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02)-농사, 땀과 노고의 정직한 보상
헤시오도스(기원전 8세기) 『일과 날』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헤시오도스는 기원전 8세기 경 호메로스와 쌍벽을 이루던 고대 그리스의 서사 시인이다. 호메로스가 단일의 실존인물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헤시오도스가 역사적 실제인물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대체로 헤시오도스는 호메로스와 동 시대에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 사람은 고대 그리스 문화의 형성과 그리스인들의 사유방식과 행동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동일한 반열에 있다. 하지만 두 서사 시인의 작품 특징은 대조적이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통해 영웅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면, 헤시오도스는 <일과 날(Ergakai Hemerai)>에서 보통사람들의 삶, 특히 농부들의 농사활동과 생활의 지혜를 노래하고 있다.

<일과 날>의 핵심주제는 농부들의 농경활동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시기 등이다. 계절별로 농사의 준비에서부터, 파종, 수확, 타작, 그리고 포도주를 담그고 일 년 농사를 마무리하기까지의 농부가 챙겨야 할 일들을 꼼꼼히 제시하고 있다. 일종의 농사력(農事暦)인 셈이다. 여기에 부분적으로 항해의 적기에 대해서도 부연하고 있다.

또 ‘날’의 길흉(吉凶)을 노래하는 데, 자녀의 탄생일, 파종이나 타작, 배의 건조, 결혼의 택일 에 있어서 길(吉)한 날과 흉(凶)한 날을 제시한다.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의 기술 내용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측면과 신비적이고 미신적인 측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농사와 관련된 활동을 기술한 ‘일’ 부분에서는 계절의 변화에 따른 자연적 조건에 부응하는 농사 및 항해에 관련하여 농부가 해야 할 일을 현실감 있게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강력하신 제우스께서 가을비를 내리게 하신 뒤로 작열하는 태양의 힘이 땀나게 하는 더위를 늦추고 사람의 몸이 변하여 훨씬 더 경쾌해지지만 그때는 나무가 무쇠에 베어져 땅에 잎을 쏟고 자라기를 멈추어도 어느 때보다도 벌레가 쏠지 않으니, 명심하고 있다가 나무를 베시라. 그것이 계절에 맞는 일이라오.”

반면 ‘날’ 부분에서는 합리적 근거가 없는 택일법이 권장되고 있다. 스무날 한낮에 박식한 아들을 낳을 수 있다든가, 스무하룻날 아침이 술독을 열기에 가장 좋다는 것 등이 그러하다.

   
▲ 헤시오도스 두상
헤시오도스는 <일과 날>에서 노동의 신성함과 근면한 농사활동을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그는 땀과 노동을 신성한 의무로 격상시키고 있다. 스스로 씨 뿌리고 수확하여 일용할 양식을 자급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노래한 것이다.

“바다 가까이 사는 자들을 위해서도,
파도치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숲이 우거진
산골짜기의 비옥한 땅에 사는 자들을 위해서도
그대는 옷을 벗고 씨 뿌리고, 옷을 벗고 소들을 몰고, 옷을 벗고 수확하시라.
데메테르 여신의 일을 모두 제때에 보살펴 모든 것이 제때에 자라기를 바란다면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나중에 궁핍해져서 남의 집을 돌며 구걸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오.”

헤시오도스에게 농사는 자연의 질서에 부합하는 인간의 질서 있는 활동이다. 인간의 땀과 노고에 대해 정직한 보답을 얻게 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사일은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기도 하다. 전쟁을 통해 그리스 세계를 수호하는 것도 그리스인에게 중요한 책무였지만, 농사와 항해를 통한 교역 역시 그리스인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지탱하게 하는 신성한 활동이었던 것이다. 도시 국가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던 당시 그리스 세계에 농사일은 인간의 질서 있는 활동과 수련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농사일은 자연이 주는 적기와 늘 부합해야 하고, 규칙적인 활동이 뒤따라야 최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리라.

“불화(不和)는 한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는
두 종류가 있소. 그중 하나는 알고 보면 칭찬받겠지만
다른 하나는 비난받아 마땅하니, 둘은 서로 기질이 다르오. ……
그중 하나는 잔인하게도 사악한 전쟁과 다툼을 늘리니
어느 누구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소.……
그러나 다른 하나는…… 인간들에게 큰 이익이 되게 하셨소.
그런 불화는 게으른 사람도 일하도록 부추긴다오,
왜냐하면 일에서 처지는 자는 부자인 다른 사람이 서둘러
쟁기질하고 씨 뿌리고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을 보면
저도 부자가 되려고 이웃끼리 서로 경쟁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이런 불화는 인간들에게 유익하다오.
그리하여 도공은 도공에게, 목수는 목수에게 화내고,
거지는 거지를, 가인(歌人)은 가인을 시샘하는 것이라오.”

헤시오도스는 인간끼리의 선의의 경쟁이 보다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통찰했다. 불화(不和)의 순기능을 간파한 것이다. 마치 개인들의 이기심이 경제활동의 기초를 된다는 점을 발견한 아담 스미스보다 무려 2500여 년 전에 헤시오도스는 이미 깨달은 것이 아닐까.

“일은 수치가 아니오, 일하지 않는 것이 수치요.
그대가 일하면 게으름뱅이는 곧 그대가 부자가 되는 것을
시기할 것이오. 하지만 부에는 위엄과 명망이 따르는 법이오.
그대의 운수가 어떻든 일한다는 것은 더 바람직한 것이오.”

헤시오도스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숭상했다. 농사는 가장 정직한 노동을 필요로 했다. 그의 농사의 권면은 당시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함께 농토의 확장을 통한 식량의 확보가 절실했던 고대 그리스의 시대적 환경의 산물인 측면도 있다. 헤시오도스는 그리스인들의 고단한 삶의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러한 악조건을 근면한 농사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나가도록 사람들을 북돋우고 있다.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은 노동의 정당한 가치를 그리스인들에게 심어주고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아울러 그리스인 자신들이 그리스의 척박한 환경에서 체험한 농사의 오랜 지혜를 응축해 냈다는 점에서, 영웅적 신화가 아닌 그리스인에게 대대로 물려주는 또 하나의 인간들의 서사(敍事)이다. 실제 성실한 농부였던 헤시오도스였기에 살아 있는 묘사가 가능했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헤시오도스는 농부들의 활동과 대인관계에 대해 현명한 조언을 하면서도 가정생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그가 농사의 성공을 위한 공동체의 효율적인 활동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공백 부분을 300여년 후에 크세노폰이 채우고 있다. 크세노폰은 <경영론(Oikonimia)>에서 가정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아내들의 역할, 그리고 농장 관리인이나 노예들을 관리하는 기법에 대해서 상술했다. 곁들여 읽으면 좋은 책이다.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일과 날>, 『신들의 계보』, 헤시오도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11, 2쇄), pp.97~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