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生覺)은 한자어이다.

동물과 사람의 근본적 차이점은 바로 생각(生覺)이다. 동물과 사람은 모두 머리가 존재한다. 동물과 식물의 차이점은 머리가 ‘있고 없고’인데, 동물과 사람은 모두 머리가 존재하지만, 머리의 사용방향과 깊이에 따라 차이점이 있다. 특히 동물은 손을 사용하는 방법이 땅에 붙어있고, 사람은 손을 땅에서 분리해서 사용할 수 있다. 손을 통해 각종 도구를 만들면서 인류는 불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됐으며, 문자를 만들어서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말’의 발달도 다른 동물들과 매우 다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생각’일 것이다.

보통 ‘생각’을 순우리말로 착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다. 한자어다. 생명(生命), 생활(生活), 생령(生靈), 생기(生氣), 생수(生水), 생모(生母), 생물(生物), 생존(生存), 생일(生日), 생장(生長), 생선(生鮮), 생생(生生), 생리(生理), 생색(生色), 생후(生後), 생가(生家), 생강(生薑), 생식(生食), 생률(生栗), 생동(生動) 등의 글자를 보면, 생각(生覺)이 한자어라는 것에 의문이 없을 것이다. 특히, 생동(生動)이 살아있는 움직임이듯 생각(生覺)은 살아있는 깨달음이다.

깨달을 각(覺)을 알려면, 배울 학(學)을 알아야한다. 배울 학(學)은 아이들(子)이 책상위에서 손으로 나뭇가지를 가지고 놀고 있는 모습이다. 爻를 놓고서 다양한 해석을 한다. 스파르타식 교육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爻’을 매로 풀이한다. 아이들이 매를 맞으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한다. 반면, 아이들의 교육에는 ‘칭찬’과 ‘자율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교육자들은 ‘爻’를 산가지로 보고서, 아이 스스로 산가지로 놀고 있다고 풀이한다. 어쨌든 배움은 곧 아이들이 손으로 뭔가를 하는 것이다.

‘子’ 대신에 ‘見’이 들어간 글자가 ‘覺’이다. 배움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인데, 깨달음은 바로 ‘보는 것’이다. 배움과 깨달음은 분명 다르다. 깨달음은 배움으로부터 출발한다. 배움은 지식의 전달이고, 깨달음은 그 지식이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된 것을 말한다.

암기를 했다면 그것은 ‘學’이다. 암기한 지식을 완전히 이해해서 응용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면 ‘覺’이다. ‘覺’은 완벽한 이해를 의미한다. 어떤 지식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게 되면, 그 지식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사건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학(學)과 각(覺)의 차이는 ‘눈으로 보느냐 못보느냐’처럼 하늘과 땅의 차이다.

‘생각의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한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어떠한 생각의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든 사건은 정반대로 해석된다. 가장 쉬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2007년 10월 故노무현 대통령은 故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다. 현재 그 사건이 정치적 이슈다. 보수진영에 해당하는 새누리당은 정상회담 회의록 원본에 대해서 “사초실종”이라면서 민주당을 공격하고, 진보에 해당하는 민주당은 “사초삭제”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가 따져봐야할 것이 있다. ‘史草’가 무엇인가 조선시대 사관들이 기록했던 문서가 바로 ‘사초’였다. 사초(史草)는 본래 없애는 문서가 맞다. 그런데, 그 시점이 문제다. 조선시대의 경우 사초(史草)는 반드시 그 다음 정권에서 실록을 기록한 이후에 없앴던 것인데, 민주주의로 넘어오면서 차기 정권으로 비밀이 넘어가게 되면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되므로 비밀문서를 소각하는 사건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초(史草)에 대한 결정을 해당 정권에서 실시하고, 역사에 해당하는 실록을 기록한 이후에 자료에 해당하는 그 사초(史草)를 없앤 것인데, 이것을 놓고 서로 법률적 공방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의 관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무엇이 옳은가 사초(史草)를 없앤 민주당이 옳은가 사초(史草)가 실종됐다고 주장하는 새누리당이 옳은가

조선시대에 삼정승이 있는데,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있었다. 한자어에서 우측은 반드시 좌측보다 높다. 그런데 왜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은 것일까 그 이유는 왕을 기준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왕이 볼 때 좌의정은 동쪽에 있고, 우의정은 서쪽에 있다. 동쪽이 서쪽보다 높기 때문에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은 것이다. 왕은 반드시 남쪽을 보고 앉아있었으므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신하는 북쪽을 보고, 왕은 남쪽을 보고 있으므로 언제나 방향설정이 정반대이고, 이러한 차이 때문에 정반대의 해석이 항상 존재한다.

사초(史草) 문제도 결국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 아마도 좌익과 우익으로 광복초기부터 정쟁(政爭)을 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새는 분명 우측날개(右翼)와 좌측날개(左翼)를 함께 펼치면서 날 수 있는 것인데, 한국 사회는 좌익과 우익이 지금껏 투쟁하였으므로 날지 못하는 슬픈 새가 되었던가 실로 안타까울 뿐이다. 생각의 관점을 화합(和合)으로 변경할 때 진정한 평화(平和)가 국회와 정부에 찾아오지 않을까

파랑새처럼,결국 생각의축복이 가장 아름다운 우리의비상(飛上)하는 날개인 것이다.

자화상 바위(월명동 소재) 월명동에 위치한 자화상 바위는 관광객이 보는 관점과 위치에 따라 자화상의 얼굴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해당 사진은 45도 위치에서 촬영했다.
▲월명동에 위치한 자화상 바위는 관광객이 보는 관점과 위치에 따라 자화상의 얼굴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해당 사진은 45도 위치에서 촬영했다. 자화상 바위(월명동 소재_월명동 돌축제 전시 작품) / 장창훈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