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소행 입증 근거 없어…측량용 삼각점일 가능성 높아
나라가 힘이 없으면 국민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목도했다. 역사적 경험이 의미 있는 교훈이 된다는 점에서, 역사의 어느 시기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판단하는 일은 중요하다. 1945년 미군에 의해 해방된 이후 7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친일이라는 낙인이 횡행하고 있다. 자유경제원은 ‘친일’이라는 낙인이 건국-산업화 인물들을 옥죄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15일 ‘2016 친일을 생각한다’ 생각의 틀 깨기 연속세미나를 열었다.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더 큰 세계로 뻗어나가자는 주장이 ‘친일’이 되는 현실을 비판하는 자리였다.

패널로 나선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김영삼 정부는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정책에 총력전을 기울였지만 누가, 어떤 역사를, 어떻게 바로 세웠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며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는 대한민국 산업화와 근대화, 민주화의 현장을 우리 손으로 깨끗이 부숴버렸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김 편집장은 “일제 쇠말뚝의 진실은 아무리 조사해도 쇠말뚝이 일제의 소행임을 입증할 근거는 없었다는 점”이라며 “쇠말뚝은 일제시대에 꽂았던 측량용 삼각점이거나 마을 주민 스스로 박은 염승풍수용 말뚝, 군부대가 박은 것, 목재 전주(電柱) 지지용, 광산 및 산판 물건 운반용”라고 강조했다. 아래 글은 김용삼 편집장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주장과 사실(fact)의 차이

1. 김영삼 정부의 ‘민족정기’ 회복 선언

김영삼 정부는 취임식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 한다”다고 선언하면서 ‘민족’ 우선의 정치를 선언했고, 취임 직후부터 범국가적으로 반일 감정을 증폭시켰다. 문민정부라 불렸던 김영삼 정부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민족정기’ 바람을 전국적으로 일으켰다. 민족정기 회복을 위해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이었던 청와대 옛 본관 건물을 철거했고, 문화부는 국책사업으로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옛 조선총독부)을 철거했다.

내무부(현 안전행정부)는 전국 명산(名山)에 박혀 있다는 ‘일제 풍수침략의 산 증거’인 쇠말뚝을 뽑아냈고, 일제가 개악했다는 고유 지명 찾기 작업을 벌였다. 교육부는 황국신민 양성을 목적으로 했다는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또 있었다. 남산 제 모습 찾기를 위해 외국인 아파트 폭파 장면을 공영방송이 전국에 생중계했다. 상해 임정(臨政)요인 유해 봉환, 독립유공자 확대(거의 대부분이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이었다), 중국 현지의 임정(臨政)청사복원….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정책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전 행정부서가 동원되어 총력전을 펼쳤다. 심지어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슬로건까지 등장했다. 누가, 어떤 역사를, 어떻게 바로 세웠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2.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김영삼 문민정부 하에서 민족정기 회복의 대표적인 사업이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다.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로 낙인찍힌 건물은 전두환 정부에서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마치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기능한 지 7~8년 정도밖에 안 됐다.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을 철거하기 위해 새 박물관 건물이 마련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임시로 구내에 있던 후생관을 임시 박물관으로 급조하여 유물을 옮겨 놓은 다음 해체해버렸다. 그리고 서둘러서 용산의 가족공원 내에 새 박물관 건물을 급조했다. 

일본이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했던 문제의 건물은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기초 설계를 했고, 그가 사망하자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 구니에다 히로시 등이 설계를 완성했다. 건설공사는 일본의 오쿠라구미(大倉組)와 시미즈구미(淸水組)가 시행했다. 1916년 7월 10일 착공되어 1926년 10월 1일 낙성식을 가졌다. 건설 기간 10년, 비용은  675만 1,982엔이 들었다. 석재를 다루는 작업을 위해 일본인과 중국인 석공 300명이 동원됐고, 조선인 인부 2백만 명(연인원)이 동원되었다. 당시 중국에서 온 석공들은 공사가 끝난 후 돌아가지 않고 북창동 일대에 눌러앉아 중국음식점 타운을 형성했다(오늘날 프라자 호텔 뒷 부분).

조선총독부 청사는 당시 일본의 본토와 식민지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고,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축물이었다. 문제는 그 건물이 조선의 왕궁이었던 경복궁 일부를 헐어낸 자리에 세워져 경복궁을 가렸다는 점이다. 해방 후 이 건물은 근현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현장으로 이용됐다. 1945년 9월 9일 총독부 청사의 제1회의실에서 미 제24군 군단장 존 하지 중장이 제9대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에게 항복 문서를 받았다. 서울에 진주한 미군은 총독부 청사를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청사로 사용했다. 당시 미군은 이 건물을 캐피탈 홀(Capital Hall)이라 명명했는데, 정인보가 캐피탈 홀을 번역하여 중앙청(中央廳)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 염승풍수 행위는 광범위하고, 또 오랫동안 이어져온 우리 풍습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염승풍수를 위해 명당에 쇠말뚝을 박았음을 입증한다. 사진은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 기념(朝鮮總督府始政五周年紀念) 엽서./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아카이브


1948년 5월 10일에 청사 중앙홀에서 제헌국회가 개원했다. 1948년 8월 15일에는 청사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열렸고,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청사로 이용됐다. 한국전 때는 조선인민군 청사로 사용됐고,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불을 질러 내부가 다 불에 탔다. 1962년 11월 22일에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청사를 복구하여 중앙청 본청 개청식을 열었고, 정부서울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정부 청사로 사용했다. 1968년 서양식 정문을 철거하고 광화문을 옛 자리에 복원했고, 1986년 8월 21일에 청사의 개보수 작업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했다. 

김영삼 정부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미 군정청의 역사의 현장, 대한민국 제헌의회 개원 현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현장, 대한민국 초대 정부에서부터 박정희·전두환 정부의 청사로 사용되며 대한민국 산업화와 근대화, 민주화의 현장을 우리 손으로 깨끗이 부숴버렸다. 

3. 일제가 박았다는 쇠말뚝의 진실

김영삼 정부의 내무부(현 안전행정부)가 추진한 쇠말뚝 제거사업은 1995년 2월 15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광복 50주년 기념 역점추진사업으로 채택됐다. 주무부서장인 박승주 과장(내무부 지방기획과)은 전국에서 쇠말뚝 실태조사가 한창이던 지난 4월 초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정책추진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도 일부 국민은 일제가 국토의 혈맥(血脈) 차단을 위해 쇳물을 녹여 부었다, 명당의 혈을 질렀다, 지맥을 절단했다는 소문을 믿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피해의식이다. 광복 50주년 되는 해에 정부가 쇠말뚝 제거에 나선 이유는 국민의 막연한 대일(對日) 피해의식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다.” 기자가 박 과장에게 전국의 명산에 박혀 있다는 쇠말뚝이 일제의 풍수침략을 입증할 만한 자료나 증거가 확보되어 있는가를 묻자 박 과장은 “객관적인 증거로 파악할 수 없는 분야”라고 답변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전국 명산에 박혀 있다는 쇠말뚝 제거사업은 민간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회장 구윤서)이라는 단체와 서길수 교수(서경대 경제학과)는 지난 85년 북한산 백운대의 쇠말뚝을 제거했고, 93년에는 속리산 문장대의 쇠말뚝을 제거하는 등 이 분야에서 10여 년 활동하며 ‘쇠말뚝 전문가’로 인정받아 왔다.

내무부가 쇠말뚝 제거사업을 벌이기 전까지 민간인들이 제거한 ‘일제의 쇠말뚝’은 북한산 백운대(16개), 마산 무학산 학봉(鶴奉)(1개), 속리산 문장대(8개), 북한산 노적봉(1개)의 것이 전부다. 이중 백운대에서 뽑힌 쇠말뚝은 독립기념관 제 3전시관(일제침략관)에 전시되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북한산에서 제거된 것이 ‘쇠말뚝 신드롬’의 봉화를 전국에 확산시켰는데, 1984년 백운대 산행을 나섰던 ‘오르내림 산우회’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의 전신)가 정상에 박힌 쇠말뚝을 목격하고 등산객들로부터 “왜인들이 서울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박은 철주(鐵柱)”라는 설명을 듣고 제거했다.

풍수가 최어중 씨는 백운대 쇠말뚝은 ‘백두산에서 북악으로 들어가는 기(氣)의 맥(脈)을 끊을 목적이며, 한강의 힘을 죽이려 했다. 또 장풍(藏風)의 효능을 없애려는 등 서울의 풍수를 갈기갈기 찢으려는 풍수적 주술’(월간 산, 85년 10월)로 정의했다. 그러나 최어중씨, 서길수 교수, 구윤서 회장 등 어느 누구도 일제가 풍수침략의 목적으로 박았음을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과학적으로 입증할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소문과 구전이 확실하기 때문에 ‘일제의 소행’이라는 수준이다.

독립기념관도 백운대 쇠말뚝을 객관적 합리적 과학적으로 조사연구 분석하지 않고 그저 기증자인 ‘오르내림 산우회’의 말만 믿고 전시했다. 1995년 2월 초 청와대 행정수석실에서 구 회장에게 쇠말뚝 제거운동의 현황을 묻는 전화가 왔다. 며칠 후엔 이의근 당시 청와대 행정수석비서관(후에 경북지사)이 전화를 걸었다. 이 수석은 쇠말뚝 제거운동을 치하하며 “정부가 이 운동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했다. 구 회장은 “민간단체가 취미삼아 뽑는다면 몰라도 정부가 나서는 문제는 신중히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명했다.그러나 내무부가 직접 나서 전국에 전국 시군구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공문을 발송했다.

▲일제 때 전국 곳곳에 설치한 쇠말뚝을 조사 제거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되찾고 자긍심을 높이고자 함
▲전 내무행정기관을 통해 제보 접수 및 필요시 군 인력과 장비를 동원하여 제거

   
▲ 전문가들과 쇠말뚝이 박혀 있다고 제보가 들어온 지역을 대조한 결과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측량을 위한 기점으로 활용되는 대삼각점, 소삼각점과 주민들이 쇠말뚝을 제보한 지역이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은 조선총독부 의원(朝鮮總督府醫院) 배경 엽서./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아카이브


그런데 주민들의 신고 실적이 워낙 저조하자 당황한 내무부는 1995년 2월 15일부터 4월 25일까지였던 신고기간을 8월 14일까지로 연장하면서 ‘쇠말뚝 조사 및 제거계획’ 공문을 재차 보냈다. 그런데 이 공문 내용에 희한한 대목이 발견됐다. 조사기간 연장을 위해 전국 각 시도가 지방 행정기관에 보낸 공문을 보면 초기에 기세등등하게 ‘일제가 박은 쇠말뚝’으로 결론 내렸던 표현이 자취를 감춘 대신, 일본 언론의 관심에 대한 대응자세를 역설하고 있다. 다음은 모 도청이 시군에 보낸 ‘쇠말뚝 조사 제거의 의의’ 공문 (95년 4월 24일자) 내용이다.

▲쇠말뚝 조사 및 제거작업은 일본 국민에 대해 반감을 조장하는 등의 대일본 배격운동이 아님
▲쇠말뚝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꼭 박았다는 것이 아님. 언제 누가 박은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님.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과거 비정상적으로 인식되어 온 것을 제거 정리하는 차원의 사업

이 공문은 심각한 문제점을 시사하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쇠말뚝을 뽑는 이유는 ‘일제가 민족정기 훼손 목적으로’ 박았기 때문이다. 사업시행 초기 내무부도 ‘일제시대 때 설치한 쇠말뚝(철주) 일제조사 및 제거사업’이라고 분명히 명시했었다. 그런데 시행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시대에 꼭 박았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후퇴한 것이다. 그렇다면 전국 행정부서가 동원되어 쇠말뚝 제거작업에 나선 의미가 무엇일까. 내무부는 누가 박았는지도 모르는 쇠말뚝을 제거하여 국립박물관에 전시하고, 쇠말뚝 제거를 통해 응어리진 민족의 한을 푸는 계기로 활용하리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다. 지방 행정관청은 ‘쇠말뚝 실태조사와 박은 쇠말뚝’이란 사실을 입증해줄 전문가가 없었다. 결국 지방 행정기관은 가장 편리한 방법, 즉 동네에서 풍수를 좀 볼 줄 안다는 지관(地官)과 역술인을 ‘일제의 쇠말뚝’을 감정하는 전문가로 동원했다.

1995년 2월 15일부터 8월 14일까지 6개월간 전국에서 접수된 주민신고는 모두 4백 39건. 이중 일제의 쇠말뚝으로 ‘밝혀져’ 제거된 쇠말뚝은 8월 말 현재 전국 13개 지역의 18개다. 18개의 쇠말뚝을 발견하기 위해 봄 가뭄이 한창이던 시점에 공무원들이 산야를 헤매고 다녔고, 포항 지역은 해병대 500명이 지뢰탐지기까지 동원한 수색작업을 펼쳤다.

내가 월간조선 기자 시절 전국 18곳 쇠말뚝 제거 현장을 찾아가 주변 사람들, 공무원들, 전문가들에게 일일이 물었으나 그저 “일제가 박았을 지도 모르는 것으로 추정”될 뿐 일제가 박은 쇠말뚝으로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한 개도 없었다. 금오산에서 발견되어 제거된 쇠말뚝은 길이 60cm, 지름 1.8cm였다. 쇠말뚝을 감정한 역술인 민승만 씨는 감정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제작 시기는 지금부터 60~90년 전 대장간에서 두들겨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암반에 22cm가 박혀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구부러져 있었다. 이 장소는 용이 하늘로 용솟음치는 와불(臥佛:누워있는 부처)형상인데, 이마의 급소부분에 박았다.”내가 민 씨에게 “이 쇠말뚝이 일제가 박은 것이 확실한가”를 물었다. 민 씨는 “증거는 없지만 풍수적 관점에서 금오산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일제의 소행으로 추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쇠말뚝 제작시기도 겉부분의 부식 정도로 추정했을 뿐 과학적인 검증절차는 거치지 않았다고 한다.

경북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의 눌의산에서 발견된 쇠말뚝도 사정은 비슷했다. 김천시청의 쇠말뚝 담당 공무원은 “주민 제보 외에 일제의 소행을 입증하는 자료는 없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 이충훈 씨에 의하면 1930년 무렵 눌의산 정상에 비행기 항로 지시 관제를 위해 철탑을 세웠다고 한다. 8·15 해방 이듬해에 주민들이 이 철탑을 쓰러뜨렸는데, 이 쇠말뚝은 역술인 민승만 씨와 김규탁 문화재계장이 답사 후 ‘일제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해서 제거됐다.

김영삼 정부가 제거했다고 밝힌 18개의 ‘일제 소행 쇠말뚝’은 모두 이런 식으로 동네 역술인들의 검증을 받아 ‘일제의 쇠말뚝’으로 둔갑했다. 내가 현지에 내려가 경북도청의 문화재계장에게 “역술인이나 지관의 감정 외에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검증절차를 거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문화재계장은 “예산확보가 안됐고, 지역 내에 전문가가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내년에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전문기관에 감정을 의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만약 그 때 가서 일제 강점기의 쇠말뚝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물으면 공무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마암산 운수봉에서도 한 개의 쇠말뚝이 제거됐다. 물음표 형태에 길이 47cm, 무게 2.8kg의 이 쇠말뚝은 바위를 판 다음 납을 녹여 부은 위에 재와 납을 차례로 채웠다. 영동군청 담당 공무원의 설명에 의하면 이 지역은 해방 후 석산(石山)이 있던 곳이어서 혹시 석산에서 박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석산 개발 전부터 이 말뚝을 보았다는 주민이 나타나 긴가민가하며 뽑았다.

확인 결과 일제 때 (쇠말뚝을 박아) 혈을 질렀다는 구전(口傳)도 없었고, 동네에서 풍수를 좀 본다는 노인에게 감정을 의뢰한 결과 쇠말뚝 박힌 곳이 명당자리는 아니었다. 자신이 없어진 군청 관계자는 취재기자들에게 “일제가 박았다는 확증이 없으니 ‘일제가 박은 것으로 추측되는’, 혹은 ‘일제가 박았을지도 모르는’ 이라는 표현을 반드시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충청매일신문(95년 6월 4일)의 ‘이제야 뽑힌 일제 쇠말뚝’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날 제거된 쇠말뚝은 일제 강점기 때 풍수지리설에 의해 설치된 것으로 길이 60cm, 직경 5cm 정도이며 사방 2m 크기의 바위 중간에 박혀 있었다…’

의혹투성이의 쇠말뚝은 ‘일제의 만행’으로 규정되어 1995년 6월 5일 오후 두 시, 성대한 산신제와 함께 제거되었다. 다음은 영동문화원장이 마을 유지들에게 돌린 산신제 초대장 내용이다.

‘…우리의 민족성과 역사의식을 말살하고도 부족하여 우리 민족의 정기마저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아 정기와 혈맥을 끊는 자행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 쇠말뚝을 뽑아내어 크게는 민족의 정기를 되찾고, 작게는 우리 군민의 정기를 되찾기 위해 추풍령 마암산 운수봉 중턱에서 산신제를 올리게 되었사오니…’

산신제는 영동문화원이 주관했지만 제상 차리는 비용은 군청에서 지원했다. 산신제와 쇠말뚝 제거행사는 일본 NHK, TBS(동경방송)가 취재를 나와 녹화해 갔다.

   
▲ "나는 일제의 쇠말뚝을 믿지 않는다. 마을 앞의 용화산에도 쇠말뚝을 박았다는 소문이 났는데, 그것도 대삼각점이 있던 곳이다. 일본 사람들 우리가 만만하게 욕을 해대지만 측량할 때 보면 기가 막히게 합리적이었다." 사진은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 기념(朝鮮總督府始政五周年紀念) 엽서./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아카이브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1리 북벽입구에서는 한 곳에서 무려 세 개의 쇠말뚝이 발견됐다. 단양에서 천태종의 본산 구인사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북벽은 남한강 깎아지른 듯한 석벽이 병풍처럼 펼쳐진 곳으로, 온달산성과 이곳을 합쳐 ‘단양10경’이라 부른다. 절벽 아래 ‘장군소(將軍沼)’라 하여 강물이 빙빙도는 곳의 바위에 세 개의 쇠말뚝이 박혀 있었다.

이 마을에 사는 조태원 씨(72·전 영춘면장)는 “오래 전에 들은 얘기라 가물가물 하지만 이 말뚝은 일제 강점기에 박은 것이 확실하다”고 증언했다. 주변 산세와 지세로 볼 때 틀림없다는 것이다. 단양군 향토사학회원 김동식 씨는 “1893~94년 항일운동 당시 영춘 인근에서 의병(義兵)과 일군(日軍)간에 큰 전투가 벌어졌다”면서 “항일운동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일제가 장군소 앞에 쇠말뚝을 박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제거된 쇠말뚝을 확인한 결과 두 개는 길이 45cm에 지름 1.7cm였다. 잡아다녔을 때 빠지지 않도록 아랫부분을 쐐기형으로 만든 것이 특이했다. 그런데 한 개의 쇠말뚝에 정교한 볼트가 채워진 것으로 보아 연대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김 씨에게 “1892~94년 경 항일운동 당시에 이렇게 정교한 볼트를 끼울 수 있다고 보는가”를 묻자 답변을 우물거렸다. 이러한 의문은 현지 주민 우계홍 씨(82·전 영춘면장)를 만나면서 어느정도 풀렸다.

다음은 우 씨의 설명. “그것은 일제의 쇠말뚝이 아니오. 내가 이 동네 오래 살아서 잘 압니다만 북벽 아래 뱃줄을 묶기 위해 주민들이 박아 놓은 겁니다. 왜놈들이 쇠말뚝을 박았다면 그렇게 작은 것을 박았을 리가 없어요.” 우 노인은 “어린애 장난 같은 짓”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군청 사람들에게도 이 사실을 설명했지만 일제가 박은 쇠말뚝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주민들은 일제 쇠말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 토교4리 조울재에서도 한 개의 쇠말뚝이 제거됐다.

이는 1995년 8월 14일 광복절 전날 제거됨으로써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쇠말뚝은 길이 25.6cm, 지름 1.8cm로 볼펜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명당의 혈을 지르기 위해 박았다고 믿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았다. 제보자 임현대 씨(62)의 증언을 들어본다. “쇠말뚝은 영월에서 제천으로 넘어가는 구 도로 옆에 있었어요. 저도 학교 다닐 때 매일 쇠말뚝을 본 기억이 납니다. 이 동네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박았다는 설과 일제가 한일합방 후 박았다는 설 등 두 가지로 알려졌는데, 일제가 박았다는 사람이 더 많아 이번에 뽑힌 겁니다.” 이 쇠말뚝도 고증을 거친 흔적을 찾아보긴 힘들다. 김태수 당시 영월군수는 “한전기공(한전 발전소 보수 담당회사)측에서 수색과 발견·조사·제거 업무를 도맡아 했고, 군청은 협조만 했기 때문에 고증 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말뚝이 일제의 소행인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소행인지 어느 누가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을까. 주민 박노상 씨(영월향토사연구회원)는 “주민 증언, 그리고 쇠말뚝이 박힌 옆에 성황당이 있었다는 점이 일제만행의 증거”라고 말했다. 성황당이 일제의 쇠말뚝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상식 있는 사람들이 판단할 몫이다. 이 쇠말뚝이 발견된 때는 6월 13일, 제거작업은 8월 14일에 이루어졌다.

영월군청 담당자는 “광복 50주년 기념 이벤트 행사로 이용하기 위해 제거 일정을 일부러 두 달 가량 늦췄다”고 말했다. 제거 작업날 영월군수가 제관이 되어 산신제가 거행되었다. 이 장면은 8월 15일 아침 6시 40분 KBS 2TV ‘아침을 달린다’에 방영됐고, 일본 NHK, 일본 TV 등에서도 취재를 해 갔다. 강원도 양구군에서는 남면 야촌리 밤골 정상에서 두 개, 남면 청3리 되래지고개에서 한 개 등 모두 세 개의 쇠말뚝이 제거됐다. 이 지역의 쇠말뚝은 길이가 대단히 긴 것이 특징이다. 제일 긴 것은 2m 58cm, 지름 2.5cm나 되었다. 육각형 형태에 가운데 0.5cm의 구멍이 뚫려 있고, 아랫 부분엔 잘 뽑히지 않도록 나사식의 굵은 쇠뭉치가 달려있었다.

남면 야촌리 쇠말뚝은 양구사랑회 회원들이 현지답사 후 ‘전설 따라 삼천리’나 다름없는 주민 증언을 근거로 ‘일제의 쇠말뚝’으로 결론 내렸다. 그러나 양구사랑회 회원들은 확신이 서질 않아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의 구윤서 회장에게 수차례 감정을 요구했다. 쇠말뚝은 구 회장이 현장답사를 하기 전에 제거되고 말았다. 3·1절 행사를 빛내기 위해 2월 28일 대대적인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며 뽑힌 것이다. 현지 취재결과 쇠말뚝 중간에 난 구멍이 정교하게 깎여 있고 표면의 부식상태로 보아 일제 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기엔 너무 새 것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양구사랑회 이주호 사무국장에게 이 질문을 하자 “일제가 박은 쇠말뚝이란 증거는 없다. 그러나 일제의 소행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지 않느냐”며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주호씨의 설명이다.

“우리도 쇠말뚝 제거작업에 참여하면서 큰 걱정을 했습니다. 아무리 조사해도 일제의 소행을 입증할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죠. 증거도 없이 쇠말뚝을 뽑으면 주민들이 신앙처럼 믿고 있는 ‘일제의 만행’을 인정하는 셈이고, 결과적으로 주민을 선동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해서 고민이 컸어요.” 우여곡절 끝에 양구에서 제거된 쇠말뚝은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광복 50주년 기념 ‘근대 백년 민속풍물전(8월 2일~9월 25일)에 정선·양양지역에서 제거된 쇠말뚝과 함께 전시되었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전시된 여섯 개의 쇠말뚝 옆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붙어 있었다.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의 정기와 맥을 말살하려고 전국 명산에 쇠말뚝을 박거나, 쇳물을 녹여 붓거나 숯이나 항아리를 파묻었다…. 즉 풍수지리적으로 유명한 명산에 쇠말뚝을 박아 지기를 눌러 인재 배출과 정기를 누르고자 한 것이다.’

당시 쇠말뚝 제거의 전문가로 자리매김된 구윤서 회장, 서길수 교수도 일제의 풍수침략용 쇠말뚝이라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했다. 구 회장이나 서 교수는 지방자치단체의 ‘쇠말뚝’ 감정 요청을 받고 몇몇 지역에서 조사작업에 참여했다. 그 결과 군부대가 박은 것, 목재 전주(電柱) 지지용, 광산이나 산판에서 물건 운반용으로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원들은 “일제의 쇠말뚝으로 해달라”고 애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다음은 구 회장의 설명. “목포 유달산에 일제 쇠말뚝이 엄청나게 박혀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현장답사를 해보니 일제가 박은 게 아니라 가로등과 전망대 등 구조물 설치 때 박았던 것을 제거하지 않아 생긴 오해였다.” 대구의 역술인 민승만 씨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7월 말 대구 앞산공원 근처에서 쇠말뚝이 발견되었다. 공무원들은 확인도 않고 ‘일제 쇠말뚝’이라며 산신제 지낼 준비를 해 놓았다. 내가 확인해 보니 도저히 일제의 것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제발 일제의 것으로 해달라’고 애원하는 공무원들을 설득해 산신제를 위해 붙였던 플래카드를 떼고 준비한 음식도 폐기처분했다.” 풍수지리에서 인위적으로 풍수를 누르는 행위를 염승풍수(厭勝風水)라 한다. 염승풍수는 고려조부터 성행하여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 조선일보 논설고문 이규태 씨 칼럼 (85년 8월 1일)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전라남도 장흥 동쪽에 사자산이 솟아 있는데 이 풍수가 사자처럼 세어서 장흥 고을의 번창을 짓누르고 있다는 풍수해석이 나왔다. 이에 고을 어른들이 모여 사자산 정수리에 커다란 쇠못을 박아 왕성한 풍수기운을 짓눌렀던 것은 1930년의 일이었다’

   
▲ 김영삼 정부는 취임식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 한다”다고 선언하면서 ‘민족’ 우선의 정치를 선언했고, 취임 직후부터 범국가적으로 반일 감정을 증폭시켰다. 사진은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 기념(朝鮮總督府始政五周年紀念) 엽서./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아카이브


염승풍수 행위는 광범위하고, 또 오랫동안 이어져온 우리 풍습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도 염승풍수를 위해 명당에 쇠말뚝을 박았음을 입증한다. 풍수가 최어중씨는 월간 ‘산’(85년 9월)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대지에 흐르는 음양(陰陽)의 기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이 천지우주의 기가 쇠못 몇 개 박았다고 끊어진단 말인가 없어진단 말인가. 온 산에 쇠못을 박아 보아라.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일제가 우리의 명산에 쇠말뚝을 박았다면 명산의 정기를 절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 즉 풍수에 꼼짝 못하는 민족 심성을 악용하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전문가들과 쇠말뚝이 박혀 있다고 제보가 들어온 지역을 대조한 결과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측량을 위한 기점으로 활용되는 대삼각점, 소삼각점과 주민들이 쇠말뚝을 제보한 지역이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입증해 준 사람을 내가 강원도 화천에서 찾아냈다. 이봉득 씨(78·화천군 하남면 삼화리)는 스물 한 살 때인 1938년 무렵 산림보호국 임시직원으로 화천·양구 일대를 돌며 측량업무를 도왔다.

이봉득 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스물 한 살 때 조선총독부 임정과에서 나온 측량기사 고가 주우켄(당시 30세 정도)과 장길복(당시 25세 정도)이란 사람을 따라 화천 양구 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그는 “일제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측량을 위해 박아놓은 대삼각점을 일제가 혈을 지르기 위해 박은 쇠말뚝으로 오해했다”고 말했다. 대삼각점이란 측량기준점인데, 가로·세로가 각각 10cm 크기에 길이가 1m 30cm 정도의 표식이다. 머리부분의 열십자 한가운데 측량기 추를 맞추고 측량을 하는 기점이다. 지도상에 △ 표시와 해발고도가 적힌 곳이 대삼각점이다. 대삼각점은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다음 토지 조사를 위해 측량을 하면서 전국의 높은 산에 다 설치했다. 조선 사람들은 전국의 산꼭대기마다 들어서는 이상한 모양을 한 막대기를 보고 ‘왜인들이 조선에 인물이 못나도록 혈을 지르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 씨의 설명이다. 

“대삼각점이 일제가 우리 국토의 혈맥을 끊기 위해 질러놓은 쇠말뚝이라고 소문났으니 마을 주민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모조리 파내 망치로 깨부수어 여기저기 흩어놓았다. 측량기사 고가는 ‘뒤돌아서면 파내버리는군’ 하고 혀를 찼다.” 이 씨는 대삼각점이 쇠말뚝으로 잘못 알려졌다는 사실을 이렇게 확인했다. “측량기를 산꼭대기까지 운반하기 위해 아랫마을 장정들을 부역시켰다. 이 사람들이 산을 오르면서 나에게 ‘왜인들이 혈을 지른 산’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정상에 올라와 대삼각점에 측량기를 세우는 것을 보면서 허허 웃었다. ‘어르신들이 저걸 보고 혈을 질렀다고 그랬구나’ 하고 허탈해 하며 내려가는 걸 수없이 봤다.” 이봉득 노인의 말이다. 

“나는 일제의 쇠말뚝을 믿지 않는다. 마을 앞의 용화산에도 쇠말뚝을 박았다는 소문이 났는데, 그것도 대삼각점이 있던 곳이다. 일본 사람들 우리가 만만하게 욕을 해대지만 측량할 때 보면 기가 막히게 합리적이었다. 혹시 깡패무리인 왜인집단이 몰래 명당에다 쇠말뚝을 박았다면 모를까, 왜인들이 쇠말뚝을 박았다는 건 대삼각점을 보고 오해한 것이다.”

구윤서 회장도 “쇠말뚝이 박혔다고 제보한 지역을 가보면 측량용 삼각점이 박혀 있는 곳이 많았다”고 시인했다. 우리는 일본을 이렇게 사실이 아닌 주장을 가지고 모욕하고 비난하고 공격해도 괜찮은가?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김용삼]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