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진당 해산 이어 자민주의 기본질서를 지키려는 두 번째 조치
경제학자 공병호가 최근 비장한 제목의 단행본 <3년 후, 한국은 없다>를 펴냈다. 지금처럼 어울렁더울렁한다면 한국사회의 몰락도 피할 수 없다는 경고다. 그는 "잇단 퇴행적 선택 속에 시스템 전체가 주저앉고 있다"고 지적했지만, 그게 어디 경제뿐일까? 국가안보도 걱정인데, 핵과 미사일을 앞세운 북한의 위협 앞에 지금처럼 지리멸렬할 수 있을까? 테러방지법을 둘러싸고 국회에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이어가는 야당의 몽니 부리기는 또 뭔가? 때문에 지금은 갈림길이다. 재앙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느냐,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한 대개조 작업에 나서느냐? 4백여 년 전 율곡 이이나, 서애 유성룡이 이런 말을 했음을 기억해두자. "나라를 다시 만들(國家再造)때가 되었나이다." 그렇다면 국가개조의 큰 그림을 염두에 두고 4월 총선에서 우린 무얼 해야 할까? 그리고 총선 승리 뒤 우리의 취약한 자유민주주의를 어떻게 재정비할까? 그걸 점검해보는 시리즈 칼럼을 두 차례 내보낸다. 이번이 마무리인데, 앙코르 편을 한 번 더 쓸 생각이다. [편집자]
 
[연속 칼럼 ②]-‘국가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 조우석 주필
대통령의 격정 토로를 지켜보는 내 마음이 실로 짠했다. 국회 비판 대목에서 주먹을 불끈 쥐거나, 한숨과 함께 말을 잇지 못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 위화감은커녕 감정이입이 절로 됐다. 요즘 국민들의 답답한 마음이 바로 저러하다는 것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일부 좌파 세력을 제외하곤 누군들 아니 그러할까? 취임 3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국민경제자문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활성화와 테러방지법(테방법) 등 국정 현안을 따지면서 "자다가도 몇 번씩 깰 통탄스러운 일"이라고 했는데, 그게 내 귀엔 4백여 년 전 율곡 이이, 서애 유성룡의 한탄과 겹쳐 들렸다.
 
당시 나라 개조론을 들고 나왔던 그들은 조선이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으니 이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다"고 진단했는데, 바로 지금 우리형편이 그러하다. 개인이고, 국가이고 간에 때가 되면 기틀과 뼈대를 바꿔줘야 하는데 지금이야말로 나라를 다시 만들 때(國家再造之運)라는 소신에 변함 없다.
 
당장 쟁점인 테방법에서 그 점이 썩 잘 드러난다. 그건 대한민국의 취약한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대한 정비, 즉 체제수호 차원에서 접근해야 옳다.  북한의 위협엔 나 몰라라 하는 전체주의 부역질 심리, 국가안보와 국민안위라는 큰 차원에는 애써 눈을 감는 근시안 따위론 풀리지 않는다.
여의도정치권의 반국가-반대한민국 마인드

인권타령을 늘어놓는 더불어민주당은 테방법이 국민감시법이라고 억지를 부린다. 그러곤 어제 테방법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는 논평을 냈는데, 거기에서 밑천을 다 드러냈다. 저들의 집단심리에는 반제도권-반국가-반대한민국의 마인드가 똬리 틀고 있다.
 
그건 야당만이 아니라 이 나라 지식인들의 공통된 인식인데, 그거야말로  1980년대 운동권 논리다. 국가가 있어야 인권이 있고, 기업도 존재한다는 걸 외면하는 바보짓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왜 통진당이 해산됐는가를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는 얘기다.
 
당시 헌법재판소가 뽑았던 칼이란 방어적 민주주의가 아니었던가? 테방법은 정확히 그 연장선이다. 즉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철갑을 걸친 채 대한민국을 좀 더 잘 수호하고, 국민안전을 좀 더 잘 보호하려는 노력의 일부라고 보면 된다. 
 
사실 방어적 민주주의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린하려는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는 이념을 말한다. 그래서 전투적 민주주의로도 불리는데, 그 잣대에 비춰 현재의 우리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취약하다. 이 나라의 잘난 위선적 지식인 무리 중 아무도 그걸 애써 지적하는 이가 없다.
 
사회적 공론에 붙이려는 이는 더 더욱 없는 게 '나라가 나라꼴이 아닌'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사정이 그러하니 헌정사상 처음으로 통진당을 위헌정당으로 해산하는데 성공했지만, 그건 1장 1절의 첫걸음에 불과하다는 걸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테방법이 1장 2절로 가자는 것이라는 점엔 모두 눈을 감는다.

   
▲ 새누리당 김성태(왼쪽), 권성동 의원이 '국회 마비 40시간째'라는 현수막 옆에서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사진=미디어펜

철갑 같은 독일헌법, 맨손 차림의 대한민국 헌법

독일과 이스라엘을 보라.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철갑으로 스스로를 보호한 모범국이 그들인데, 특히 독일의 경우가 철두철미하다. 우리헌법은 학문의 자유를 거의 무제한 허용하지만, 저들은 엄격한 단서가 있다. "헌법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지키는 범위 안에서만", 그걸 허용한다. (5조 3항)
 
만일 우리가 그렇게 개정하려 들면, 야당과 종북좌파 세력은 펄펄 뛰고 생난리일 것이다. 명백한 건 지금 우리가 과잉 민주주의의 덫에 걸려있고, 모두가 거기에 중독되어 있다는 뜻이 아닐까? 독일 헌법이 우리와 다른 건 한두 개가 아니다. 독일은 국민의 통신비밀에 대한 제한을 규정(10조 2항)하고 있는데, 명문 규정이 이렇게 되어 있다.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나 연방  또는 주의 존립과 안정보장을 위해 필요할 경우" 제한이 가능하다고 못을 박았다. 그런 게 수두룩하다. 그 비슷한 이유로 독일은 국민의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고(11조2항), 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역사 마찬가지다.
 
혹시 그걸 통해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를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남용하는 사람의 기본권은 아예 박탈할 수도 있다.(18조) 그런 걸 앞세우는 정당에 대한 해산을 명문 규정한 건 11조 2항에 들어있다. 기억해둘 건 그런 건 체제 수호를 위한 독일헌법 조항의 일부라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대한민국 헌법은 물렁하기 짝이 없어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에 부족한 점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달랑 테방법 제정을 둘러싸고 국회마비가 오고 온통 난리법석이니 박 대통령의 말대로 "자다가도 몇 번씩 깰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여의도정치권을 향해 원로 정치학자 양동안 교수가 내게 전해준 다음 정보를 알려주고 싶다. 양 교수에 따르면, 독일에서는 기본법(헌법)의 체제방어 조항이 전부가 아니다. 그 외에 테러방지법을 위시해서 형법, 헌법보호법, 사회단체법(결사법), 정당법, 집회시위에 관한 법, 통신비밀제한법 등을 체제방어에 동원했다.
 
또 있다. 독일은 이런 법률들 외에 헌법보호청과 정치교육본부와 같은 자유민주주의체제 방어만을 위해 활동하는 기구를 두었다. 헌법보호청이 하는 일은 우리의 국정원과 비슷한데,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의 존립 안전에 배치되는 단체 및 그 구성원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수집·분석·활용하는 것이다.

풍요 속에 길 잃은 대한민국 새로 세울 때

특히 헌법보호청은 해마다 반체제인사와 단체들의 동향에 관한 책자를 발간하여 국민에게 알린다. 연방정치교육본부는 연방내무부 산하에 설치된 초당파적 기관이다. 각 주에는 주 정치교육센터가 설립되어 있으며, 연방 정치교육본부의 지침에 따라 활동한다.

본래 이런 장치들은 서독 시절부터 갖추어왔던 자유민주주의체제 방어용인데, 통일 이후 그대로 계승했다. 어떠신지? 이러고도 테방법에 대해 시큰둥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대한민국의 책임있는 시민이 아니라는 소리와 마찬가지다.

이런 독일에 비해 대한민국 헌법은  8조 4항의 위헌정당해산심판제도를 달랑 하나 뒀을 뿐이다. 그 8조 4항이 위력을 발휘한 나머지 통진당을 없앨 수 있었고, 그 결과 지금 대한민국은 종북 정당의 위협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한 나라가 되었음을 누가 부인할까?
 
안타깝다. 독일이 자유민주주의 철갑으로 무장했다면, 같은 분단국가이던 우린 더 어려운 환경인데도 맨손 하나로 대한민국 체제를 수호하려 하는 모양새다. 테방법은 그걸 바꾸기 위한 작업이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 대한민국 수호를 위해 훨씬 많은 일을 하기 위한 첫걸음일 뿐이라는 걸 기회에 재확인해야 옳다.
 
첫 글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400년 전 조선왕조가 반도에 갇혀 사는 폐쇄적 마인드 속에서 현실 감각을 잃어버렸다면, 20세기 대한민국은 기적적 성장과 자유민주의의 혁명을 이뤄냈지만 풍요에 취해 길을 잃고 있다. 그 생각 변함없다. 이걸 바로 잡을 때가 지금이다. 다음 앙코르 칼럼 편에서는 1948년 건국부터 우리는 왜 이런 체제였는지를 별도로 점검해보려 한다. /조우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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