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주희 바른사회시민회의 사회실장
“이제 콩나물과 두부는 동네수퍼에서, 순대와 떡볶이는 동네분식점에서, 오징어와 낙지는 재래시장에서 사야되나??”

지난 3월 박원순 서울시장이 51개 품목에 대한 대형마트 판매제한을 발표했을 때 소비자들이 보인 반응이다. 계란, 멸치, 소주 등 세세한 품목까지 지정해주니 이보다 더 ‘친절’한 시장님이 있으랴. 소비자들은 박 시장의 친절함 때문에 하마터면 온 가족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마트-상점 몇 군데로 뛰어다녀야 했을지도 모른다. 서울시 계획이 무산된 게 천만다행이다.

그렇게 헤프닝으로 마무리되는가 했던 대형마트 판매품목 제한이 다시 이슈로 떠올랐다. 박원순 시장의 철회 선언 이후 불과 수 개월만이다. 12월 초 농수축산물 일부 품목을 대형마트에서 팔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이 민주당 우원식 의원 대표발의로 국회에 제출됐다.

이번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에는 자치단체가 ‘상생 품목’을 지정하면 그 품목들은 대형마트나 SSM에서 판매할 수 없다. 해당 자치단체에서 닭이나 고등어 등을 상생 품목으로 결정할 경우 그 지역내 대형마트에서는 역시 팔 수 없다.

정치권이 대형마트 영업시간 규제에서 한껏 재미를 보더니 이제는 ‘대형마트 특정품목 판매제한’까지 팔을 걷어 부치고 있다. 재래시장과 골목상권을 살리겠다는 정치인의 마음은 갸륵하다. 그렇다고 일부 중소상인에게 따뜻한 배려를 베풀고자 다수의 시민, 소비자의 불편은 이대로 외면당해도 괜찮은가? 한쪽 눈으로는 중소상인을 보면서, 다른 쪽으론 소비자를 보지 못하는 외눈박이 법안이 아닌가.

   
▲ 우원식 민주당의원이 대형마트의 판매품목을 제한하는 유통산업발전법안을 발의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법안은 대형마트내 영세상인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농산물의 판로도 막아 농민들의 반발이 거세다. 소비자들의 발길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문제점이 있다. 사진은 이마트 본사.

대형마트 판매품목을 제한하려는 시도는 이미 실패를 경험했다. 서울시는 51개 대형마트 판매품목 제한을 들고 나오자마자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서울시는 소비자 반발은 물론이거니와 이보다 농민단체와 중소협력업체의 저항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결국 당당하게 내걸린 상생이란 간판은 참으로 초라하게 한 달도 못 넘기고 자취를 감췄다. 이유는 수두룩하다. 대형마트에 납품하는 농어민과 중소상인의 생존이 걸린 절규, 판매제한 조치를 비웃는 듯 유사제품의 등장, 동네 및 재래시장으로의 유인효과 미흡 등이다.

소비자를 외면하고 안중에 두지 않는 법안이 국회에서 멀쩡히 추진된다. 농민과 중소상인 등 특정 집단을 돕기 위함이라는 명분이 뻔뻔하게 앞세워진다. 대한민국 국회는 실로 심각한 소비자 망각증세를 앓고 있는 게 아닌가. 시장의 진정한 주인을 소비자가 아닌 공급자로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사실 이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국회가 법안과 정책에 따라 시민과 소비자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다. 대형마트를 월 2회 강제로 문닫게 하여 골목수퍼와 재래시장으로 소비자의 등을 떠밀고, 동네빵집을 살린답시고 집주변에 프랜차이즈 제과점의 입점을 막아 소비자의 입맛까지 단속한다.

이제는 대형마트에서 사지 말아야 할 것과 동네상점에서 살 품목까지 지정해 매일 소비자의 발걸음마저 통제하려 든다. 이렇게 시민과 소비자는 선택권을 박탈당하고 시장에서 서서히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럼에도 소비자를 옥죄는 상황을 알아채지 못하고 ‘상생’ ‘동반성장’ ‘대기업 규제’란 감성적 구호에 흔들리고 맞장구치는 이들이 너무 많다. 정치권, 정부, 좌파세력의 꿍꿍이 속내를 설명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분위기다.

국회가 내세우는 중소상인 상생 명분도 현실에선 다른 결과를 낳는다. 박원순 시장의 51개 품목 제한 때에도 제주 어민들은 갈치, 고등어의 50%이상을 서울 등 대형마트에 납품한다며 서울시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2000명의 농민과 대형마트 납품업체가 대규모 집회를 통보하며 서울시를 압박했다.

이번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 발의에도 국내 최대 농민단체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법안 철회를 호소했다. 가뜩이나 대형마트 휴무로 농산물 재고가 쌓여 매출에 큰 타격을 입고 있는데 판매품목 제한이 도입되면 농어민의 판로가 막힌다고 한다.

국회의 순진한 발상이 농어민을 비롯하여 대형마트 납품업체나 해당품목 가공업체, 마트에 입점한 영세 임대상인 모두를 공멸의 길로 내몰게 한다. 동네수퍼는 살리는데 마트 영세상인은 죽이니, 그들 사이 편을 갈라 ‘을(乙)간의 전쟁’을 부추기는 악법이 아니고 뭐겠는가. 이 안타까운 ‘을(乙)간의 전쟁’은 이미 동네수퍼 상인들 간 상품공급점 규제를 두고도 진행 중이다.

시장에서 공급과 수요의 물결은 자연스럽게 흐른다. 정치권이 시장을 조정하고 통제하려는 순간, 일부 특정집단만 이익을 볼뿐 그 외 다수의 소비자와 공급자는 피해를 보기 마련이다. 이러고도 정치권은 상생이란 용어를 들먹일텐가? 소비자를 기만하고 시장의 흐름을 역행하고 다수를 희생의 볼모로 잡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은 신속히 폐기돼야 마땅하다. /박주희 바른사회시민회의 사회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