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세력이 기업국유화, 기업인 청산땐 한강의 기적은불가능

좌승희의 선진부국 4만불 경제정책-차별화경제 강의(3)

   
▲ 좌승희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미디어펜 회장
용미(用美)로 닦은 천지개벽의 바탕


세계 문명사에 일등문명이 영원한 적은 없다. 시간의 장단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결국 흥망의 길을 갔다. 왜 그럴까? 일등을 오래하면 자만심이 생기고 나태해진다고도 하고 타성으로 혁신에 소홀해진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결국은 이등문명보다 못해진다는 말인 셈이다.

그럼 이등문명은 도대체 왜 일등문명이 부딪친다는 문제에 봉착하지 않고 일등으로 도약하게 되는가? 왜 나태해지지 않고 혁신을 계속하게 되는 걸까? 이등이면 모두가 그렇게 일등과는 다르게 되는 것인가? 그동안 이 후자의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게 명쾌하지 못했다.
일등은 이등으로부터 배울게 많지 않지만 이등은 항상 일등으로부터 배울 게 많다. 그래서 일등을 이등에 앞선다하여 일등이라 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흥하는 이웃을 따라 배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문화진화라는 경제의 발전과정 또한 후발자가 선발자를 무임승차하여 배우는 과정이다. 왜 이등 문명이 결국 일등문명을 캐치업하게 되는가? 이등은 일등을 무임승차하여 더 발전할 수 있지만 일등은 결국 더 무임승차할 대상이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 주위에 나보다 흥하는 이웃이 많을수록 나에게 성공가능성은 많아지지만 역으로 내 주위에 모두 나보다 못하는 이웃만 있으면 내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길은 없어진다.

국가나 국민경제의 성공여부는 얼마나 훌륭한 이웃을 두고 (비선형적인) 상호교류를 함으로써 시너지를 향유하느냐에 달렸다. 흥하는 이웃을 잘 만나 흥하는 문명의 패러다임을 따라 배우면 더불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역으로 이웃을 잘못 만나 망하는 문명에 줄을 서면 성공의 길은 더 멀어진다.

그럼 흥하는 문명의 패러다임이란 무엇인가? 경제발전이라는 문화현상은 흥하는 주체의 문화유전자가 복제되어 그 수가 증폭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발전은 흥하는 이웃을 우대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흥하는 이웃을 우대하는 사회문화적 환경을 조성해내는 문명은 성공하지만 역으로 흥하는 이웃을 폄하하여 그 수의 증폭을 억제하는 문명은 성공하기 어렵다.

조선조 몰락은 망하는 중국을 따른 결과

조선조의 몰락은 망하는 중국 문명의 패러다임을 끝까지 맹종한 결과이다. 중국은 중세까지 세계부의 창출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500년대 이후 서구 영국과 중국의 운명이 서서히 갈리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고 재산권을 보장해 나갔다. 자산가와 귀족계층을 중심으로 인구증가가 일어나면서 높은 교육을 받아 인생성공의 노하우를 체화한 상류계층의 평민계층으로의 하향이동이 일어났다. 물론 원래의 하층, 평민계층은 인구증가 없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산업혁명(1800년대 초) 개시 전 영국은 전인구가 교육을 제대로 받아 높은 지적능력을 보유한 인구로 대체되었다. 경제발전의 문화적 여건이 성숙되었다.

역으로 중국은 해양진출을 억제하여 흥하는 이웃들과의 교류를 억제하고 르네상스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인구는 귀족 등 상층부에서는 증가하지 않고 저소득 농민계층에서만 증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교육기회를 갖지 못한 인구로 뒤덮이게 되었다. 무지한 국민의 나라가 되었다. 흥하는 이웃이 양산되지 않으니 발전을 일으키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럼 왜 영국과 중국의 인구구조의 변화양상이 달랐는가? 한 가지 필자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영국은 상대적으로 경작가능 토지가 부족한 목축업 중심의 농업국이었다. 그런데 15세기부터 시작되어 19세기 초까지 완성되는, 목축업 등 농업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공유지나 미개간지를 대규모 토지로 사유화하는 인클로우져운동(enclosure movement)의 결과, 토지소유의 집중과 토지무소유 저소득계층의 양산과 소멸이라는 계층변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이 과정에서 상류층에서의 인구증가가 하층계층의 출산율저하와 궁극적 소멸을 대체하는 상류층의 하향이동현상이 일어났다. 반면 중국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풍부한 강유역 농토를 바탕으로 하는 미작중심의 농경사회로서 저소득계층의 생활이 상대적으로 양호하여 높은 출산율을 지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구증가의 대부분이 하층계층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럼 닫힌 사회로서, 재산권의 보장이나 경제적 자유의 진전도 없이, 무지한 대중을 바탕으로 산업혁명에 친화적이지 못했던 중국을 맹종한 조선은 어떠했는가? 중국과 마찬가지로 재산권제도의 미비, 경제적 자유의 제약, 반실사구시적 유교문화의 전통 속에서 흥하는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하였다.

국내적으로 사농공상이라 하여 생산적 활동(상업과 산업, R&D 활동)은 폄하되고 비생산적 활동(공자님 외우기, 한자 서예)이 우대받는 400여년의 역사를 보냈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패망한 것은 바로 조선의 패망의 전조인 것이다. 이웃이 망하니 망하는 패러다임을 따른 조선이 망하는 것은 필지의 결과이다.

일본이 명치유신 이전부터 서구와의 교류를 확대하면서 유신의 문화적 바탕을 다져간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의 흥함은 바로 개항을 통해 흥하는 서구의 패러다임을 신속히 무임승차한 결과이다.

   
▲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대통령은 제헌헌법에서 서구식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명문화하고, 재산권보호, 자유기업제도, 의무교육 도입 등 흥하는 국가건설의 토대를 쌓았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아 공업화에 투자함으로써 한강변 기적을 창조하는 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북한은 망하는 패러다임인 소련과 중국의 패러다임을 맹종해 세계최악의 빈곤국가로 전락했다.사진은 이승만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50년 10월19일 한강철교 폭파 후 다리를 건너온 기관차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이승만, 경제용미(經濟用美)로 천지개벽의 바탕을 놓다.

한강변의 경제개벽은 미군정과 48년 건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북한은 망하는 문명의 패러다임인 중국, 소련의 사회주의 패러다임을 따랐고, 남한은 미국식 교육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으로 흥하는 미국의 패러다임을 따랐다. 오늘날 북한의 어려움은 바로 망하는 이웃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바꾸지도 못한 결과인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서구의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적극적인 용미전략을 통해 건국 초기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북한의 6.25남침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국가의 기초를 놓았다. 이 과정이 아니었다면 그 이후 한강의 기적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사유재산권 제도의 정착, 자유기업제도의 정착, 상업금융제도의 정착, 교육제도의 확충 등 서구식 시장경제의 기초질서와 제도들이 구축되었다.

제헌 헌법이 법률의 규정을 전제로 하였지만 기업이익의 노사 균점(제18조)을 선언하는 등 당시의 유행이었던 사회주의적 요소를 많이 담고 있었으나 재산권을 기본권으로 보장(제15조)하였고, 실제 경제운영은 자유 시장경제 철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사유재산제도는 일제 때 민사령(1912년)에 의해 도입되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주인 없는 귀속재산에 대한 국유화조치로 당시 근로자들의 ‘자주관리운동’에 쐐기를 박아 기업경영의 독자 영역을 확보해주었다. 동시에 귀속재산의 사유화조치를 통해 사유재산제도를 정착시켜나갔다.

당시 근로자들의 ‘자주관리운동’이 자칫 사회주의성향의 사회분위기속에서 자유기업제도의 근간을 훼손할 우려가 있었는데 미군정은 이를 적절히 관리하였다. 그래서 미군정이후에도 사유화조치는 계속되었다. 물론 제헌 헌법이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등의 공익성 높은 분야의 기업들과 광산업 등을 국유화하도록 함으로써 건국 후 일부기업들에 대한 국유화 조치가 있었다. 하지만 1954년 11월의 개헌으로 국유기업의 범위를 대폭 축소하였고, 군정이후의 사유화조치들을 기업, 부동산 등에 걸쳐 계속 추진하였다.

농지소유의 평등을 지향한 농지개혁 과정(1950. 3월 시작하여 1957년 완료)에서도 사유재산제도는 유지되었다. 일단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을 지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북한 사회주의식은 물론 유상몰수 무상분배라는 절충안을 배격함으로써 자본주의 사유재산권제도의 틀을 유지하였다.

물론 일부 지주들은 충분한 보상이 안되기도 하고 당시 높은 인플레로 인한 토지채권의 실질가치 하락으로 몰락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크게는 사유재산권제도가 유지되었다. 땅을 산 농민 중 대금을 모두 납부하지 못한 농민들에게는 15년에 걸쳐 분납토록 했다. 소작제도하에서 7:3으로 가져가던 지주들에게는 불리하고 소작농들에게는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다.

제헌헌법이 초등교육의 무상의무교육을 선언(제16조)함에 따라 1949년부터 전면적인 의무초등교육을 실시하고 중등·고등교육제도를 확충하였고, 군을 통한 문자해독 교육 실시 등으로 빠른 시간 안에 전 국민의 문자해독능력을 확충했다. 이는 박정희시대의 경제발전의 예비산업역군을 양성한 것이다.

건국초기 여러 가지 안보적 위기와 어려운 경제상항 속에서 종합적인 경제발전전략을 구사할 여유는 없었지만 어려운 경제형편을 철저한 용미전략으로 극복하였다.
전후 미국은 동아시아 경제역학관계를 일본을 중심에 두고 일본의 산업화를 지원하고 한국과 대만은 일본산업의 소비시장 정도로 기능하기를 기대하였다. 따라서 한국의 산업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구상은 일본의 전전의 대동아공영권을 부활하는 것에 불과하다 보고 경제부흥계획을 통해 독자적 경제력을 확충하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반공 최전선의 한국의 지정학적 특성을 적절히 이용하여 미국의 원조를 끌어내고 나아가 경제부흥에 유리하게 바꾸어 활용하고자 노력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우리는 1954년부터 1961년까지 8년 중 1년 2개월 정도를 미국의 원조만으로 먹고 살았다. 나라 살림의 태반을 원조물자를 매각한 자금(대충자금)으로 충당할 만큼 재정 상태는 취약했고, 국방비는 거의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했다. 원조물자는 소비재 및 원자재 위주였고, 이 원자재를 바탕으로 제조업이 생겨났다.

이른바 ‘3백(白)산업’이라 불리는 설탕, 제분, 면방직 등 생필품 중심의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산업화(공업화)는 초보 단계에 머물러 그럴듯한 공산품이라고는 라디오(1959년)와 선풍기(1960년) 정도였다. 항상 대외교역은 적자에 시달렸으며 무역적자는 한국에 주둔한 유엔(UN)군으로부터 벌어들인 수입(용역 및 군납 등)과 원조로 겨우 충당하고 있었다.

한국이 받은 경제원조는 막대했다. 1946~78년간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는 60억 달러였는데 비해 아프리카 전체에는 69억 달러, 중남미전체는 149억 달러였다. 또 한국은 이 기간 30년간 세계전체로부터의 원조수혜 대상국별 순위에서 이스라엘과 베트남을 제외한 최고수준의 원조수혜국이었다. 이런 원조수혜는 물론 세계 반공전선의 최전방인 한국의 중요성을 감안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이승만 대통령의 용미전략의 성공결과인 셈이다.

원조의 수혜방식에 있어서도 소비재 원조에 비중을 둔 비계획원조보다 가능한 시설재중심의 계획원조의 비중을 높여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원조를 배분 활용함에 있어서도 아프리카 등에서 원조를 정치적 목적으로 배분하고 낭비한 예와는 달리 경제적 필요성이 있는 부분에 효율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원래 북한에 비해 생산시설이 취약한 상태에서 그 나마 6.25로 소실된 소비재 산업기반을 신속히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당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만연 속에 낭비도 없지 않았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높은 통찰력은 바로 당시 새롭게 등장하는 사회주의 패러다임 속에서도 흥하는 문명패러다임을 제대로 읽고 이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용미를 안보 뿐 만아니라 경제에도 적절히 구사함으로써 건국초기 국가건설과 시장제도의 바탕을 마련하여 60년대 도약의 기틀을 놓았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일제잔재를 충분히 청산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으나 당시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너나할 것 없이 다 일제의 “잔재”들이니 다 청산하면 누가 흥하는 노하우를 퍼트려나갈 것인가? 실용적 선택이 불가피했다고도 할 수도 있다. 이는 박정희가 혁명 후 부정부패와 탈세의 원흉이라는 기업인들을 사면하고 앞장세워 경제개발에 나선 것과 유사한 경우이다.

만일 당시 자본주의경제에 적대적인 이념세력들이 도덕적 가치를 내걸고 집권해서 기존의 일제치하에서 생존해온 한국기업들을 몰수해서 경영하거나 국유화하고 기업인들을 청산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도덕적으로 깨끗한 나라가 되었을지는 모르나 오늘날의 경제 성공기적의 씨앗은 뿌려지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한 것일지 몰라도....../좌승희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미디어펜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