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01)-36가지 임기응변의 군사계책
『삼십육계』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중국의 일곱 가지 병서(兵書)를 무학칠서(武學七書) 또는 무경칠서(武經七書)라 일컬어왔다. 손자병법, 오자병법, 사마법, 울료자, 이위공문대(당리문대), 육도, 삼략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손빈병법, 장원, 삼십육계까지 포함하면 무경십서가 된다. 서양의 병서로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단연 독보적이다. 여기에 앙투안 앙리 조미니의 <전쟁술> 또한 버금가는 병서다.

병서는 단순히 군사적 전략과 전술 차원을 넘어, 거기에 담긴 지혜가 국가 및 기업의 경영은 물론 인간관계와 처세 등에 광범위하게 응용될 만큼 우리에게 친숙하고 유용하다. 특히 한자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의 병서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인구에 회자되어왔다.

우리 속담에 “삼십육계 줄행랑”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상대를 만나면 그저 도망치는 게 상책이라는 의미다. <삼십육계>는 말 그대로 36가지 군사 계책을 담은 병서다. 그 가운데 서른여섯 번째 계책이 바로 ‘주위상(走爲上)’으로 ‘삼십육계 줄행랑’에 가까운 출처다.

하지만 ‘주(走)’가 ‘달아날 도(逃)’와 다르다는 점에서 우리가 일상어로 쓰는 ‘삼십육계 줄행랑’의 의미와는 다르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의미가 원전의 뜻에 더 부합한다. 즉 “일단 달아났다가 후일을 도모하라”로 새기는 게 맞을 듯싶다.

사실 <삼십육계>는 저자도 확실하지 않다. 일단 역자는 1500년 전 남북조 시대의 송나라시기에 활약한 명장 단도제(檀道濟)가 <삼십육계>의 원형을 만들었을 공산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가필하여 지금의 형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사이에 민간에 널리 퍼진 것으로 알려진다.

무경십서 중 현대 한국인에게 가장 널리 익히는 책은 역시 손자병법이다. 국내에 출판된 책만 해도 수백 종이 넘는다. 그 다음에 독자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병서는 무엇일까? 오자병법? 손빈병법? 아니다. 의외로 무경칠서에도 들지 못했던 <삼십육계>가 40여종이 출판되어있을 정도로 손자병법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육도삼략이 20여종, 나머지 병서는 한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적으니 <삼십육계>가 단연 주목을 끈다. 현재 출판된 ‘삼십육계’의 제목을 단 책들은 원전 <삼십육계>의 역서나 해설서도 있지만, 대부분 36가지 계책을 경영학, 심리학, 인간관계학 차원으로 치환해서 각각의 계책을 해당 전문 분야별 방략으로 풀어낸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현대인의 삶에 응용의 폭이 넓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삼십육계>가 이렇게 인구에 회자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36가지 계책이 모두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되어 있어 하나하나의 계책이 간결하여 그 의미가 보다 명확하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특히 36가지의 전략과 전술이 새롭게 창안된 것이라기보다 중국의 오랜 역사에 축적되어 이미 대중들에게도 익숙해진 다양한 고사(故事)와 문헌에서 차용하여 이를 군사적 전술로 치환하여 설명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4계 이일대로(以逸待勞), 즉 “쉬면서 적이 지치게 만들라”는 <손자병법>에서 나왔고, 제6계 성동격서(聲東擊西), 즉 “동쪽을 말하고 서쪽을 쳐라”는 <한비자>에서 나왔다. 제18계 금적금왕(擒適擒王), 즉 “적을 칠 때는 대장부터 잡아라”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전출색>에서, 제34계 고육계(苦肉計), 즉 “자해 수단을 써 심장부로 침투하라”는 <삼국연의>에서 따왔다.

이렇듯 우리가 어딘가에서 읽었거나 들었던 성어들이 종합적으로 취합되어 군사상의 전략과 전술로 재설정되었다는 점에서 그 계책에 친숙감을 느끼게 되고 의도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이는 <삼십육계>가 모든 병서들의 전략과 전술의 핵심을 잡아내고 종합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장은 모든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의 계책을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실용적으로 활용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논의의 깊이가 다소 부족하여 본격적인 병서로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삼십육계>가 <주역>의 음양론을 병법의 근간으로 삼아 모든 계책을 이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탁월한 차별성이다. 특히 병법을 넘어 대중에게 다양한 방면으로 활용됨에 있어서는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만큼 시사점의 응용력이 뛰어나다는 의미다.

무경십서 가운데 손자병법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이유는 임기응변의 기만술에 뛰어난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손자병법>이 <도덕경>의 음양론에 입각해 부득이용병(不得已用兵)의 부전승(不戰勝)에 방점을 찍고 있는 데 반해, <삼십육계>는 <주역>의 음양론에 입각해 임기응변(臨機應變)의 구체적 표현인 기정병용(寄正倂用)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삼십육계>가 시종 64괘의 괘사를 언급하며 병법을 논하고 있는 이유다.

예를 들어, 제3계 차도살인(借刀殺人), 즉 “빌린 칼로 제거하라”는 손실과 이익이 서로 덜어내고 채워주는 상호보완 관계에 있음을 논한 <주역>의 손익영허(損益)盈虛)의 이치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점이 그렇다.

<삼십육계>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계책들이 많다. 제23계 원교근공(遠交近攻), 즉 멀리 제휴하고 이웃을 공격하라, 제31계 미인계(美人計), 즉 미인을 이용해 유인하라, 제33계 반간계(反間計), 즉 적의 첩자를 회유한 뒤 역이용하라 등 무수히 많다. 특히 각 계책마다 역사상 실제로 있었던 또는 전설처럼 전해진 사례들을 두세 건씩 풍부하게 싣고 있어서 더욱 이해하기 쉽다.

<삼십육계>는 승패의 갈림길에 처한 전장에서 승리하기 위해 바로 쓸 수 있는 임기응변의 계책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적을 은밀하게 속이는 기만전술로 점철되어 있다. 특히 역사적 사례에서 전술로 적용할 만한 것을 추출하여 귀납적으로 계책을 만들다보니 냉정한 현실주의적 시각이 짙게 배어있다. 이 점이 이 책이 갖고 있는 최대의 장점이자 위험성이다.

특히 각 계책을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없기 때문에 계책을 쓰고자 하는 사람의 정확한 상황인식과 분별력이 요구된다. 이 책이 지나치게 적을 속이는 궤도(詭道)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전쟁이 아닌 전문화되고 복잡다단해진 경영일선이나 사회의 인간관계에서 삼십육계류의 계책을 지나치게 맹신하여 이를 확대 적용하려는 시도는 경계할 필요도 있다는 의미다. 현대의 복잡한 요인들이 얽히고설킨 상황에서는 일시적 기변(機變)보다 행위자의 진심과 지속가능한 책략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삼십육계> (저본 : 리싱빈(李興斌), 『삼십육계신해』) 『무경십서4』, 신동준 역주, 역사의 아침(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