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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강제 배포는 김일성 띄우기 속임수다
김일성 무장 항일투쟁은 날조…민가 습격·약탈·납치 일삼아
승인 | 편집국 기자 | media@mediap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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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인 2016-03-09 14: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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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학교를위한학부모연합, 21세기미래교육연합, 바른사회시민회의가 7일 광화문 한글회관 세미나실에서 공동개최한 ‘친일인명사전 배포, 어떻게 봐야하나’ 토론회에 참석한 패널들은 입을 모아 "조희연 서울시교육청의 친일인명사전 배포는 강제 예산 편성 등 학교장의 자율권 침해 소지가 크다"고 비판했다.

정부 누리예산편성을 거부했던 조희연 교육감의 서울시교육청이 학교의 친일인명사전 배포에는 강제 예산을 편성했고, 이는 4·13 총선을 앞둔 정치행위로 보인다는 지적이다. 친일인명사전을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는 특정 이념을 지향하는 민간단체이다. 친일 기준에 대한 법적/사회적 합의 없이 친일인명사전이 민간단체 차원의 자의적이고 편향된 기준으로 제작되었다는 문제의식으로 이날 토론회가 열렸다.

패널로 나선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은 “친일 싸움의 본질은 북한의 항일 띄우기”라면서 “친일인명사전은 친일인사로 분류된 인물들의 전후사를 살피지 않고 단견적이며 주관적이고 편향적이어서 객관성과 공정성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고 지적했다. 김 편집장은 “친일은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무소불위의 힘과 권력이 있다”며 “친일인명사전을 학교에 보급하려는 세력의 목표는 북한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 띄우기 작업을 수행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디어펜은 김용삼 편집장의 토론문을 상, 하편으로 나누어 연재한다. 아래 글은 하편이다. [편집자주]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김일성 항일 투쟁의 진실은?

좌파들의 논리에 의하면 대한민국 친일 인사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이 김일성이다. 김일성을 수식하는 용어를 분해해 보면 ‘만주’ ‘항일’ ‘무장 독립투쟁’ 등 세 개의 덩어리로 의미가 분절된다. 역사적 기록을 통해 그 세 덩어리의 실체를 추적해 보면 만주라는 공간에서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의 남과 북의 운명을 가른 지도자 그룹이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자 중국공산당은 만주 일대의 무장세력들을 규합하여 동북인민혁명군(후에 동북항일연군)이라는 빨치산 부대를 조직했다. 당시 이 빨치산 부대는 만주 일대의 공산주의자들을 행동대원으로 끌어들였는데, 그 중 상당수가 만주로 이주한 한인들이었다. 그 중 하나가 김일성이다. 

일제와 만주국 토벌대가 항일 빨치산들을 체포해서 보니 대부분이 만주로 이주한 한인들이었다. 중국공산당이 만주의 한인들을 무장시켜 자신들을 공격하도록 부추긴 사실을 알게 된 일제와 만주국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간도특설대라는 부대를 조직한다. 이 부대의 사병과 부사관은 전원 한인이고, 장교는 한인과 일본인이 절반씩이었다. 

중국과 일본 공히 한국인들을 동원하여 상대 적을 치도록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을 써먹은 것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사람, 혹은 입신 출세를 꿈꾸던 한국의 젊은이들이 만주로 이주하여 중국 편, 일본 편으로 갈려 만주벌판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역사적 비극을 연출했다. 

만주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일제의 편에 섰던 그룹은 후에 대한민국 국군의 주역을 비롯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핵심 요직을 구성하게 된다. 반면에 중국 공산당 편에 서서 일제와 투쟁한 그룹들은 후일 북한으로 들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의 핵심이 된다. 

이러한 운명적 갈림은 개개인이 스스로 원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격랑은 한 인간의 의지 따위는 거침없이 날려버리는 질풍노도로 다가온다. 그 질풍노도의 깊은 상처가 오늘날까지 남아 북한은 ‘항일 무장독립운동’이라는 도덕적 이니셔티브를 장악하고 대한민국 건국 및 호국, 산업화 추진세력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라고 매도하며 현대사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 김일성은 소련군의 무등을 타고 입북하여 북한의 실권을 쥐고 조선노동당을 창건하면서 그는 3중 국적 및 3중 당적자가 되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정 하에서 소련군 대위 및 소련공산당 하급당원으로서 상전인 소련군과 소련공산당의 지시를 받아 북한에 소련 위성 공산국가 수립에 앞장섰던 인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진은 김일성(좌)과 박헌영(우)


그렇다면 김일성이가 했다는 항일 무장투쟁의 본질은 무엇인가. 김일성은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하여 중국인 학교를 다녔고, 잠시 귀국하여 평양의 창덕소학교를 2년 정도 다니다가 다시 만주로 갔다. 그는 한국어보다 중국어가 더 유창했고, 어린 시절 중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 국민이었으며,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지방당원으로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만주 일대의 마적과 비적들까지 끌어 모아 결성한 동북항일연군의 한 전투원으로 참여하여 중국의 공산혁명을 위해 항일 유격전에 참여했다. 그가 참여했던 부대는 동북항일연군이라는 중국공산당 산하의 빨치산 부대였는데, 바로 이 항일 빨치산 부대의 활동 목표가 제시된 문건을 보면 그들은 조선의 해방이나 조선 국토의 회복이라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들어있지 않고 “중화조국(祖國)의 옹호”와 “실지동북(失地東北)의 회복”이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문헌에 적나라하게 나와 있다. 

다시 말하면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의 목표는 중국의 ‘해방’과 공산화, 그리고 중화조국의 옹호와 일본에게 빼앗긴 만주(동북)지역의 회복이었다. 중국공산당원이자 중국 국적자인 김성주의 임무도 그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모택동은 1962년 4월 15일 김일성의 50주년 생일에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은 축전을 보냈다.

“중공 인민에게 있어 곤란했던 1930년대에 당신은 한인민의 우수한 아들딸을 인솔하여 피로써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원조하였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김일성이 중국 공산당원으로서 중국 공산당 혁명에 헌신했었던 사실을 잊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던 셈이다. 

김일성이 보천보 습격사건에 광분하는 이유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집단이 세 개 더 있다. ▲임시정부의 광복군 ▲연안 태행산으로 들어가 항일 투쟁을 했던 무정과 김두봉, 최창익의 조선의용군 ▲양세봉 장군과 이범석 장군이 주동이 되었던 민족주의 계통의 항일 무장부대 활동이다. 임시정부의 광복군 행동강령과 활동목표에는 분명하게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명기하고 있고, 조선의용군과 민족주의 계통의 항일 무장부대 활동목표와 행동강령에도 이 점이 선명하게 명기되어 있다. 오직 김일성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만이 중화조국 옹호와 동북실지 회복을 앞세우고 투쟁했다. 이것이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항일투쟁이었는가?

1940년 12월, 노조에 토벌대의 강력한 토벌에 밀려 소련령으로 도주하기까지 김일성이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김일성이란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만주에서 벌인 빨치산 활동 기간은 약 7년이다. 이 기간 동안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은 조국의 광복이라거나 조선 해방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시종일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도주, 식량획득을 위한 민가 습격 및 약탈, 양민 납치가 거의 모든 활동이었다.

게다가 지휘하는 부대는 100~200명 선을 넘지 못하는 중대급 규모로서, 정규전도 아니고 소규모 단위로 움직이며 빨치산 활동을 한 것이 전부다. 김일성의 공식·비공식 전기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보천보 전투’는 습격을 지휘한 자가 북한 지도자가 된 김형직의 아들 김성주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다.

전투란 상대하는 적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 보천보에는 대응하는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100명 미만의 병력으로 대항하는 일본군도 없는, 주재 경찰 5명에 불과한 조그만 국경 산골 마을에 빨치산들이 나타나 총을 난사하고 방화하고 식량과 금품을 약탈해 간 것을 ‘전투’라고 미화 찬양한다. 그것이 김일성이 항일 무장투쟁을 한 최대의 걸작이라고 하니, 나머지 그가 만주벌판에서 벌였다는 항일전투 내지 유격전의 실상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것이 김일성의 전체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항일투쟁 전투라는 ‘보천보 전투’의 참혹한 실상이다. 군사전문가 장준익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군사적으로 평가하면 “일본군의 토벌작전에 소규모로 분산하여 침투, 도피 및 도망에 능했다”고 정리한다.

   
▲ 김일성이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이었다? 북한은 '항일 무장독립운동'이라는 도덕적 이니셔티브를 장악하고 대한민국 건국 및 호국, 산업화 추진세력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라고 매도하며 현대사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북한이 보천보 습격사건을 저토록 열심히 항일 빨치산 활동의 백미로 추켜세우는 진짜 이유가 있다. 만약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에서 보천보 습격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김일성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 국민으로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공산당의 지방 하부 당원으로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명령에 의해 중화조국 옹호와 동북실지 회복을 위해 싸운 존재밖에 안 된다. 이렇게 되고서야 조선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고 우겨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 김일성 항일 무장부대가 조선에 진출하여 투쟁을 했다는 뚜렷한 족적을 근거로 남겨야 했다. 그래야만 조선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우겨댈 수 있으니까. 바로 이것이 보천보를 운명적으로 띄워야만 하는 결정적 이유다. 

보천보 습격은 한국에 잠입하여 일제 경찰과 싸운 증거가 된다. 사실은 경찰 주재원 5명 밖에 안되는 마을에 들어와 비어 있는 경찰 주재소에 총탄을 갈겨댄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겉으로는 항일 독립군의 한국 진공이라는 거대한 선전물의 도구가 된 것이다.

조선 혁명을 위해 투쟁했다고 역사 날조

한 발 더 나아가 김일성은 자기가 만주 일대에서 항일 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국내에서 싸웠으며,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 중국혁명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조선혁명을 위해 투쟁했음을 선전하기 위해 “백두산 밀영에서 김정일을 낳았다”고 꾸며냈다. 이와 관련한 황장엽의 증언이다.

‘어느 날 김일성은 빨치산 참가자들을 불러 “김정일이 탄생한 백두산 밀영 자리를 찾아내라”고 과업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없는 것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찾느라고 하다가 찾지 못하였다. 그러자 김일성은 자기가 직접 나가 찾아보겠다고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내어 “여기가 밀영지였다”고 지적하고 그 뒷산은 “정일봉”이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중앙당 당역사연구소에서는 거대한 화강석 바위를 구해다가 거기에 엄청나게 큰 글자로 “정일봉”이라고 새기고 그것을 산봉우리에 올려다 붙이는 큰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백두산 밀영 고향집”이라는 것을 건설하여 놓고 이 집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이 살면서 사령부를 표시하는 붉은 깃발을 띄워 놓고 빨치산 투쟁을 지도하였으며 여기서 김정일도 낳았다고 선전하게 되었다.’1) 

김일성의 빨치산 체험은 ‘항일 무장투쟁’이라는 선명한 구호로 환생되어 도덕적 이니셔티브 쥐는 데 성공했지만, 바로 그 항일 투쟁의 선명성을 위해 주민과 북한 전체가 항일 빨치산 아지트가 되어, 1930년대나 다름없는 생활 강요당하고 있다. 만주국 시절 토벌대에게 포위되듯 “우리 식대로”를 외치며 국가를 외부로부터 폐쇄 고립시키는 데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항일’이라는 자리에 미 제국주의가 자리 잡은 것 외에는 항일 코드에서 변한 것이 없다. 이런 모습에 대해 일본의 좌파 학자 와다 하루키는 북한을 ‘유격대 국가’라고 정의했다.

소련으로 탈출하여 소련군 산하 88정찰여단 근무 때도 김성주는 그 지역 KGB 책임자였던 소련 극동방면군 사령부 정찰국장 조르킨 소장의 총애를 받은 사례로 보아 친소련적인 의식구조로 자신의 정서를 재빨리 포맷한 것으로 보인다. 비야츠크에서 88여단 시절 김일성과 함께 생활했던 박우섭은 이렇게 증언한다.

“소련인들은 우리 항일연군 사람들을 믿지 않았고 자주 말썽이 생겼으나, 김일성은 단 한 번도 소련 사람들과 부딪친 적이 없고, 소련인들은 김일성에게 특별대우를 하는 것 같았다.”2)

오늘날 북한이 요란하게 떠드는 김일성은 그 존재가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그것은 역사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팩트(fact)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 포인트는 그가 어떤 항일투쟁을 했고, 한민족 역사발전과정에서 순기능을 했는가, 그 반대인가의 여부다.  

   
▲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7일 친일인명사전 구입을 거부한 교장들의 결정을 존중한다면서 문책이나 추가 구입 지시 등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이미 교육청이 관련 예산(학교당 30만원)을 내려보낸 583개교 가운데 558곳이 사전을 구입해 교내 도서관에 비치한 상태다./사진=바른사회시민회의


중국 국적의 중국 공산당원 김일성

김성주는 어린 시절부터 거친 환경과 질풍노도의 소용돌이 역사 속에 맨몸으로 노출되어 국가관이나 역사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중화사상에 지배되었고, 만주 일대 공산주의 영향으로 마적질과 약탈, 살상을 일삼았다. 중국공산당 유격대의 빨치산으로 입산한 그는 만주 지역 일대를 살인자로서 도망 다니던 시기에 체득한 거친 폭력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중국공산당 간부들에게 충성을 다했고, 자신의 국적인 중국에 충성했으며, 중화 조국(祖國) 옹호와 실지 동북(失地東北)의 회복을 위해 불철주야 활동했다. 

중국 국적자로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중화 조국의 옹호와 실지 동북의 회복 투쟁에 앞장서다가 중국을 탈출하여 소련으로 넘어가 소련군 대위가 된 그는 재빨리 사태의 본질을 파악한다. 자신이 섬겨야 할 상국(上國)과 충성을 바쳐야 할 상대를 중국과 중국공산당에서 소련과 소련공산당으로 재빨리 바꾼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소련군이 북한이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지시에 따라 북한 지역에 공산 위성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내세울 지도자가 필요했다. 평양 주둔 소련군 제25군 사령부는 주둔 후 분위기를 파악해 보니 조선공산당의 지도자 박헌영은 서울에 있었고, 38선 이북 지역에는 믿을 만한 공산당원을 찾기 힘들었다. 

재빨리 소련 추종으로 돌아서

지도자 후보로 여러 인물을 물색하던 중 하바로프스크에서 자신들이 군사첩보공작원으로 양성한 김일성, 즉 김형직의 아들 김성주를 발견하게 된다. 소련군정 사령부 첩보국과 특수선동부는 김성주의 출생지에서부터 가족사항, 학력, 성분, 중국공산당 입당과 활동사항, 빨치산 운동 등 그에 대한 일체의 신상조사를 끝냈다. 

소련군정은 그의 본명이 김성주였고, 만주 지방에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에 공을 세운 또다른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풍문이 조선 인민들에게 널리 퍼진 가운데 조선인민들은 해방된 조국에 그 장군이 개선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소련군정 수령부에서 일했던 박길용의 회고의 의하면 두뇌 회전이 빠른 정치사령부의 젊은 장교들은 바로 여기서 ‘미래의 수령’ 만들기 작전을 찾아야 한다고 지도부에 건의했다. 

스탈린은 1945년 9월 초, 베리아가 추천한 김성주를 모스크바로 불러 크렘린궁 별장에서 4시간 동안 면접을 본 후 즉석에서 “이 사람이 좋다. 앞으로 열심히 해서 북조선을 잘 이끌어가라. 소련군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스탈린이 33세의 새파란 소련군 대위를 북한 지도자로 지목한 이유에 대해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 중앙 스탈린 원수는 동유럽의 공산권 지도자를 선택할 때에도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가보다 군인 출신을 선호했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정권의 지도자로 지명한 것은 김일성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3년간 소련군 제88정찰여단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하면서 소련의 명령에 충실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군인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소련에 충성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18일 소련군은 김성주에게 소련군 대위 계급장을 단 군복을 입히고 소련공산당에 입당시킨 다음 평양으로 데려와 조선인민들 속에서 ‘전설의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수령에 오르게 만들었다.

그가 소련군의 무등을 타고 입북하여 북한의 실권을 쥐고 조선노동당을 창건하면서 그는 3중 국적 및 3중 당적자가 되었다. 그는 소련군정 하에서 소련군 대위 및 소련공산당 하급당원으로서 상전인 소련군과 소련공산당의 지시를 받아 북한에 소련 위성 공산국가 수립에 앞장섰던 인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이 김성주 무장투쟁의 숨길 수 없는 민낯이다. 이 정도의 허접한 항일 무장투쟁 선전선동에 대해 제대로 된 공부조차 하지 않고 무방비상태로 방치함으로써 우리는 저들의 가짜 항일투쟁에 속수무책으로 속아 넘어갔고, 저들의 선동에 대한민국은 발목을 잡혀 도덕적 권위를 훼손당해 왔다. 참혹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결론을 말한다면, ‘친일인명사전’의 학교 보급을 이러려는 세력들의 목표는 민족의 이름을 앞세운 ‘친일’ 낙인 찍기 싸움을 통해 북한의 ‘항일’ 띄우기 작업을 수행하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비책은 북한이 주장하는 ‘항일’의 허구성을 학문적 연구를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하여 더 이상 이 주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1)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통일정책연구소, 1998, 36쪽.

2) 장준익, 『북한인민군대사』, 서문당, 1991, 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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