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민주팔이'나 북한 동정으론 대한민국을 못 지킨다
대한민국은 미생(未生)국가이며,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지적을 지난 글에서 밝혔다. 미디어펜 주필 조우석은 그런 구조적 흠결이 1948년 건국부터 노정됐던 한계였는데 지금껏 보완되지 않았다는 진단도 곁들였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문제제기는 정치권은 물론 언론과 지식사회에서 제대로 등장한 바 없었다. 그저 공허한 선진화란 구호, 철딱서니 없는 민주화 헛소리만이 무한반복됐다. 이에 조우석은 '지속가능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하여' 시리즈를 상하 편으로 나눠 싣는다. 국제사회 봉쇄에도 불구하고 5차 핵실험을 공언한 북핵 위기 속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과, 반(反)문명집단 평양의 상반된 운명이 초읽기에 들어간 게 지금이다. 이 상황이야말로 대한민국 체제수호와, 한반도 신질서 정착을 위한 올바른 정치철학을 점검을 해볼 좋은 기회다.  <편집자 주> 

'지속가능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하여'-①

   
▲ 조우석
 대한민국은 '미생(未生)국가'이며,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는 여전히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문제제기에 적지 않은 분들이 공감해줬다. 이 역사적 전환기에 스스로를 다지는 작업이 필수라는 나의 진단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문제는 대한민국 체제수호의 큰 그림을 그리자는 제안이 이 나라의 현실정치 구조 속에서 너무 이상적인 담론이 아니냐는 일부 걱정도 없지 않았다. 그 점 인정한다. 진흙탕의 계파 싸움에 코 박은 여당, 정체성 파악도 못하는 못난 야당은 정치혐오와 환멸을 안겨주는 게 엄연한 우리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해 여당 새누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가치집단에서 크게 멀며, 야당인 더불어민주는 1980년대 운동권 정당에 머물러 있다. 아찔하다. 4월 총선이 이런 각각의 체질을 바꿔줄 호기로 기대되는데, 실은 언론 상황도 썩 개운한 건 아니다.
 
일간지-TV 어디에도 정치기사는 없다. 무한정 쏟아지는 건 소음에 다름 아닌 정치가십일 뿐이니 제대로 된 사회적 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할 얘기는 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안보위기를 극복할 수 있고, 소망이던 대한민국 체질개선도 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가?  
 
반복하지만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과, 전체주의의 반(反)문명집단 평양 사이의 엇갈린 운명이 초읽기에 들어간 시점이다. 쉽게 말해 평양이 깨지는가, 우리가 먹히는가가 걸려있다. 이런 국면에서 공허한 선진화란 구호, 철딱서니 없는 민주화의 헛소리 대신에 냉철한 자기점검부터 해야 옳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4일 오후 계룡대에서 열린 2016년 장교 합동임관식에서 신임 장교들에게 손을 흔들며 축하의 인사를 하고 있다./사진=청와대 홈페이지

안보를 말하면 수구골통의 냉전주의자?

새삼 재확인해보지만, 대한민국은 기적이다. 이 나라의 건국 자체가 이승만이란 걸출한 지도자가 연출했던 ‘미션 임파서블’의 드라마였다는 점에서 기적이 분명하고, 이후 체제방어의 철갑옷이 없이 지금까지 70년 가까이 버텨온 것이 또 한 번의 기적이다.
 
이게 문제다. 점차 부작용이 생겨난 것이다. 그걸 어떤 이는 이렇게 표현했다. "겉보기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 거짓말처럼 안보가 보장되어 왔고,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기적처럼 평화가 유지돼 왔다."(<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의 저자 김기삼)
 
어느덧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를 공짜로 여기는 고질병이 자리 잡았다. 고약한 무임승차의 심리가 한국인의 집단정서로 자라난 것이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경제번영이란 당연히 굴러들어온 것이며, 국가안보-체제수호쯤이야 미군이 해주는 영역이 아닐까? 
 
그래서 안보를 말하면 수구골통의 냉전주의자로 분류되며, 평화와 공존 따위를 들먹여야 개념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애국을 말하는 사람은 숫제 팔불출로 분류된다. 무책임의 극치인 한국인들이 한국인들의 종교는 민주주의교(敎)인데, 이런 식이다.
 
완전무결한 민주주의가 한국인들에겐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짜잔하는 순간 주어졌다. 우리가 누리고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게 그 고결하고 온전한 민주주의인데, 안타깝게도 욕심 많은 독재자와 권력자들이 그걸 차례로 훼손해왔다. 때문에 현대사란 민주주의 금자탑을 지키기 위한 민중저항의 역사다. 말도 안 되는 이런 헛소리가 통하는 게 우리현실이다.
 
그래서 정치학자 최장집(고려대 명예교수) 같은 자들이 민주주의교의 거룩한 사제인양 으스댄다. 그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더니 급기야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필요하다고 외치고 있다.(실제로 그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민주화>란 단행본을 각각 펴낸 바 있다.)
 
최장집이 유독 좌파라서 그런 목소리를 내긴 것도 아니다. 그보다 윗세대인 정치학자 차기벽(학술원 회원) 같은 분도 오십보백보다. 3년 전 펴낸 <민주주의의 이념과 역사>(아로파 펴냄)도 어슷비슷한데, 내 눈에는 '환상적 민주주의'에 정신이 팔려 현실을 못 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도 박정희의 유신 소리만 나오면 부글부글 끓는 건 그 때문이다. 이 나라 지식사회 풍토 전체가 그렇게 왜곡됐다. 해방 직후부터 그러했다. 당시 좌익 세력이 장악했던 중고교와 대학의 캐치프레이즈가 몽땅 '민주 학원'이었다. 한국인 모두는 "민주주의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식의 조숙(早熟)한 민주주의, 과잉 민주주의에 중독되어 있다.

   
▲ 한국인 모두는 "민주주의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식의 조숙(早熟)한 민주주의, 과잉 민주주의에 중독되어 있다.이는 민주화된 1987년 체제 이후 잘못된 민주주의 이해에서 비롯된 '예고된 참사'다. 사진은 지난해 민중총궐기 모습./사진=미디어펜

신영복-이석기-유시민에서 유승민-최장집까지

이 통에 온갖 '민주팔이'들이 끼어들어 나라 전체가 출렁대고 북새통인 건 어찌보면 당연한 노릇일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부르주아민주주의라고 조롱하는 신영복,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와 닮은꼴인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구 통진당 이석기도 모두 민주주의 사기꾼에 불과하다. 
 
또 다른 야바위꾼 먹물인 유시민도 말장난에 불과한 <후불제 민주주의>란 책으로 젊은이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아니다. 그런 민주주의교는 야당이나 좌파쪽만이 아니고, 집권여당 쪽에도 똬리틀기 시작했다. 그 최대 해프닝이 지난해 여름 '배신의 정치꾼' 유승민이었음을 기억해둘 일이다.
 
집권여당 원내대표이던 그 자가 물러나면서 했던 말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아니었던가? 그 발언 직후 인터뷰를 통해 "이 나라 헌법 1조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는 그의 생뚱맞은 소리에 나는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아니 경악했다. 이제 제도권 범털까지도 자유민주주의의 참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우스운 세상이 된 것이다.
 
한국인 모두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소리 높혀 외치는 꼴인데, 내가 아는 진실은 따로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저들 모두가 위험천만한 선무당식의 민주주의자들이며, 사람을 잡는 것은 물론 끝내 대한민국 전체를 망가뜨리거나 말아먹을 수도 있다.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 이 나라에서 거세게 전개됐던 민중민주주의란 것의 실체가 무엇이던가? 그건 한국사회의 사회주의화를 목표로 한 반민주적 혁명운동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을 국가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며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요즘 나라가 뒤숭숭하며, 그게 걸핏하면 울끈불끈 하는 민노총과 전교조 때문이라고? 이 모두 이른바 민주화된 1987년 체제 이후 잘못된 민주주의 이해에서 비롯된 '예고된 참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걸 보며 잘못 학습한 젊은 층은 좌파정서에 물들어 이젠 거의 고질병이 됐다.
 
그들은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돌을 던지는 게 습관이 됐고, 산업화의 영웅을 대접할 줄도 모른다. 이 모든 소모적 현상이란 자유민주주의의 참뜻을 구현하는데 미흡했던 '체제방어가 없는 취약한 민주주의'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일제로부터 벗어난 지 70년이 넘지만 껍데기만 남은 나라, 우리가 소원하는 완생(完生)국가는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전체주의 북한을 해방시킬 이 절호의 찬스에서 우리 스스로가 체제의 무장을 서둘러야 하는데, 그걸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를 제2회 칼럼에서 점검한다. /조우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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