. 자칫 서로 어색해지고 이상한 긴장감이 감돌 때 주고 받는 기브는 게임에 윤활유 역할을 해준다.

   
▲ 골프를 즐기고 실력을 향상하려면 자신의 골프사전에서 기브 받기를 삼가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남에게 기브를 베풀 때는 후하게 하되 자신에게는 엄격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삽화=방민준
그러나 기브가 아무런 기준이 없이 남발될 때는 게임에 진지성을 없애 골프의 진수를 느낄 수 없게 한다. 골프란 적당한 긴장감이 감돌고 최소한의 기본 룰이 허물어지지 않고 지켜질 때 묘미가 더해지는데, 남발되는 기브는 긴장감과 함께 골프의 묘미를 앗아가버린다.

기브란 마치 우리 생활주변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는 대장균과 같아서 적절하게 있으면 큰 문제가 안 되지만 지나치게 많으면 탈이 난다.

기브란 상대방이 주면 사양하지 않고 기분 좋게 받지만 줄 때는 괜히 망설여지고 인색해진다. 그리고 기대했던 기브를 받지 못했을 땐 심한 모멸감과 함께 ‘과연 이 볼을 홀에 넣을 수 있을까?’하는 불안에 휩싸인다. 십중팔구는 퍼팅을 실패하기 일쑤다. 지나치게 습관적으로 기브를 받아온 죄값이다.

골프를 즐기고 실력을 향상하려면 자신의 골프사전에서 기브 받기를 삼가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남에게 기브를 베풀 때는 후하게 하되 자신에게는 엄격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애초에 기브를 기대하지 말고 아무리 짧은 거리라도 홀 아웃 하는 습관이 몸에 배게 해야 퍼팅실력도 늘고 자신감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이 기브를 주지 않아도 모멸감과 불안감에 빠져 퍼팅을 망치는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

기브에 관한 한, 받는 데는 인색하고 주는 데는 관대해야 한다. 지나치게 기브에 의존하다간 늘 상대방으로부터 시혜를 받는다는 비굴함, ‘혹시 기브를 안 주면 어떻게 하나?’하는 초조감, 기대했던 기브를 받아내지 못했을 때는 극심한 배신감이나 모멸감을 피할 수 없다.

상대방이 기브를 줄 생각도 않는데 스스로 “기브”라고 외치며 홀에서 멀리 떨어진 볼을 집어 올리는 철면피들은 ‘난 그런 감정 못 느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런 철면피는 골프계에서 외면당하기 마련이다.

영국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존 F. 케네디 미국대통령의 부친은 전 가족에게 골프를 치도록 하여 부인 로즈 케네디 여사는 80세가 넘도록 골프를 즐겼다. 케네디 대통령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골프를 잘 치는 대통령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케네디 대통령이 어느 날 플로리다주 세미뇰 골프클럽에서 골프클럽회장과 골프를 치는데 파4의 첫 홀에서 드라이브를 잘 치고 세컨드 샷으로 그린에 올렸다. 그린에 와보니 볼이 핀에서 3피트(91cm)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어 ‘첫 홀부터 버디로 나가는구먼!’하고 클럽회장을 쳐다보았으나 클럽회장은 기브를 줄 듯한 눈치가 아니었다.

케네디: 이게 기브가 아니면 세미뇰에 기브가 있긴 있소?
회장: 있지요. 그러나 그렇게 급히 있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막 시작했는데 연습 겸 치시고 이곳 퍼팅라인도 익힐 겸 겸사겸사 좋은 일 아닙니까?
케네디: 좋소! 그럼 내 볼 마크 할 테니 빨리 치시오. 게임 끝내고 국세청에 시찰 갈 계획입니다.
회장(케네디 대통령의 이 말에 급히 볼을 집어주며): 아 물론 기브를 드려야죠. 그냥 퍼팅연습하시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일화는 기브의 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비록 대통령이라고 해도 받고 싶고, 대신 주는 쪽에선 상대방이 비록 대통령이더라도 주기 싫을 것이 바로 기브라는 것이다. 물론 미국의 골프장도 우리나라에서처럼 국세청에는 꼼짝 못한다는 사실도 함께 전해주고 있다.

빌리 그래엄 목사도 골프광으로 소문나 있다. 그는 플로리다주 베로비치 골프장에 들러서 정기적으로 선교집회의 여독을 풀곤 했는데 그는 성직자의 너그러움 때문인지 4피트 이내는 기브를 주는 버릇이 있었다. 따라서 상대방도 첫 홀에서 2피트, 2번 홀에서 2.5피트, 3번 홀에서 3피트, 이렇게 계속 OK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18번 홀 그린에서 그래엄 목사는 20피트 퍼트를 시도하다 6피트를 지나쳤다. 그리고 상대방의 7피트 거리를 기브 주니 상대방도 그래엄 목사의 6피트 짜리 퍼팅을 기브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20피트 거리를 두 번의 퍼팅으로 넣은 셈이다. 그래서 골프에서 그래엄 목사를 이기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는 얘기가 자자했다고 한다.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