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03) 인간 삶이 투영된 신들의 세계
헤시오도스(기원전 8세기) 『신들의 계보』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우주와 인간의 탄생 과정은 늘 신비롭다. 우리가 명쾌하게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서는 과학과 논리가 한계를 드러낸다. 신화는 이런 이성적 인식의 공백을 메워준다. 인간을 넘어선 세계에 신들의 세계가 있다. 인간의 생존 공간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 그게 바로 신의 역사이자, 신화이다. 신화는 건조한 우리 일상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기원전 8세기에 호메로스와 쌍벽을 이루던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시인 헤시오도스는 오랫동안 그리스 세계에 전해져 온, 그리고 구전으로 사랑받아 온 우주와 신의 탄생 신화를 정리해 냈다. 그는 보이오티아 지방에 뿌리내린 살아있는 신앙과 전승된 이야기들, 고대 오리엔트의 종교 문학에서 유래한 신들의 계승 신화를 한데 묶어 ‘신들의 계보’를 밝혀냈다.

<신들의 계보>, 일명 <신통기(神統記)>는 그리스 신화의 가장 오랜 문헌으로, 수많은 신들의 가계도와 관계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로마시대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변신이야기>를 통해 그리스 신화를 종합하는 데에도 중요한 출처가 되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가 인간사 속에 신화를 간간이 담고 있다면, <신들의 계보>는 인간의 주변세계를 체계적이고 포괄적으로 기술하면서도 오직 신들의 탄생,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질투, 대결과 전쟁에 초점을 맞추어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 신화를 알지 못하면 서양 문명과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리스 신들의 이야기는 인간사 곳곳에 스며들어 인간들의 삶을 간섭하고 조종하며 때로 북돋웠다. 각각의 신들의 캐릭터와 행태는 인간들의 또 다른 유형의 대변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삶의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신들의 역사와 그리고 개별적인 신들이 벌인 희로애락과 마주해야 한다.

태초의 카오스(Chaos)는 “모든 신들을 낳아준 원초적 생명력” 가이아(Gaia)를 낳는다. 가이아는 우라노스를 낳고 우라노스는 크로노스를 낳고, 크로노스는 제우스(Zeus)를 낳는다. 제우스가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주관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조상과 종족과의 투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가이아와 크로노스가 공모하여 친부인 우라노스를 거세시키자, 거기에서 떨어진 핏방울들이 복수의 여신들과 나무의 요정을 낳았다. 던져진 우라노스의 남근은 파도치는 바다를 떠다니다, 불사(不死)의 살점에서 흰 거품이 일어 한 아름다운 소녀가 태어났다. 바로 아프로디테다.

위대한 크로노스는 불사신 가운데 유일한 왕의 명예를 누리고자 아내 레아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집어삼켰다. 자신이 제 자식에게 제압될 운명이라는 것을 우라노스한테서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의 신도 자신의 운명을 비켜가지 못했다. 레아는 제우스를 낳게 되자, 그를 몰래 빼돌리고 크로노스에게는 자식 대신 돌덩이를 주어 삼키게 한다.

결국 크로노스는 아들 제우스의 계략에 져서 삼켰던 자기 자식들을 모두 게웠다. 제우스는 대지에 갇혀있던 아버지 형제들까지 속박에서 풀어준다. 제우스는 그 대가로 천둥과 불타는 벼락과 번개를 얻어, 인간과 불사신을 다스리는 최고신이 된다.

이렇듯 그리스 신화는 신의 세계에서도 아들이 아버지를 부정하고 극복하는 세대 간의 투쟁을 통해 세상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크로노스는 ‘시간’을 의미한다. 신들의 통치권이 크로노스에서 제우스로 넘어가는 것도 시간의 관념에서 보면 자연의 순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신화의 의미는 “제우스가 어떻게 막강한 권력 수단을 손에 넣어 그것으로 우주의 통치권을 장악한 다음 지금도 모든 저항을 분쇄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지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그리스 원주민을 밀어내고 도래인들이 고대 그리스를 건설해 나가듯. 마치 “피정복자들에 대한 정복자의 합법적인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써 폭력적 힘의 사용을 정당화하듯 말이다.

▲ 헤시오도스 두상

제우스가 주관하는 불사신의 세계에는 수많은 신들이 탄생하여 제각각의 역할을 맡는다. 우리는 그리스 신화에서 온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아틀라스, 인간에게 불을 전해 주고 독수리가 불멸의 간을 쪼아 먹도록 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는 조우한다. 또 제우스와 인간 여인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 지혜의 여신 아테네, 그리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 지하세계의 제왕 하데스 등 무수한 불사신과 반신, 요정들을 만나게 된다.

신들의 계보에는 신도, 반신도 인간도 아닌 독특한 자손들도 있다. 비난, 고초, 응보, 기만, 불화, 패주, 공포도 신들의 자식이다. 카오스의 자손인 밤이 고초와 기만을 낳았다. 이런 형이상학적 관념마저 신의 계보에 오른 것은 흥미롭다. 신들이 인간사의 현상에 간여할 뿐만 아니라, 인간 인식의 내면에까지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는 안 나와 있지만, 그리스 최초의 걸출한 서정시인으로 호메로스와 비견할만한 명성을 누린 아르킬로코스의 '섭리' 라는 시 한편을 통해 그리스인들이 신을 어떻게 인식했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신의 초월적 능력에 대해 경배하는 의식을 읽을 수 있다.

“신은 모든 일을 쉽게 뒤집을 수 있다.
때로는 신은
재난을 만나 검은 땅에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비록 지금 땅 위에 굳게 서 있을지라도
그의 등을 후려 갈겨 땅에 쓰러뜨리기도 한다.
그러면, 많은 고난이 찾아오게 되고
그는 정신이 혼란해져,
집을 잃고 궁핍에 빠져 헤매게 된다.“

그리스 신들은 인격신이다. 인간과 똑같은 결격과 모순을 안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다. 인간과 격을 달리하는 경건하고 도덕적이며 기독교적인 초월자는 아니다. 불환전한 인간과 다름없이 사랑하고 질투하며, 전쟁과 복수를 거리낌 없이 행한다. 불멸의 신과 필멸의 인간을 갈라놓는 건 오로지 삶의 영속성의 여부일 뿐이다. 그럼에도 고대 그리스인들이 절대적으로 신을 경배하고 중시했던 것은, 신들이 인간과 같은 감성과 한계를 가졌음에도 한편으로 인간사를 좌우할 수 있는 초월적 힘이 있다고 믿었던 때문이 아닐까.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추천도서: <신들의 계보>, 『신들의 계보』, 헤시오도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11, 2쇄), PP.17~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