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중국과의 결별, 미국과의 새로운 동맹…근대외교의 청사진
우남 이승만이 100년 전 한반도에 가져다 준 첫 번째 선물은 바로 ‘자유주의 정신’이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조선시대, 그리고 이어진 일제시대 사람들에게 ‘자유’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당시 한반도에 ‘자유주의 정신’은 어떻게 상륙하게 되었을까. 자유주의는 위대한 국가탄생의 서막이었다. 자유경제원은 지난 15일 ‘이승만과 그의 저서, 자유주의 정신이 상륙하다’ 세미나를 통해 이를 풀어보았다. 

패널로 나선 조우석 미디어펜 주필은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우남 개인사의 측면 및 조선조 후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정치사상적 맥락을 함께 짚어봐야 한다”며 “독립정신은 당시 개화세력이 꿈꿨던 ‘문명개화를 통한 부국강병’의 꿈”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조 주필은 “낡은 중국과의 결별, 미국과 새로운 동맹 맺기라는 패러다임 모색, 20세기 근대외교의 청사진을 수반했다는 점에서 지금도 대한민국 현실외교에 주는 의미가 크다”고 밝혔다. 아래 글은 조우석 주필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조우석 주필
 이승만과 기독교 선교사들과의 만남은 축복이었다

어려운 것을 쉽게 쓰는 게 잘하는 글쓰기라고 발제자는 운을 뗐지만, 남정욱 교수야말로 맛있게 쓰기의 달인이다. 대중을 겨냥한 토론회인 ‘이승만은 산타였다’의 문을 그가 연 것은 그래서 의미있다. <독립정신>을 맛나고 쉽게 비벼서 그게 왜 19세기 말 이 땅에 자유주의 정신이 상륙한 신호탄이었는지를 적절히 설명해줬다. 남 교수는 지금까지 유통되고 있는 의고체(擬古體) 스타일의 <독립정신>를 넘어 <평설 독립정신>의 등장도 제안했는데, 이 과제 또한 그가 갈무리하는 게 온당하다.

그래야 동시대어로 새로 쓰여진 <독립정신>이 왜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위대한 선언문인지를 스스로 입증해보일 기회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얇은 정치팜플렛은 국내에서 널리 읽힐 기회가 없었지 않았던가? 첫 출간부터 비운의 텍스트였다. 초고가 박용만이 미국으로 갈 때 여행용 트렁크 밑바닥에 숨겨서 운반돼 1910년 미국에서 출간됐고, 막상 해방된 이 나라에서도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폭 넓게 대중을 만날 수 없었다. 근대 독립국가 건설의 큰 비전을 담고 있는 위대한 저술, 역사적 텍스트임에도 사정은 그러했다.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한국인이라면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썼던 최남선의 명문(名文)을 좔좔 외웠음에도 그것의 15년 전 뿌리인 <독립정신>을 애써 외면하는, 말도 안 되는 정치적-지적 무지함이 지금까지도 거듭되고 있다는 발견을 우리는 새삼 한다. 이 소책자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이념과 정신의 상당수를 담고 있고,  현실외교의 전략에서도 교훈이 되고 있음에도 그런 고약한 상황은 변치 않는다. ‘이승만은 산타였다’토론회가 이런 사정을 바로 잡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나 작은 이견이 없지 않다.

남정욱 식의 <독립정신> 소개가 자칫 이 역사적인 저술이 갖는 의미를 좁히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즉 자유주의의 씨앗을 품은 정치팜플렛의 탄생으로 규정하는 게 합리적이고 사실에 부합한다. 그걸 막바로 자유주의 보급도서라고 규정하는 건 논리 비약의 혐의가 아주 없지 않을까? 21세기 우리가 말하는 자유주의와, 젊은 날의 이승만이 알았던 정치적 자유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없지 않고, 또 사실 이 책자가 널리 보급된 바도 없기 때문이다. 

   
▲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우남 개인사의 측면 및 조선조 후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정치사상적 맥락을 함께 짚어봐야 한다./사진=연합뉴스


기회에 토론자는 <독립정신>에 담긴 두 가지 요소를 덧붙이려 한다. 하나는 이승만의 개인사의 측면이고, 또 하나는 조선조 후기에서 20세기 초기에 이르는 정치사상적 맥락이다. 우선 이 얇은 책자가 과거시험에 매달리던 전통사회의 엘리트 역할을 포기한 뒤 즉각 시대의 풍운아로 떴던 이승만 20대 삶의 기념비적인 중간결산이라는 점이다. 이승만은 나이 갓 스무 살 배제학당 시절부터 선교사를 통해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자유주의 사상, 그리고 국민은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는 민주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는데, 이는 군주제와 신분제의 지평에 갇혀 살던 청년에게는 격렬한 지적-정서적 충격에 다름 아니었다.

그걸 외면하면 위정척사파의 바보가 되고, 눈을 제대로 뜨면 혁명가가 되는 갈림길에서 젊은 이승만은 혁명가의 삶을 선택했다. 조선조의 양샹 레짐과의 결별을 위해 조상의 위폐 앞에 시대의 변화를 따르겠다는 맹세와 함께 상투를 잘랐던 것도 매우 상징적인 통과의례였다. 직후 그가 빠르게 ‘운동권 사나이’, ‘대역죄의 정치범’으로 변신했던 것도 우연일 리 없다. 배재학당 시절 토론과 다수결 방식의 모임인 협성회를 조직하고, 졸업 직후엔 독립협회가 주도하는 서울 종로 거리에서 벌어진 만민공동회의 대중연설가로 급부상했던 과정도 실로 드라마틱했다. 

권총 한 자루로 시도했던 탈옥, 뒤이은 재수감에 따른 6년의 긴 감옥생활이란 것도 지금 생각하면 전통적 엘리트에서 근대적 정치인이자, 애국적 독립운동가로 거듭나는 단련의 과정이었다. 이토록 이승만 개인사에서 20대의 삶을 총정리한 <독립정신>은 본인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정치사상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포인트다. 즉 이 책자는 조선후기 실학파의 전통에 이어 김옥균에 의한 갑신쿠테타(1884년)로 촉발된 개화세력의 문명관을 집약했다. 그렇게 넓게 보아야 이 책자가 잘 들여다보인다. 즉  <독립정신>은 자유주의 보급도서 이전에 당시 개화세력이 꿈꿨던 ‘문명개화를 통한 부국강병’의 꿈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책자의 제목 자체가 독립정신이 아니던가? 발제자가 밝힌대로 7년 전 이승만이 배재학당 졸업식장에서 했던 영어스피치 제목도 ‘조선의 독립’이었다는 것도 염두에 둬보라. 과연 어떤 방식으로 그걸 구현하려 했을까? <독립정신>은 문명개화를 통한 부국강병의 꿈을 세 가지의 방식으로 구현하려 했다는 점을 토론자는 오늘 이 자리에서 새삼 재확인하려 한다.

   
▲ 지금도 대한민국 현실외교에 주는 암시로 의미있는 것이 이승만의 '독립정신'이 20세기 근대외교의 청사진을 수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낡은 중국과의 결별, 새로운 동맹 미국과 친구 되기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했다./사진=연합뉴스


그 첫째가 기독교 입국론이다. 한 사회의 생활방식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종교인데, 전통 유교는 더 이상 안 된다는 판단이 이 책을 관류한다. 그게 우남이 견지했던 유교망국론이자, 대부분 개화파 세력의 판단이기도 했다. 바꿔 말해 근대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문명사적 결단을 이승만은 이 책자에 담아냈던 셈이다. 그건 실로 짧은 기간 이뤄진 진화의 산물이다. 이 대목은 한 세대 차이, 정확하게는 24살 차이인 띠 동갑 김옥균과 대비해봐야 잘 드러난다.

김옥균의 경우 전통적 유학자에 그치지 않고 사대부의 금기를 어긴 채 친(親)불교의 입장과 함께 막 대두됐던 기독교에도 두루 열려있었던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그는 전통사대부로 머물기엔 너무 늦게 태어났고, 새 시대의 문을 열기엔 아니면 너무 빨리 태어났다. 생각해보라. 과거시험 수석 합격(1872년) 이후 무려 12년 동안 전통적인 유학자들처럼 엘리트관료의 코스를 밟았던 사람으로선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환경이 아니었던가? 한 세대 뒤의 인물인 이승만은 달랐다.

과거시험과 인연이 전혀 없었고 나이 스무 살 나이에 신학문에 뛰어들어야 했던 이승만이 배제학당에서 ‘김옥균의 남자’ 서재필을 극적으로 만나며, 갑신쿠데타로 상징되는 개화당의 생각을 고스란히 받아들였고 서양 선교사들과 어울리면서 유교에 대한 미련을 떨쳐낸 뒤 기독교에 올인했다. 더구나 목에 칼을 쓰고 있던 한성감옥 안에서 신비체험이란 것도 그 자신에게는 신앙적 결단이 분명하겠지만, 동시에 유교에서 기독교로 바뀌는 문명사적 변화를 상징하는 과정이다.

둘째 이승만의 비전인 문명개화를 통한 부국강병은 비상한 정치적 각성을 동반하는데, 그것이 초보적 형태의 ‘정치적 자유주의’의 개념을 수용하자는 것이었다. 이 대목이야말로 오늘 이 자리의 주제인 ‘자유주의 상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독립정신>이 견지하는 건 공화정 지지다. 그건 젊은 이승만에게는 기독교 수용처럼 시대의 대세이자, 불가역의 흐름이었을 것이다. 이 책자는 표면상 입헌군주제를 옹호하고 있지만, 그건 고종을 의식한 제스추어였을 뿐 당시 그는 벌써 공화주의자였다고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는 <이승만 평전>에서 밝히고 있다.

“미국 찬양은 공화제 옹호로 오해받아 역적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에 조선에는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가 적합하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미 공화주의자가 되어있었다.”(18쪽) 실제로 <독립정신>은 미국의 민주독립혁명에 대해서 4개의 장에 걸쳐 기술을 하고 있으며, 미국민주독립혁명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던 프랑스민주혁명에 대해서도 1개의 장을 할애하고 있다. 

   
▲ 우남 이승만은 6.25전쟁 직후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우리 후손들이 대대로 이 조약의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사진=연합뉴스


셋째 독립의 방략의 중요하고, 지금도 대한민국 현실외교에 주는 암시로 의미있는 것이 이 책이 20세기 근대외교의 청사진을 수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명개화를 통한 부국강병은 기독교 입국론, 정치적 자유주의와 함께 <독립정신>은 낡은 중국과의 결별, 새로운 동맹 미국과 친구 되기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했다. 젊은 이승만의 머리엔 조선이 멸망할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미국을 모델로 한 변화를 받아들이자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그에게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조공국가 중국은 노쇠했다. 이승만이 말하는 독립이란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의 떨어져 나가기로 요약된다. 그에게 러시아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한반도에 야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의 새로운 동맹국으로 미국은 매력적이었다. 강대국으로는 유일하게 영토에 야심이 없는 나라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런 국제정세관이 훗날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그가 초대 대통령에 오르고 6.25전쟁 직후 한미방위조약 체결로 연결된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특히 당시 우남이 이 조약으로 “우리 후손들이 대대로 이 조약의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라 했던 것도 실로 예언자적 언명에 다름 아니었다.

새삼 재확인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독립정신>이 널리 읽히지 않았다. 혹시 그게 지금 흔들리는 대한민국 현주소를 만들 원인은 아닐까? 사회변화와 책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혁명의 성서다.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그 책이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자유로웠는데 어디서나 노예가 되어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검증 안 된 주술(呪術)’이 프랑스혁명의 광기에 불을 붙였다. 자유주의 사상의 씨앗을 담은 <독립정신>이 100여 년 뒤인 지금이나마 새롭게 읽히고 음미돼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조우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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