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04) 덕의 실현이 최상의 행복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 『에우데모스 윤리학』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했던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응답했다. 그는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해 우리에게 그 해답을 제시했다. 그의 행복론의 결정체가 바로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에우데모스 윤리학>이다.

<에우데모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분야 대표 저작인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그의 ‘덕의 윤리학’을 보완해주는 대표작으로 한 쌍을 이룬다. <에우데모스 윤리학>이 덜 알려진 이유는 기원 후 2세기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주석한 아스파시오스가 <에우데모스 윤리학>의 저자를 에우다모스라고 여긴 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예거와 폰 아르님 등 일군의 학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현재 학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작(眞作)으로 인정받는 추세이다. 

<에우데모스 윤리학>은 전체 8권으로 이루어졌다. 제4권에서 제6권까지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제5권에서 제7권과 겹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인간의 행복이 최상의 덕의 실현에 달려있다는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입장이다. 이는 행복이 덕의 실현 이외에도 재산과 명예, 건강, 좋은 집안 등 여러 외적 선(善)들을 포함한다는 ‘포괄주의적’ 입장과 구별된다. 

하지만 <에우데모스 윤리학>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비해 보다 유연하게 포괄주의적 행복관을 좀 더 표명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정치학의 영역과도 겹친다. 그는 ‘정치학’을 행복을 만드는 학문 또는 기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정의로운 것이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것이 가장 좋지만 가장 즐거운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라는 테오그니스의 시 구절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행복이 만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좋으면서 가장 즐겁기 때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덕(Arete)을 실현하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그 행복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의 아버지답게 행복의 내용과 조건, 행복에 대한 탐구방법, 행복한 삶의 방식, 행복의 원인이 되는 ‘좋음’의 속성들을 논변해 나간다. 

그가 분석해 낸 인간의 삶에는 세 가지가 있다. 정치적 삶, 철학적 삶, 향락적 삶이 그것이다. 행복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는 데에서 온다. 어떤 삶을 추구할 것인가는 각각의 삶을 택하게 하는 가치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과 선택에 달려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흉상

인간의 모든 행동은 각자 자신의 욕망이나, 선택, 사고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해진다. 그러므로 모든 덕은 이러한 선택과 필연적으로 관련된다. 결국 어떠한 고통과 쾌락도 모두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행위자가 어떤 덕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얻어지는 행복의 질이 달라질 수 있을 터이다 . 

그렇다면 행복을 이끌어주는 덕은 어떤 덕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과 이성 모두 극단적 위치에서 얻어지는 것을 악덕으로 규정하고 중간의 적절한 정도, 즉 중용(mosotes)을 덕으로 상정한다. 덕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인간 내부에 작동하는 쾌와 불쾌의 자연적 기제를 이해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실생활에서 여러 구체적 상황에 부합하도록 감정을 조율하고 행위를 조정하는 훈련을 장기간 거쳐야 한다.” 중용은 칭찬의 대상이 되고, 극단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중용은 덕이지만, 중용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또한 덕이다. 아울러 인간의 모든 행위를 조절해주는 자제력이 중용을 유지하는 데 훌륭한 덕목으로 기능한다. 자제력과 중용이 행복의 중요한 요체인 것이다.

행복을 만들어 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친애(philia)’이다. 누군가의 대상에게 호감을 주기 위해 연설에서 의례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친애(親愛)하는~’으로 시작되는 바로 그 ‘친애’의 개념이다. 사실 친애는 매우 좋은 의미임에도 일상에서는 본래의 뜻을 살린 단어로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개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친애는 더없이 중요하고 필요한 덕목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고전적 친애의 의미와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을 행복을 만드는 학문 또는 기술로 보았으므로 자연히 정치술의 중요한 기능 역시 친애를 산출하는 데 있다고 역설한다. 가장 훌륭한 정치는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행복을 이루기 위해 절실한 것이 친애다. 하지만 친애의 영역은 매우 광범위하여 정치가의 노력만으로 달성되기 어렵다. 전 사회 구성원 간에 서로 친애하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친애는 가족, 친구, 동료, 이웃 간에 적용될 수 있는, 사랑보다 더 포괄적인 친밀한 감정으로써 일종의 성격적 성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 유용성, 즐거움에 의해 생겨나는 친애를 동등성에 의거한 것과 우월성에 의거한 두 부류로 나눈다. 하지만 동등성에 의한 친애를 지닌 이들만이 진정한 친구가 된다. 한쪽이 우월하고 다른 한쪽이 열등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친애가 형성되기 어렵다는 의미다. ‘친애는 동등이다’라는 속담이 이를 함축한다.

현대 우리 사회에는 친애가 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열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한 친밀한 사랑을 표현하는 대변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동동한 위치가 전제된 것으로 보기 어려운 형식화된 친애이다. 진정한 친애와는 거리가 느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친애의 종류를 친족적 친애, 동료적 친애, 공동체적 친애, 즉 시민적 친애, 세 가지로 분류한다. 그 가운데 유용성에 입각한 시민적 친애는 정의의 시작이자 원천이 된다. 시민 사이에 서로 유용한 관계에서 시민적 친애가 형성된다. 시민적 친애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성원 간에 동등성을 회복시켜주고 비례적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시민 사이에 상대적 격차가 심할 경우 이를 완화하고 보충해주는 분배 정책이 필요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정치의 역할이 요구된다. 

시민적 친애는 ‘법적 친애(nomile philia)’와 ‘도덕적 친애(ethike philia)’이기도 하다. 시민적 친애는 법과 제도에 의해 보장되는 친애와 개인들의 도덕적 행위에 의해 산출되는 친애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의 행복(eudaimonia)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시민적 친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친애를 형성시키기 위한 정치적 기능을 주목하게 한다. 이는 국민의 행복도를 높이기 위한 정책적 대안에 부심하는 현대 정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개인의 행복은 지혜와 덕만으로 얻어질 수는 없다. 행운도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 타고난 운이나, 우연, 외적인 요소도 작용한다. 하지만 명예, 부, 육체적 탁월성, 행운과 권력 등 ‘외적인 좋음’이 곧 행복의 요소는 아니다. 이런 외적 요인들은 분명 객관적인 성공으로 보이지만 곧 주관적 만족감과 동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이런 ‘외적인 좋음’들은 “자연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오히려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성향들로 인해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덕의 실현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좋음’의 자연적 가치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행복에 기여하게 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행복의 상식적 의미를 융통성 있게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외적인 좋은 조건은 선호할 만하지만, 행복은 이런 것의 획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잘 사용할 줄 아는 내면의 덕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성상 자신이 다스릴 수 있는 요소를 위해 살아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적인 좋음이 너무 넘치거나 모자라서 신을 모시는 일에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는 삶을 추구하기 위한 신의 시각으로 삶을 관조하는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조화가 행복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덕의 윤리학’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행복을 얻기 위해 스스로의 욕구와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지혜와 덕을 쌓을 것을 권장하고 있다. 또한 타고난 ‘행복한 조건'을 선망하기보다, 신을 경배하며 스스로 행복을 통제하고 만들어 가는 소박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개인의 행복을 공동체의 행복으로 확장하기 위해 공동체 내에 ‘친애’를 풍부하게 만들어 나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의 행복이 사회의 친애로부터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고 여긴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친애에 의존하는 삶은 행복을 담보할 수 없다. 행복한 삶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선택과 행위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열망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중심적 목표(skopos)에 맞추어 삶의 방식과 내용을 정돈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선망하는 갖가지 외적인 행복 요소들을 갖추기 위해 안달하기보다, 과욕을 절제하고 자신의 삶을 늘 관조하며 내면의 덕을 쌓는 일에 우선한다면 행복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 ☞ 추천도서: 『에우데모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송유레 옮김, 한길사(2012),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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