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전혁 명지대 교수, 전 국회의원
며칠 지방출장, 출판기념회를 위한 원고정리, ... 교학사 역사전쟁 시즌 II 등 좀 바빴습니다. 상황이 정리돼서 교육단상을 다시 시작합니다. 가급적 매일 쓰겠다는 약속 못 지켜서 죄송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보다 정확히는 민주적 정치제도)는 짧은 시간에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민주주의는 그 고향인 서구에서는 수백년의 긴 시간 동안 엄청난 피를 댓가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그렇다면 왜 서구인들은 그 긴 시간동안 그 큰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를 만들어 왔을까요? 민주를 찬양하고 민주를 외치는 사람들조차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선 민주의 어원부터 살펴볼까요?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근대적 개념들이 외국에서 들어왔습니다. 또 그 번역의 대부분은 일제 때 이루어졌는데, 민주주의는 대표적으로 잘못 번역된 단어입니다. 앞서 살짝 언급한 것처럼 민주는 ‘주의’가 아닙니다. ‘주의’였다면 애초부터 '~ism'이 붙었겠죠. 영어 democracy는 그리스 어원을 가진 단어로 ‘다중(demo)에 의해 지배(cracy)되는 체제’라는 뜻입니다. 왕이나 귀족, 돈 많은 사람이나, 학식 있는 사람, ... 이런 소수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가 아니라 시민들 다수의 의사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라는 뜻입니다.

   
▲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 나찌의 히틀러도 민주적 선거를 악용해 나찌정권을 수립했다. 히틀러는 반인륜적인 유태인 학살극을 자행하고, 수백만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나찌가 유대인을 참혹하게 죽인 홀로코스트는 민주의 탈을 쓴 전체주의 독재정부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지 보여주고 있다. 자유의 가치를 상실한 민주는 종종 비극적 재앙을 가져오는 것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왜 민주인가? 왜 서구사람들은 민주 체제를 위해 투쟁했을까요? 그 핵심은 바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앞에서 저는 민주는 제도에 불과하다고 언급했습니다만 제도와 주의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도는 일종의 그릇입니다. 그 그릇에 든 진짜 소중한 내용물은 바로 ‘자유’라는 겁니다. '주의'가 붙어야 할 곳은 자유입니다. 사실 개인의 자유만 보장이 된다면 꼭 민주정이 아니라 왕정이 되어도, 소수의 지식인들이 정치를 독점해도 무관합니다.

그렇지만 진흙으로 대충 빚은 그릇에 음식을 담으면 그 음식이 상하던가 아니면 먹을 수 없게 되는 것처럼 민주가 아닌 그릇에 자유가 담기기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자유와 민주는 ‘일란성 쌍둥이’ 같은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는 ‘본질적인 가치’지만 민주는 자유라는 가치를 가장 잘 담을 수 있는(적어도 지금까지는) ‘일종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세계의 동서와 역사의 고금에 일어난 민주화 투쟁이란 그 본질을 찾아가면 자유를 위한 투쟁이란 겁니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자유만을 내세우면 홉스가 말한 소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선진된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내 자유는 소중하다. 그러나 내 자유를 위해 남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분명합니다. 폴리스라인을 넘은 80세가 넘은 미국의 22선 의원이 순순히 수갑을 차는 모습, 시민통행을 위해 보도 절반은 남겨두고 시위대가 행진하는 일본의 모습 ... 이런 모습들을 볼 때마다 저는 부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프랑스의 계몽철학자 볼테르가 한 말로 알려진 유명한 말이 있죠. “나는 당신의 행동과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고 생각할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내 생명을 버릴 각오가 돼있다. ...” 근데 황당한 것은 국가전복 혐의로 재판을 받는 이석기가 이 말을 인용하더군요. 사람들은 사상과 신체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유가 자유를 깨기 위한 자유여서는 안 됩니다. 이석기 괘변을 죽은 볼테르가 들었다면 시체가 벌떡 일어나 이석기 주둥이를 찢겠다고 달려들었을 노릇입니다.

자유의 가치를 잃은 민주는 종종 큰 재앙을 불러일으킵니다. 따지고 보면 인류 최악의 반인륜적인 학살을 자행한 히틀러와 나찌도 민주적 선거에 의해 탄생됐습니다. 민주가 자유를 떠날 때 이런 비극이 벌어집니다. 이석기가 노린 것도 바로 이런 민주의 취약성 아닌가 합니다. /조전혁 명지대 교수, 전 국회의원