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명분과 체면을 밑천으로 움직이는 정치학적 낭만론
자유경제원은 자유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인들과 함께 ‘시장경제로 본 예술’ 워크숍을 개최했다. 예술을 보는 사회적 인식이 보다 높아졌으면 하는 취지로 개최된 25일 워크숍에서 참석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세션 3 ‘예술, 다양성으로 보자’ 토론자로 참석한 조우석 미디어펜 주필은 “좌파 문화권력은 반대한민국 친북이라는 소수의견을 사회에 주류인양 포장해 굳히기에 들어가려 한다”며 “건전한 다수 견해를 포함해 여하한의 다른 목소리는 깔아뭉개는 ‘전체주의 성격의 대못’을 견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래 글은 조우석 주필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조우석 주필

좌파 문화권력의 허구와 싸울 무기로 ‘문화적 현실론’을 제안한다

그게 한국문화 질식시키는 좌파 전체주의에 맞서는 방법

이문원-최공제 두 발제자의 공통된 입장을 ‘문화적 현실론’으로 토론자는 이해했다. ‘문화적 현실론’란 용어는 고백하건대 토론자가 만들어 오늘 첫 선을 보이는 것이다. ‘문화적 현실론’이란 무슨 뜻이며, 어떤 내용을 담는 그릇인가? 예술이란 자본과 산업이 부추기는 더러운 욕망 따위와는 초연하며, 때문에 예술가는 배고파야 한다는 광범위한 사회적 통념이야말로 위선이고 허구에 가까운데, 그런 입장과 정반대에 서는 인식체계를 담는 그릇을 말한다.

그걸 나는 ‘문화적 현실론’이라고 규정하고, 우파에서 널리 쓰기를 이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바이다. 왜? ‘문화적 현실론’이란 허구야말로 주로 좌파동네에서 통하는 거짓말인데, 이런 거대한 허위의식과 맞서는 인식의 틀, 정직한 관점이 하나 있어야 우리가 원하는 효율적인 문화전쟁의 수행이 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문화적 현실론이란 실은 정치학에서 쓰는 용어인 정치학적 현실론(political realism)에서 암시를 받아 만든 신조어다.

정치학적 현실론이란 세계1,2차 대전이 연속해 터지면서 우리가 원하는 평화라는 게 단순한 희망 내지 소망 따위만으로 이뤄질 수 없으며, 물리적 힘의 균형이 확실한 카드라는 인식을 총칭한다. 동서냉전과 핵 개발이 열전(熱戰)으로 터지지 않고 효율적으로 관리된 것만 해도 순전히 그 덕이 아니던가? 냉전시대 외교 전략이란 역설적이지만, 대부분 공포의 핵 억지 전략이었다. (사족이지만, 지금 북한 핵실험의 국면에서 한국에서 독자적 핵무장론이 힘을 받지 못하는 것도 핵은 핵으로써만이 억지할 수 있다는 현실론에 눈 감고 사는 한국사회 집단정서와, 지식인 그룹의 거대한 허구성 때문이다.)

즉 좌파 따위가 말하는 허구적인 성격의 평화주의, 동서체제 수렴론(자본주의-공산주의가 합쳐서 제3의 하나가 된다는 거짓말로 주로 1970년대 등장했다) 등과는 현저하게 구별되는 게 정치학적 현실론이다. 실은 <군주론>의 니콜로 마키아벨리, <리바이어던>의 토마스 홉스 이후 수백 년 동안 다져진 게 서구 지성사 핵심이 그것이다. 그게 훗날 헨리 키신저 같은 인물을 배출해냈지만 지금도 국제정치학에서 신학-철학에 이르기까지 서구 인문사회과학의 뼈대로 작용한다.

하바드대-예일 등 명문대 출신의 정치 리더나 학자들이 보수 우파 계열의 사고 틀을 가지고 움직이며, 세계를 경영하겠다는 ‘제국의 마인드’를 갖추고 미국정치를 끌고 나가는 것도 그런 학문적 백그라운드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대한민국 우리의 인문학은 ‘현학적인 문약(文弱)’이거나 ‘위선적 평화주의 옹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정치학계를 포함한 사회과학도 비슷한 실정이다. 우리는 안다. 그건 세계경영은 꿈도 꿔본 일이 없고, 강하고 뛰어난 문명에 정복 당해왔던 작은 나라, 비루하면서도 속으로만 앙앙불락하는 기형적 정신세계를 가진 한국적 특징이다.

   
▲ 좌편향은 아카데미즘의 영역으로 성큼 진입한 지 오래이며, 어느덧 초중고교 교과목의 표준적 지위를 차지했다. 반(反)대한민국-친북 성향을 포함한 좌파적 가치는 지식정보는 물론 문화 영역에서도 이미 헤게모니를 구축했다. 사진은 17일 성공회대 피츠버그홀에서 열린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 추모의 밤’ 행사./사진=연합뉴스

현실정치권은 정치의 요체인 안보문제에서 왜 이렇게 서툴고 버벅대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이런 상황은 모두 정치학적 현실론이 없이 아직도 근대 이전 조선왕조의 명분과 체면 따위를 밑천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을 뭉뚱그리면 체제 수호에 눈감은 ‘정치학적 낭만론’(이 용어는 정치학에서 학문적 시민권을 인정받은 용어임)이 되며, 속성상 좌파 쪽에 붙게 된다. 그런 원리는 문화예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구조가 같기 때문이다. 좌파가 한국사회에 널리 유포하고 있는 그런 식의 인식이란 한 마리도 위선적‘문화적 낭만론’으로 요약된다. (경제적 자유주의란 입장도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경제학적 현실론’으로 분류된다. 때문에 반(反)시장경제 어쩌구와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는 좌파의 선동과, 속화된 대중의 인식이란 ‘경제학적 낭만론’이 될 것이다.) 가늠컨대 두 발제자는 그걸 깨고 싶어서 앞서의 발제문을 낭독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문원은 경제성장과 문화의 상관관계를 다양한 팩트를 동원했다. 최공제의 경우도 “김태희가 밭일하는 우즈베키스탄, 보통여자들이 바비 인형으로 패션산업에 종사하는 우크라이나”를 꽤 설득력있게 보여줬다.

그러나 유감이지만 두 가지의 한계가 보였음을 지적하려 한다. 첫째 자신들과 우파가 공유해야 할 인식의 틀을, 개념을 어떻게 잡아갈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래서 아쉽게도‘문화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데 그친 것인데, 앞으로는 토론자가 제시한 문화적 현실론이란 효율적인 방패와 창으로 한번 무장해보길 권한다. 그래서 경제성장이 문화발전에 바탕이라는 것, 그걸 위해 다양성 확보가 숙제라는 발제자들의 결론이 설득력이 있다. 그래야 목소리에 힘도 붙게 된다. 분명한 것은 그게 현단계 우파가 개진할 수 있는 문화론의 핵심이자 최선이라는 점이다.

둘째 토론자가 보기에 핵심이 또 하나 빠져있다. 다양성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좌파의 음모부터 깨부숴야 한다는 점이다. 일테면 인문사회과학 커리큘럼을 포함한 초중고 각급학교의 편제와 교과서 내용에 스며들어 있다. 좌편향은 아카데미즘의 영역으로 성큼 진입한 지 오래이며, 어느덧 초중고교 교과목의 표준적 지위를 차지했다. 반(反)대한민국-친북 성향을 포함한 좌파적 가치는 지식정보는 물론 문화 영역에서도 이미 헤게모니를 구축했다.

문제는 이런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우파의 움직임을 음험한 좌파세력이 막고 있으며, 그게 좌파의 전체주의적 문화전략이다. 저널리스틱하게 말하면 ‘전체주의 성격의 대못’을 요긴한 곳에 박아둬 한국문화를 좌파 일색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좌파는 ‘전체주의 성격의 대못’을 왜 박으려 하는데, 건전한 다수 견해를 포함해 여하한의 다른 목소리는 깔아뭉개는 동시에 엄연히 소수의견을 사회에 주류인양 포장해 굳히기에 들어가려는 위험스러운 움직임이다.

그게 바로 국회에서 거듭 시도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차별금지법 제정 움직임이나, 우파 문화 움직임에 ‘극우’ 낙인찍기의 형태로 개진되고 있다. 때문에 앞으로 문화 관련 논의가 힘을 얻으려면 이점을 짚고 상대방을 압박해야 한다. 오늘의 짧은 논의는 이런 긴 문화전쟁을 위한 신발 끈 새로 매기의 일환일 것이다. /조우석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